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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로 만든 배
전경린
생각의나무 200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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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1,2』의 개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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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작가의 말

프롤로그
스물다섯 살
아홉 번째 행성, 플루토
난 지금 혼자 있고 싶지 않아
결혼, 양부의 집에서 다른 양부의 집으로
자기 생산과 자기 매매
동시에
중단된 편지
센티멘털 왈츠가 끝났을 때
초록 레이스 마을 교본
저기 노루가 있었어요
나는 뒤집힌 연못처럼
첫사랑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조심하세요
나의 사랑은 당신보다 깊다
해변 소풍
무참한 얼룩
내 방의 다른 주인
이렇게 불쾌한 사랑
신문 스크랩
그리고 5년 뒤에

작품 해설

저자 소개 1

全鏡潾, 본명:안애금

흔히 '귀기의 작가' '정념의 작가'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전경린은 이미지의 강렬함과 화려한 문장으로 기억된다. 서른 세 살. 아이와 피와 심지어 죽음조차 삶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느낀 작가는 허구가 아닌 삶의 실체를 갖고자 소설을 쓰기로 시작했다. 1993년 작가의 가족은 마산 옆 진양의 외딴 시골로 이사를 갔다. 꽤나 적적한 곳이었지만 여기서 전경린은 `뭔가가 밖으로 표출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3년 가까이 사람들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들어앉아 많은 글을 써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내면적 세계와 질서화 되고 체제
흔히 '귀기의 작가' '정념의 작가'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전경린은 이미지의 강렬함과 화려한 문장으로 기억된다. 서른 세 살. 아이와 피와 심지어 죽음조차 삶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느낀 작가는 허구가 아닌 삶의 실체를 갖고자 소설을 쓰기로 시작했다.

1993년 작가의 가족은 마산 옆 진양의 외딴 시골로 이사를 갔다. 꽤나 적적한 곳이었지만 여기서 전경린은 `뭔가가 밖으로 표출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3년 가까이 사람들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들어앉아 많은 글을 써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내면적 세계와 질서화 되고 체제화 된 바깥 세계 사이의 작용과 긴장과 요구 속에서 갈등하는 여성과 여성적인 삶이 문학적 관심사다.

작가의 본명은 안애금. 전혜린을 연상시키는 전경린이라는 이름은 옛날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 임시로 지었다. 당시 누가 `린'이라는 화두를 주었고, 차례대로 `경'과 `전'을 추가해서 `전경린'이라는 이름을 완성시켰다. 작가도 물론 `전혜린'을 떠올렸다. 작가는 전혜린을 좋아한다. 그리고 전혜린뿐 아니라 나혜석, 윤심덕 더 올라가서 황진이까지 소위 강한 자의식 때문에 고통 받고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선각자적 여성을 좋아하고 흠모한다.

196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으며 경남대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KBS에서 음악담당 객원 PD와 방송 구성작가로 근무했다. 그 후 운동권이었던 남자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다 둘째를 낳은 후인 1993년부터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사막의 달」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하였으며 1997년 「염소를 모는 여자」로 제29회 한국일보 문학상, 1997년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로 제2회 문학동네 소설상, 1998년 단편소설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으로 21세기 문학상, 2004년 단편소설 「여름휴가」로 대한민국소설문학상 대상, 2007년 단편소설「천사는 여기 머문다」로 제31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 『바닷가 마지막 집』, 『물의 정거장』,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열정의 습관』,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황진이』, 『엄마의 집』과 어른을 위한 동화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 『붉은 리본』, 『나비』 등이 있다.

전경린의 베스트셀러인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은 2002년 변영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가정의 틀안에서 안주하던 한 여성이 내면에 지닌 혼란스런 욕구를 발견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나타나는 일탈과 매혹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천사는 여기 머문다」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섬세한 문체와 절제된 기법을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삶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내면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 『엄마의 집』에서는 처녀의식을 가진 엄마들에게 “미스 엔”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아버지에게도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종속당하지 않는 미스 엔이 그녀의 소설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여성들의 욕망에 주목해 온 작가답게, 현실의 엄마가 놓인 지형을 넘어서는 대안적이고 이상적인 집의 전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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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01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311쪽 | 443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4983960

줄거리

사랑을 묻는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는다. 사랑은 합리적인 갈망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본능이기 때문에.

