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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꿈에서 시를 쓰다 빠지다 괜찮다 포개어진 세계에서 산수유 꽃그늘 아래 가지가 찢어지다 우린 모두 어딘가에서 왔다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없는 둥글게 둥글게 안녕, 미자르 소리가 소리를 두드린다 시간 저장소 시간의 얼굴 시간에는 빈틈이 없다 Ⅱ 희망이라는 절망 까치집 이후의 빛 선각여래를 만나 뵙고 겨우 전부 붉은 숲 서울의 밤 우리들의 밤을 위하여 키세스 키세스 키세스 눈게야, 너 어디 갔니?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무지개 너머로 어쩌면 신이 있는 거 같기도 하다 좀비들 Ⅲ 툭, 잎이 지고 예순네 개의 손 꾀꼬리 머리카락이 뭐라카는지 물은 혼자서도 길을 찾아간다 알 수도 있는 사람 푸른 여권 땅끝에서 보낸 날들 로드킬 S/Z 누구시던가? 선인장꽃 봄의 전언 송홧가루 귀소(歸巢) Ⅳ 분갈이를 하며 꽃 따기 둥근잎유홍초 풀과 벌레 방아쇠를 당기며 왼쪽으로 넘어지다 엔딩 송 내가 누운 곳 방풍나물을 먹으며 그림자 지우기 사랑의 무게 언젠가 우리 다시 비록 먼지가 된다 해도 우수아이아 작가 노트 113 산문시집을 엮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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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싸졌다. 십여 년 전부터 공급이 넘치기 시작하더니 가격이 폭락했다. 백화점 명품코너에서 VIP 고객에게만 밀거래하듯 판 적도 있었는데, 이젠 동네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들리는 말로는 희망을 생산하던 지식 엘리트들의 담합이 깨졌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방송에 나와 떠드는 자칭 전문가에 의하면 원래 효과가 미미한 것이었는데 드디어 소비자들에게 그 정체가 들통났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우리처럼 평생 희망이란 걸 사본 적 없는 보통 사람들이야 값이 오르든 내리든 상관이 없지만, 나는 어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을 겪었다. 그리스 여행을 다녀온 소평 씨가 선물이라고 준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 상한 희망이 한 봉지 들어 있었다. 아마도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비행기로 오는 도중 탈이 난 듯했다. 준 이도 몰랐지 싶다. 속이 무르고 색깔이 변했는데, 우리나라 썩은 희망과 비슷해 보였다. 그냥 버려야 하나, 준 이를 생각해 잠시라도 보관해야 하나,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희망이 조금씩 조금씩 절망으로 변질돼 갔다. 세상 썩는 냄새가 고약했다.
--- 「희망이라는 절망」 중에서 엊그제 밤엔 꿈꾸면서 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정말로 두 눈에 눈물이 흥건했다. 얼마나 울었던지 이불이 다 젖고 침대가 홍수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엉엉 울었던 것 같은데, 잠꼬대 소리를 내진 않았나 보다. 그러니까 그 슬픔은 나만의 비밀로 숨겨도 될 터이지만,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 공개하는 바이다. 그렇게 슬펐던 이유는, 내가 쓴 시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엉엉 울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울어서 나도 따라 울었다. 아주 슬픈, 딱 여섯 줄짜리 시였다. 첫 행을 읽을 때 사람들이 경직되더니, 두 번째 행을 읽을 때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세 번째 행을 읽자 오열하기 시작했고, 네 번째 행을 읽을 땐 통곡했다. 다섯째 행을 읽었을 땐 산천초목이 부르르 떨었고, 마지막 행에 이르러서는 온 세상이 눈물로 해일을 이루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잠에서 깨어 그 시구를 아무리 생각해 내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겨우 여섯 줄인데, 세상을 뒤집어 놓을 걸작인데, 내 생애 최고의 작품이 분명한데, 발표하기만 하면 노벨상쯤은 따 놓은 당상일 텐데, 그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게 슬퍼서 다시 잠 못 이루고 엉엉 울었다. --- 「꿈에서 시를 쓰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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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견디는 유머
