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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집의 풍경
옛집 자연과 어울린 삶터 옛집의 모양과 꾸밈새 옛집의 공간과 또 다른 집 들 옛집에 깃든 신 들 옛집과 만나는 세간들 2. 옛집을 찾아서 우리 주변의 옛집들 옛집의 지역별 특성 옛집 기행 찾아보기 주요 옛집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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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을 들이지 않고 자연으로 들어간 흙과 바람과 초목 속에서 태어난 우리 서민옛집 이야기.
묵묵히 외길 인생을 걷고 있는 장인들의 뼈 마디 굵은 인생을 담은 《장이》, 《꾼》이란 책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시인인 이용한 씨가 사라져가는 서민옛집에 관한 보고서와 기행을 담은 《옛집 기행》을 펴냈다. 흔히 학자들은 집의 어원을 가(家)에서 찾는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집 안에서 돼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가(家)는 ‘사람과 돼지가 함께 사는 공간’을 의미했다. 후에 집은 ‘한 식구가 모여 사는, 삶의 바탕이 되는 곳’으로 보금자리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가(家)의 어원처럼 우리 옛집의 의미는 사람만이 사는 공간을 뜻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옛집은 흙과 바람과 초목 속에서 태어나고 그 수명을 다하면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과의 행복한 어울림을 이루는 존재였다. 또한 지킴이 뱀도 살고 굼벵이도 살고 조상신도 살고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공간을 의미했다. 옛집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자연을 들이지 않고 자연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아기 똥색 옷처럼 누런 우리의 초가 지붕은 마을 뒷산의 능선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뒤는 산이요 앞은 물이 흐르고 집과 집, 마을과 마을 사이에 너무도 인간적인 자연들이 행복하게 어울려있다. 집 안의 대청마루에는 제비가 살고 마당에는 강아지와 닭이 분주히 돌아다녔으며 뒤란과 장독대에는 장독뿐 아니라 우리 야생초들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 자연을 들이려고 하는 현대인의 정서와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민옛집은 ‘한옥’과도 다른 차이가 있다. 흔히 한국의 전통가옥을 통틀어 ‘한옥’이라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한옥이라 하면 규모와 격식을 제대로 갖춘 옛 양반네의 디새집 즉, 기와집을 가리킨다. 초가를 비롯해 굴피집, 너와집, 귀틀집 등은 가장 보편적인 서민의 살림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방송이나 글에서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이것은 당대의 생활상과 시대상을 다양하게 반영하는 우리 옛집의 문화를 한정시키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가장 환경친화적이고 인간적인 서민옛집 이야기를 통해 잊혀져가는 우리 땅 우리 문화의 서정과 풍경을 복원하고자 하였고, ‘새집증후군’이란 질병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자연을 생각하는 옛집의 정신을 전하기 위해 《옛집 기행》을 출간하고자 했다. 2. 자연을 향해 열려있는 행복한 어울림 이 땅의 마지막 서민옛집 보고서 8년 동안 다리품을 팔아 일궈낸 저자의 서민옛집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초가는 모두 420여 채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25채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숫자는 모두 민속마을에서 볼 수 있는 초가이다. 샛집(띠집 포함) 또한 전국적으로 400여 채가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13채를 제외한 나머지 샛집은 성읍마을을 비롯한 제주도의 민속마을과 민속촌에서 볼 수 있는 숫자이다. 그러므로 민속마을을 제외한 초가와 샛집의 숫자는 모두 합쳐 40여 채에 불과하고 이 밖에도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너와집은 6채, 돌너와집 5채, 굴피집 3채, 투막집이 4채(빈집)로 파악되고 있다.(이는 저자가 파악한 우리 서민옛집의 숫자이다) 대체로 이것이 오늘날 옛집의 충격적인 현황이고 현실이다. 저자는 이렇게 우리 서민옛집이 급격하게 줄어든 원인으로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취락구조개선사업을 이야기한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청양군지?는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취락구조개선사업이 얼마나 많은 초가를 없앴는지를 통계로써 보여주고 있다. 1970년 청양군 청양읍에는 1,251채의 초가가 있었지만, 1977년에는 114채로 줄어들었고, 남양에 있던 2,424채의 초가는 258채로, 비봉에 있던 1,583채의 초가는 113채, 대치 1,242채에서 76채, 정산 1,449채에서 224채, 청남 1,288채에서 203채, 장평 1,517채에서 258채, 화성 1,463채에서 100채로 약 7년 동안에 초가의 수가 급격히 줄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977년부터 시작된 취락구조개선사업 이후의 통계가 없어 그 후 어느 정도 빠르게 초가가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지붕개량사업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예다. ?구례군지?에 실린 당시 새마을운동으로 지붕을 개량한 통계를 살펴보면, 1972년에 836채, 73년 1,500채, 74년 1,960채, 75년 3,530채, 76년 1,297채, 77년 550채로 1972~1977년 사이 무려 9,673채의 옛집 지붕을 개량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통계에는 지붕의 종류는 밝혀져 있지 않다.” - 본문 20쪽 중에서 또한 같은 시기, 국가가 발벗고 나선 미신타파정책도 한 몫을 차지한다. 해신당이며 서낭당과 같은 당집이 불타고, 원형의 풍습인 당산제나 풍어제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라고 한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누대에 걸쳐 슬기와 솜씨를 이어온 옛집들은 구시대의 유물로 인식되고 1990대 이후 전국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면서 우리의 옛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