스물다섯 살이란 여자들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희망을 잃는 나이이다. 스물다섯의 여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결혼하여 안정적인 체제에 편입되는 여자와, 그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모진 여행을 떠나는 여자.
‘은령’은 여행하는 측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스물다섯 살의 은령은 어머니가 열다섯 살이 많은 남자에게 재가를 한 후, 14년 동안 양부의 집에 얹혀서 눈칫밥을 먹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한다. 그녀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규범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란 남자친구 선모와 결혼하기로 내심 결심하지만, “좋은 벗 같은 사돈과 딸 같은 며느리를 얻는 것”을 소망하는 선모의 부모로부터 퇴짜를 맞는다. 그들이 문제삼은 건 은령 엄마의 재가와 엄마가 양부와의 사이에서 난 갓난아기이다. 이후 은령은 그다지 사랑하지도 않았던 선모와의 결혼을 깨끗이 단념한다.
때마침 은령은 선배로부터 지방 방송국의 구성작가 자리를 소개받고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곳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다. 지방 도시로의 취업은 은령에게는 여행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양부의 집을 떠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지방 해안 도시에 내려온 은령은 식당 건물의 3층 단칸방에 세 들어 빈한하고 외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한 그녀는 남성들의 권위와 성적인 희롱, 직업과 조직에 대한 근본적인 열정의 결여로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스물다섯 살의, 뿌리 없는 생에 대한 권태. 그녀는 권태를 잊기 위해 레이스 뜨기를 한다.
어느 날 은령은 그 지방의 시인 문유경을 일 관계로 만나게 된다. 문유경은 “생의 본질과 본질적인 폭력과 도발과 관능을, 그런 폭력과 도발과 관능으로부터의 가혹한 호출 같은 역겨운 출생을 보여주는” 시를 쓴다. 은령은 그의 시에 깊이 공감한다. 죽음의 신 ‘플루토’에서 이름을 빌려 온 카페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한눈에 서로에게 ‘결핍’의 동질감과 거기에서 오는 은밀한 친근감을 느끼고 관계를 맺게 된다. 유경은 자신이 사생아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오랜 상처를 은령에게 고백한다. 아버지에 대해서 단 한번도 말해주지 않는 어머니의 냉담과 그녀가 견딘 인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자란 유년의 이야기들. 유경과 은령은 연인처럼 다정스레 저녁을 같이 먹고 음악을 같이 듣는다.
어느 날 은령은 유경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이진이라는 남자를 소개받는다. 이진은 전직 교사이며 카페 ‘플루토’를 운영하는 돈 많은 마흔 셋의 남자이다. 은령의 눈에 유경과 이진은 친구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한 미묘한 관계로 보인다.
이진은 유경과 이미 연인 사이로 발전해 있는 은령에게 호감을 느끼고 은령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차 안에서 은령의 입술을 훔치는 등, 은령의 육체를 도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엿본다. 결국 은령은 유경, 이진과 함께 한 1박 2일의 별장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이진에게 몸을 허락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몹시 곤궁에 있던 은령은 이진이 보여주는 물질적인 안락과 성의 쾌락 앞에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이진이라는 남자에게 설명할 수 없는 연정을 느끼게 된다. 육체적인 쾌락을 탐닉하면서 은령은 “자의식 없이 욕망으로만 가득한 몸”을 경험하고 그것에 속절없이 빠져든다.