이 시집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시인이 절망을 정면에서 마주하면서도 유머를 통해 그것을 견디는 독특한 시적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이 유머는 단지 익살스러운 장면이 아니라, 절망을 인식하고 언어화하는 방식의 일부다. 「까치집」은 까치 부부의 토속적이고 민담적인 말투로 부동산 이야기를 풀어내며, 도시의 주거 위기와 사회적 불균형을 은근한 풍자로 환기한다. 가장 유머의 미학이 도드라지는 작품은 「알 수도 있는 사람」이다. SNS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절세미인들과 노년 남성의 당황스러운 조우를 통해, 기술과 인간의 어색한 관계, 그리고 욕망의 아이러니를 자조적으로 풀어낸다. “야관문”, “아우아의 가슴” 같은 표현은 유쾌하면서도 쓸쓸하고, 결국은 인간의 본질적 외로움과 충돌한다. 이러한 유머는 시인의 진지한 현실 인식과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슬픔을 더 정직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며, 고통을 무장 해제하는 윤리적 유희로 기능한다. 『희망이라는 절망』은 웃음을 통해 절망을 해부하고, 그 너머의 진실에 도달하려는 시인의 태도를 강하게 드러낸다. 「붉은 숲」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기억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며, 집단적 망각과 고통의 전이를 담는다. 「눈게야, 너 어디 갔니?」는 기후위기를 생태적 감각으로 환기하며, 알래스카에서 사라진 눈게를 통해 인간의 탐욕과 자연의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툭, 잎이 지고」는 일상의 감각을 포착한 시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얼마나 미세하게 교차하는지를 감각적인 언어로 형상화한다. 존재론적 사유가 보다 깊어지며, 우주적 시선이 배어드는 시들도 눈길이 머문다. 「둥글게 둥글게」는 사과, 별빛, 밥공기, 비둘기 알 등의 이미지 속에서 만물의 순환성과 조화로운 리듬을 시적으로 풀어낸다. 「푸른 여권」과 「땅끝에서 보낸 날들」에서는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존재의 항해가 시작된다. 죽은 자와의 재회, 비언어적 차원의 감각, 낯선 여행지는 결국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된다. 『희망이라는 절망』은 절망의 감정을 해체하고, 그 틈새에서 시적 진실을 길어 올리는 시집이다. 시인은 절망을 포장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말하는 윤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창작의 고통과 언어의 부재조차 시의 일부로 삼으며, 시를 쓰는 행위 자체를 끊임없이 성찰한다.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문학을 어렵지 않게, 일상의 언어 속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산문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물고 독자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는 시집 전반에 걸쳐 뚜렷이 드러난다. 『희망이라는 절망』은 정한용 시인의 문학적 도전이자, 존재를 둘러싼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 시집은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를 성찰하는 독자, 혹은 처음 문학을 접하는 독자 모두에게 넓은 울림과 공감을 안겨줄 것이다. 작가 노트 저는 1980년에 평론으로 먼저 데뷔했고, 1985년에 『시운동』이라는 동인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여덟 번째 시집 『희망이라는 절망』을 마침 시작활동 40주년이 되는 해에 내게 되는군요. 40년이면 결코 짧다 할 수만은 없을 듯합니다. 그간 내 생애에 여러 파고가 지나갔고, 세상 보는 눈도 여러 차례 굽어졌을 겁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삶을 산 게 아니라 삶에 내가 이끌려온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삶이 들려준 이야기를 받아적으며 살아왔는데요, 앞으로 언제까지 시를 계속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시보다 훨씬 재미있는 게 많은 세상이니까요. 그래도 별다른 재주가 없으니, 앞으로도 꾸역꾸역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받아 적는 수밖에요. 사실 이런 넋두리는 저 자신에게 거는 주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정한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