추천의 글 | 토끼 발과 카페오레감수의 글 | 위대한 작가의 불완전한 시절소개서문1부 길 위의 방황생 미셸 광장의 좋은 카페거트루드 스타인의 가르침길 잃은 세대가난한 소설가를 위한 서점센강은 고독해2부 파리를 헤매는 시간봄날 아침경주마에 거는 도박배고픔에 대한 생각작가들의 뒷담화행운의 부적과 방해꾼3부 펜 끝이 향하는 곳위스키를 마시는 화가에즈라 파운드의 후원 모임잘 가시오, 스타인 선생동명이인을 만나다주머니에 시를 넣고 다니는 남자악의 대리인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하여4부 초조한 마음미친 소설가 부부크기의 문제파리는 영원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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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 Heming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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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청년 헤밍웨이의 서툰 시절을 담은 파리 회고록“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을 온몸으로 느끼지만,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나는 파리를 떠올린다.”우리가 알고 있는 헤밍웨이는 이렇다. 전쟁문학의 걸작인 『무기여 잘 있거라』로 명성을 얻었고,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로 수십만 부 넘게 팔리는 대성공을 거둔 작가. 인간의 한계를 불굴의 정신으로 풀어낸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자신의 문학론을 통해 “인간은 파괴될 수 있지만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명문을 남긴 작가. 우리가 알고 있는 헤밍웨이는 보통 이 정도다. 그가 명성을 얻은 이후의 모습에 국한될 뿐 그에게도 서툰 시절이 있었음을 알지는 못한다.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한다. 위대한 소설가 헤밍웨이에게도 서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헤밍웨이는 스물다섯에 해외특파원 자격으로 파리로 건너가 아내 해들리와 가난하게 살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헤밍웨이는 문학계 동료들뿐만 아니라 예술계 유명인들까지 우연히 만나 교류하며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키운다. 1921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헤밍웨이의 모습이 어떤지 궁금하다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떠올리면 된다. “사실 파리는 비가 올 때 가장 아름다워요.”라고 말하는 벨 에포크(유럽의 태평성대) 시대의 예술가들.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폴 고갱, 그리고 헤밍웨이. 국적도 다르고 예술론도 다른 그들은 모두 프랑스 파리로 왔고 서로를 만났다. 생 미셸 광장의 카페에 가면 언제나 누구 한 명은 꼭 그곳에 있었고 혹시 아무도 모르더라도 간단한 소개로 새로운 친분을 가질 수 있었다. 헤밍웨이의 문학적 성공의 자양분은 파리였다고 할 수 있다. 스물다섯의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 다양한 경험을 쌓고 예술론을 공부하며 역량을 키운 덕에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작가로서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명성을 얻은 이후 1957년 가을 쿠바에서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을 회고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글을 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위대한 작가의 사소한 일상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당대의 예술가들과 함께 한 시간들을 마치 흑백영화를 보듯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물다섯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만난 예술가들삶의 본질적 고통과 그들이 던진 찬란한 질문들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만났던 인물들과의 일화가 자세히 소개된다. 특히 사람인 거트루드 스타인과의 일화가 인상적이다. 당대에 이미 문학계 거장으로 인정받은 거트루드 스타인은 청년 헤밍웨이와 그의 지인 예술가들을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라고 명명했다. 길 잃은 세대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절망과 허무감을 문학에 반영한 젊은 세대를 뜻했으며 인생의 의미나 목표를 잃고 방황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는 길 잃은 세대를 대표하는 세 명의 예술가였다. 스타인은 허무와 체념에 빠져 일상을 내팽개치는 길 잃은 세대를 향해 자주 쓴소리를 퍼부었다. “자네들은 모두 길 잃은 세대야. 전쟁에 나갔다 온 젊은이들 전부 다 마찬가지라고. 자네들은 재능은 있지만 존중심이란 게 전혀 없어. 죽도록 술만 퍼마시고 헛소리만 내뱉으면서 다 파괴하려고 하지.”스타인이 하는 말을 듣고 그날 밤 헤밍웨이는 집으로 걸어가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자기중심적이고 정신적 나태함을 간직한 스타인과 (헤밍웨이의 지인이자 소설가인) 셔우드 앤더슨의 절제력을 비교해 보면 누가 누구를 길 잃은 세대라고 명할 수 있겠는가? 헤밍웨이는 길 잃은 세대라는 명칭을 “비열한 꼬리표”라고 반박하며 한 세대를 납작하게 평하는 스타인에게 반기를 든다. 그러나 여전히 문학계 거장인 스타인은 헤밍웨이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여러 예술가 인맥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왔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정한 위로와 애정을 표하는 스타인을 떠올리며 헤밍웨이는 “어쨌거나 거트루드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1920년대 파리는 이런 곳이었다. 서로를 폄하하고 상대를 함부로 대하고 한 세대를 자기 마음대로 명명하고 타인을 쉽게 평가하지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뭉칠 때면 무엇도 따지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다른 이들을 도왔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파리라는 장소가 주는 무한한 특권이었을지도 모른다. 헤밍웨이는 지나간 것들을 두고 미웠던 것까지도 모두 사랑했었다고 회고한다.“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무척 가난하고 매우 행복했던, 우리들의 눈부신 젊은 시절 파리의 모습 그 자체를 뜻한다.” 한 작가의 인생론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그의 소설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왔던 다채로운 삶에 대한 행적을 낱낱이 좇는 게 중요하다. 파리에서 머문 6년의 시간은 헤밍웨이에게 소중했던 시간이다. 그가 무엇을 보고 누구와 만나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가난하고 미숙했던 헤밍웨이만이 말할 수 있는 진리는 무엇이었는지. 당대의 가장 유명했던 예술가들이 실제로 어떤 말을 주고받고 무엇을 고민했는지. 헤밍웨이의 눈으로 보았을 때 거트루드 스타인의 이기주의와 피츠제럴드의 부부 싸움은 어떤 모습을 하였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경험이 씨앗이 되어 30년 후 헤밍웨이를 위대한 소설가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서툰 시절’은 있을 수 있다. 하물며 위대한 작가에게도 그런 시절은 필연적이다. 가난하고 미숙한, 하루하루 불안에 떠는 청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가능성을 품고 살아갔던 헤밍웨이와 당대 예술의 도시 파리의 삶을 탐험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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