이진은 사랑을 확인하려는, 그것을 정의하려는 은령에게 “사랑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며 “산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보람도 없이 헛된 궤도를 돌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상처를 통해 삶의 비애를 너무 일찍 헤아려버린 유경 역시 사랑을 기대하는 은령에게 “사랑은 합리적인 갈망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본능”이며 “사랑이란 동시성을 잃고 시간 밖에서 생각하면 늘 그렇듯이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은령의 마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은령은 유경에게서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절대로 보통 사람들처럼 가족을 이루고 안전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은 슬픈 결락의 예감을 한다. 그녀는 깊은 혼동 속에서 유경과 이진 사이를 주기적으로 배회한다. 일주일에 세 번은 이진의 호화빌라에 가서 점심을 먹고 일주일에 다섯 번은 유경과 저녁식사를 한다. 유경은 은령에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이진은 눈물이 나도록 잔인하게 욕망을 부추기는 남자로 다가온다. 뭔가 더러운 것이 가득 차오른다는 생각이 들 때는 유경을 찾아가 그의 품에 안기고, 속이 빈 듯 공허해질 때면 이진의 빌라를 찾아가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것이다.
결국 이 이상한 관계에 파경이 찾아온다. 비오는 어느 날 저녁 은령의 방에서 유경과 이진이 동시에 마주친 것이다. 두 사람은 은령이 보는 앞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둘 모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령에게서 떠나간다. 은령은 두 사람의 이름을 크게 부르지만 어느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은령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던 유경은 결국 그 다음 날 밤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진 역시 은령을 단호하게 멀리한다.
유경이 자살한 사실을 모르는 은령은 플루토와 이진의 빌라와 유경의 아파트를 반복적으로 찾아가지만 그 누구도 만날 수 없다. 플루토의 종업원으로부터 이진이 여행중이라는 소식만을 전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은령은 자신에게, 혹은 유경과 이진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은령은 이진의 친구인 ‘주’를 만난다. 은령은 그로부터 비로소 유경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은령은 충격을 받고 한 달 동안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간은 무심하게 흐른다. 그리고 그 무렵의 어느 날 새벽, 은령은 의붓오빠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교통사고를 당해 양부는 즉사하고 엄마는 의식불명”이라는. 은령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이미 영안실로 보내진 뒤였다.
5년이 지나고 은령은 어머니가 양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의붓동생 성이에게 자신의 성을 주고 그 아이와 함께 산다. 그녀는 가끔 혼동을 한다. 의붓동생이 마치 “아주 오래 전에 누군가를 지독히도 사랑하여 남 몰래 낳아 키우는 사생아” 같다고.
그리고 은령은 묻는다. “유경과 이진, 그 두 사람 중 누구를 더 사랑했던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한 남자 혹은 아무도 아닌, 어쩌면 둘 다 혹은 그 둘 사이의 어떤 것. 사랑이거나 혹은 아무 것도 아니었거나.”
그리고 은령은 깨닫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사랑에 대한 과대망상 따윈 없다. 삶이 그렇듯 사랑 역시 매우 사적이고 애매하고 미결정적이며 성향에 따라, 운명에 따라 깊이도 형태도 비중도 천차만별인 것을.”
“삶이 깊어지면 개념은 없어진다는 것.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규정된 관념이 아니라 그 너머 저마다의 낯선 벼랑길을 걷는다는 것. 그래서 생은 여전히 미확인적인 유혹을 생산해 낸다는 것.” 은령은 5년이 지나고 나서야, 스물다섯의 혼돈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녀는 평범한 것들이 조금씩 삶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가끔 황무지의 환으로부터 생겨나 다시 거대한 황무지로 명멸해 갈 자신의 은밀한 삶과 신기루 같은 육체에 이따금 전율과 같은 애정을 느끼면서.” 그녀는 삶을 이해하고 그것에 조응하는 자세를 비로소 터득한다.

출판사 리뷰

스물다섯 살, 황홀하며 불온한 반역의 사랑
그 후 삶을 알아버린 적막감

전경린 소설은 우리 문학의 선명한 이색이다. 오정희 이래로 이만한 개성을 보유한 적이 또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경린 소설에 대해서 발언하는 일은 일종의 위험(Risk)을 수반한다. 그녀의 작품에 대하여 선연하고, 직관적이며, 불온하고, 차갑다, 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귀기” 혹은 “정념”이라고 지금껏 불리운 그녀의 개성에 승복했으며 그것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승복하는 것 혹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몹시 곤혹스럽고 불편한 일이다. 그녀의 눈과 혀는 늘 우리의 위태로움과 허술함, 곤궁함 등을 샅샅이 핥고 건드리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의 작품은 우리 시대의 뛰어난 체감계이거나, 예민한 촉수가 되어준다.
이 작품에서도 작가의 영민한 귀재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녀의 성능 좋은 안테나 같은 직관은 우리 삶의 누추한 이면과 행간을 들추며 지나간다. 그 풍경은 해안 도시의 불온한 날씨와 폭염 아래 채워지지 못하는 한 여름의 갈망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그런 주인공의 영혼을 거부하거나 조롱하지 못한다.
전경린의 작품은 이처럼, 왜곡된 존재들을 바로 세워 그들에게 새로운 존재의 의미성을 부과해, 삶의 은일한 본질을 들추어야 한다는 소설의 재래적인 기능을 알고 있는 많은 독자들을 안정적으로 포섭하는 동시에 그들을 도발적으로 회유한다. 전경린의 소설은 그러니까 하나의 허구적 당위로서 출발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의 소설적 진실은 허구이기 이전의 세계, 말하자면, 그것을 넘어서는 너무도 생생한 삶의 배후와 전경에서 태어난다.
언제나 그렇지만 전경린의 소설이 지시하는 것은 삶의 개연으로서의 징후라기보다는 사태의 핵심 속에서 생생하게 확인되는 본질에 가깝다. 까다롭게 감춰져 있는, 견고하게 은폐되어 있는 삶의 중심의 구조를 전경린은 언제든지 요량껏 휘젓고 해체시킨다. 그렇게 하여 그녀는 허술한 삶이 가진 극과 비극적인 것의 경계와 그 경계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아슬아슬함을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소설 속 ‘유경’이 보여준,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전율도 없이 죽어가는 잠과도 같은 아찔함을 지닌다.
그녀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인공의 포즈를 가진, 허우대만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육체성에 대한 감각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문제적 징후를 스스로 발견하는, 각성하는 자아들이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의 ‘이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미흔’이 그렇고, 이 소설의 ‘은령’과 ‘유경’과 ‘이진’이 그렇다. 각성하는 자아들의 목소리는 우리의 허술한 삶의 공동을 날카롭게 울리기에 충분하다. 그녀에게 문제를 품지 않은 존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경린 소설의 이색적인 느낌은 그녀 특유의 집약적인 문체에서도 비교적 뚜렷하게 확인될 수 있다. 곳곳에 바늘처럼 숨어 있는 비약과 은유의 어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의 날카로운 직설을 꽤 용이하게 제어하고 수식한다. 날선 말들을 통해 그녀는 고통스럽게, 혹은 천연덕스럽게 생의 불합리하면서도 허술한 국면을 만들어내고 이를 무참하게 무너뜨린다.
주인공 은령은 “심각하게 희망을 잃는 나이”인 스물다섯이고 그녀에게 세상은 ‘양부’의 세계이다. 그녀에게는 양자택일이 강요된다. 결혼을 하여 안정된 기성의 질서에 편입하거나, 아니면 어지럽고 쓸쓸한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여행이다. 그 여행은 이쪽의 보편을 훌쩍 넘어서는 저쪽의 보편을 예비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런 류의 여행은 문학적 소재에서 그것만으로 새로울 수 없으며 새로움을 획득하지도 못한다. 현대의 작가들에겐 전략 이후의 그 어떤 것, 보다 근원적인 것이 요구된다. 이를테면 단호하고 염결한 ‘입장’ 같은 것.
물론 전경린에게는 전경린류의 입장이 있다. 그것은 매우 충동적이며 위악적인 형식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범박한 의식이나 제스처로 읽혀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몸의 도발이며, 그 도발을 통해 비로소 그녀의 입장은 감행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은령’ 역시 도발한다. 양부를 떠나 지방의 해안 도시로 내려온 그녀는 그곳에서 ‘방랑하는 영혼의 전제 없는 사랑’을 꿈꾼다. 은령은 그곳에서 생의 근본적인 공허함을 잘 알고 있는 시인 유경과 여자에게 한 번도 사랑받아보지 못한, 욕망만이 남아 있는 재력가 이진을 만나 둘을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은 제도화된 기성의 눈으로 볼 때 매우 혼란스럽고 부도덕한 형태의 사랑이다. 하지만 전경린은 이 사랑에 불합리하고 본능적인 생의 본질을 투영시키고 그것을 옹호한다. 그녀는 ‘은령’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넘쳐보지 않고는, 바닥까지 뒤집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것이 삶이며 사랑이다.
이 전작 소설을 통해 전경린의 문학적 지도는 무한히 의미 있는 확장을 한다. 전작들처럼 이 작품도 폭발을 예비하는 성능 좋은 뇌관으로서의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귀기’와 마술적인 ‘계시’ 등을 활용하는 서사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또한 이러한 테마를 선명하고 날이 선 육질감과 육성이 장려하게 수식한다. 이 보기 드문 육체성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그녀가 나아가는 지점을 스스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녀가 짓는 집은 전에 없이 융숭하며, 그윽하고 탄탄하다. 귀기와 정념의 비릿한 냄새는 다소 걷혀진 대신, 그 자리에 현실적이면서도 육중한 질감과 생생한 삶의 오브제로서의 오롯한 부감이 들어선다.
전경린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위험하고 불온하며,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것들은 진실과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는 존재들의 숙명적인 에피세트이다. 그 불안과 혼돈을 전경린은 초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의 내면에 방문”하는 것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어쩌면 방민호가 해설에서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제도를 넘어선 사랑, 혈연을 넘어선 가족에의 꿈”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전경린은 누군가가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결코 삶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결국 극중 ‘은령’은 모든 혼돈이 끝난 후(5년 후 서른 살이 되어) 비로소 평범한 사물들, 혹은 그것들의 소소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일상에서 평온을 느낀다. 삶을 다 알아버린 후의 평화로운 적막감이 뜨거운 격통의 시기를 보낸 한 존재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사물들과의 유리가 아닌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평화. 혹시 이것이 전경린이 꿈꾸는 희망일까.
그녀는 극중 ‘유경’의 입을 빌어 “삶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사물들과의 관계가 필요한” 것이며, “사물은 내가 이곳에 살아 있음의 최소한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그 문맥의 울림이 시사하는 바가 심상치 않다.


작가의 입장들

성_Sex
“사람들은 이성적이니 사고를 내세워 늘 성을 은폐하려 들지만 성은 생명의 기원이고 핵심입니다. 특히 여자들에게 성은 존재 증명의 한 방법이지요. 그것은 여자의 해방이며 가정의 힘이기도 합니다. 성의 절정을 아는 여자들이라면 무기력하게 스스로를 방치하는 일은 하지 않아요. 생기 있게 사는 방법을 아니까요.”

나_Ego
이제 나는 나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온전히 나일 뿐이다. 나는 흰 새들이 잠드는 검은 숲 속을 안다. 나는 검은 물의 따스함을 안다. 나는 가장 멀리까지 빛을 내달리게 하는 깊은 어둠의 내면을 안다. 나는 세계가 잠든 사이에, 나무들이 걸어다니는 비밀스러운 기간에, 콜타르 같은 어둠 속에서 그네를 타려는 사람이다. 나는……, 달에게로 간다.

글쓰기_Writing
나의 글쓰기는 철저한 내 삶의 여정에서 생산됩니다. 내 눈은 사슬에 묶인 삶을 발견하고 멈춥니다. 사슬을 풀 때는 어김없이 피가 흐릅니다. 억압 속에서도 사랑이, 고통 속에서도 평화가 있게 마련이어서 묶인 것을 풀 때는 늘 이를 악물어야 합니다. 피와 꿈과 순결한 치정의 궤적이 곧 나의 글쓰기예요

사랑_Love
“나는 어릴 때부터 합법적으로 제도에 편입되어 기념비가 되는 사랑보다 성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다치며 내쫓기는 비합리적인 사랑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런 사랑은 야생적인 것이고 제도 바깥의 것이며 세상이 쳐놓은 휘장 너머로 무한히 열려 있었지요. 거듭되고 표절되는 진부한 삶의 궤도를 이탈해 돌연변이를 보여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 섬광이 나는 늘 아름다웠습니다.”
-인터뷰 기사

“사랑의 속성은 파멸이지. 사랑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오. 어쩌면 그것은 생과 반대편에 있는 것 같애.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이냐, 생이냐의 갈림길에서 종종 생으로의 투항을 강요당하는 것이고. 행복한 생이란 자기의 사랑과 상대의 사랑, 그리고 유실되는 시간에 대한 기만을 무거운 관용으로 끌어안고 가는 서글픈 미학이지.”.
-〈아무것에도 없는 남자〉 중

여성_Female
대체 우리가 식민지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개화기 여자인가……. 왜 이 나라에서 이토록 모성을 보호받지 못하는지, 왜 대학을 졸업하고 나온 젊은 여성들의 직업적 진지성을 의심받아야 하는지, 왜 이제 막 일에 탄력이 붙으려 할 쯤에 일과 아이 중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결락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왜 배운 것마저 다 잊어버린 40대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은 얼굴로 다시 집 밖으로 나가 음식이나 숙박업, 할인점과 백화점 같은 유통업계와 외식업계의 비정규직 파트타이머로 사회의 허드렛일을 하는 아줌마부대로 전락해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하자면, 육아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분담이 지금 당장 시행되어 여자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동시에 주체적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25세부터 40세까지의 여성이 그려보이는 노동 단절 곡선을 보면서 나는 30대 여성의 사회적 실종은 명백히 경제와 야합한, 여성에 대한 정치적 착취행위라고 생각한다. 모성과 경제문제는 의사와 약사 간의 집단 이익 다툼과는 다르다. 그것은 휘청거리는 이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하다.
-2001년 4월 27일자 조선일보 칼럼


작가 초상 및 작품 세계 해설

전경린의 소설은 우선 우리가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여성소설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탐색’에 대립하는 ‘로망스’,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 센티멘털한 플롯, 자전적인 서사 “ 이러한 여성소설의 일반적 특징들이 그녀의 작품들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가지고 그녀의 소설적 개성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녀의 소설은 전체적으로 여성적이라는 에피세트에 어울리지 않는 격렬함과 단호함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경린이 자신의 젠더를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우리가 막연하게나마 적정성(適正性)이라고 부르는 미적 규범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들이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욕망이나 의식에 과감하게 출구를 열어준다. 그녀의 소설에서 듣게 되는 서술적 목소리는 보통 여성작가들이 부담스럽게 의식하는 미학적, 도덕적 금기들에서 자유롭다. 전경린의 소설에 실로 특징적인 것은 서사의 관습적 규범들을 거추장스러울 지경으로 만드는 강력한 표현의 의지이다. 그녀가 부리는 여성 작중화자들의 담론은 종종 스토리의 경제에 봉사하는 수준을 넘어서 정력적인 웅변이나 독살맞은 사설을 이루며, 그것이 전하는 스토리 역시 긴축과 완결이라는 미학적 요구에 쉽사리 굴복하지 않는다. 작품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괴이한 파격은 전경린의 소설이면 어디서나 얼마만큼은 받게 되는 인상이다. 『염소를 모는 여자』에 관한 짧은 논평에서 남진우가 ‘바로크’라는 말로 그녀의 소설을 형용한 것은 그런 점에서 아주 적절하다.

전경린의 소설은 도덕적 율법에 길항하는 정열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사람 저마다의 운명의 완성이라는 비범한 덕목과 연관시킨다. 정열의 삶에 관한 그녀의 소설적 변론은 우리 여성작가들이 이제까지 남긴 어떤 불륜의 로망스보다도 급진적이라고 생각된다. 혹자는 그러한 정열의 급진주의가 내포하는 몰윤리적 맹목성에 염려를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저 ‘본데없는’ 천격의 방종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확인하려는 열정임을 알아보는 일은 중요하다.
-황종연(문학평론가)

전경린 소설의 인물들은 자기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생의 관습적인 고리를 끊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출’과 ‘탈주’를 감행한다. 일상의 균열을 파고드는 ‘불가해한 환상’에 의해 내면을 지배당하는 극중의 여성들의 심리는 정신분석학적으로도 흥미로운 구석을 보여준다. 라캉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전경린 소설의 인물들은 아버지의 질서에 아직 편입되지 않은 상상계의 불안하고 흔들리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들은 이미 기존 질서에 편입한 성인일지라도 무의식 속에 파묻혀 있던 ‘유동적이고도 불안한 광기의 시간’을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백지연(문학평론가)
그는 마음이 약하다. 그래서 더 행복하다. 전경린이 약하다고?
그는 맵짜고 강렬하다. 한번 본 사람은 쉽게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그의 표정은 차갑기도 하고 또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다정하기도 하다. 도무지 끝간 데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이지 그는 몇 가지 불가사의한 기운을 갖고 있다.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무늬를 동시에 지닌 나비 같기도 하다. 그 점이 전경린을 진짜 행복하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고두현(시인)

전경린은 매력적인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언젠가는 거대한 불을 뿜어내며 폭발할 화산의 내부처럼 음험하고 불길하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운명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감으로써 그 운명의 늪 밑바닥에서 자유에 이르는 길을 뚫는다. 그들은 중도에서 멈추는 법이 없다. 운명의 끝에 놓인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 때론 불온한 독기가 되고 때론 귀기가 되기도 하는 강렬한 눈빛이 그들에겐 있다. 그래서 전경린의 매력은 심지어 마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마성이 온전하게 불길하지 않을 때, 그것은 대책 없는 치기나 허황된 감상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마성의, 혹은 귀기어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에도 한편으로는 땅에 견고하게 뿌리박고 있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진실이며 또한 소설의 진실이다. 자기 안의 마성을 끝없이 일상 안에서 그리고 소설 속에서 풀어내야 할 전경린은 이 점에서 주목되는 작가인 동시에 위태로워 보이는 작가이다.
-황도경(문학평론가)

많은 여성작가들이 자기 경험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남성들에 이끌린 나머지 그들에 어떤 뚜렷한 원형적 이미지를 부여하는데 실패하는데 반해 전경린의 남자들은 현실보다는 몽환 속에 인위적으로 존재하므로 처음부터 뚜렷이 구별되는 서로 다른 인간형으로 나타난다. ‘유경’과 ‘이진’의 관계란 말하자면 자기에의 의지를 고집하는 에고이스트와 의지를 부정하는 퇴폐주의자의 그것이다. ‘은령’은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데 그것은 그녀가 두 인간형 모두로부터 결핍을 느낌을 의미한다. 그녀는 두 인간형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를 두려워한다. 그것은 그녀가 그 어느 하나로 충족되지 못하는 영원한 갈망형의 여인이자 그 누구와도 완전한 합일에 이를 수 없는 예외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딸들이 친부에게서 양부의 속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면, 또는 친부의 양부적 속성에 노출되어 있다면 사랑이란 충만하지 않다……. 사랑은 육친애 이상이어야 한다. ‘선모’의 곁을 떠나 ‘문유경’과 ‘이진’ 사이를 오가는 ‘은령’의 사랑을 통해 그녀가 말하고자 한 것이 평속한 습속과 제도를 떠난 사랑의 추구였다면, 의붓 동생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여 남자 없이 키워가는 ‘은령’의 삶을 통해서는 그녀는 혈연공동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참된 가족애를 꿈꾼 것이라 할 수 있다.
-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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