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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_불교미학의 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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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법문’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알리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본성이 미추를 초월하여 있으면 누구든 무엇이든 구원 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구원은 약속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쓸데없이 미와 추의 다툼에 몸을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구원은 구원될 자격을 갖추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완전한 자격을 갖출 수 있을까요. 그래서 부처가 그 자격을 갖추어 인간을 맞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구원이 이미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살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미추를 초월한 불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본연의 성을 떠나서 진실한 미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가르치는 것이 ‘미의 종교’입니다.
--- p. 21 일자무식의 무명의 공인들이 이 세상의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 대다인大茶人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이도 다완井戶茶碗’[조선 다완, 본문 155쪽의 그림 1 참조]이 무엇보다도 좋은 예가 아닐까요. 그것들은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가난한 도공들이었습니다. 그 각각이 천재였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공인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싸구려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일일이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대충 손쉽게 만들었습니다. … 말하자면 미나 추가 고려되지 않은 작품입니다. … 그들은 담담히 보통의 것을 만들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구원되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여기서 ‘평상심’을 설하는 자력문을 저절로 만남을 느낍니다. 타력의 작품인 ‘이도’가 선의 의미[禪意]에 맞는 까닭입니다. 결국은 자타양문自他兩門이 일여一如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 36-37 ‘호추 없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모두 같게 되어 차이가 없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하나가 다른 채로 모두 구원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 ‘귀얄문 다완’[고려 다완, 본문 158쪽의 그림 2 참조]의 예처럼 하나하나 칠하는 방법이 달라서 한 개도 같은 게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칠해도 모두 아름답게 되는 그러한 경지에서의 작업입니다. 거기를 가리켜 ‘호추 없는’ 세계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사람의 상하와 현우賢愚도 기술의 교졸巧拙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대로의 상태에서 곧 미에 연결됩니다. 이러한 미가 ‘불이미’이고 ‘여미如美’입니다. --- p. 82-83 ‘무유호추의 원’은 미의 법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 제4원이 설하는 바는 무상의 미는 미추의 상대를 초월한 것이고 불이에 들면 모든 것이 이러한 구경미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이가 실은 본래면목이기 때문에 그곳에 서면 누구든지 정토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원은 누구에게도 어떤 물건[作]에도 무류無謬의 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생제도의 비원이 여기에 시사되어 있습니다. --- p. 90 미의 정토는 범인이 범인인 채로 구원되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채로, 졸한 자는 졸한 채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채로 모두 소생되는 장소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범인도 어리석은 자도 졸함도 소홀함도 그대로 소생되는 나라가 정토입니다. … 추한 것조차도 뭔가 빛을 받으면 그대로 소생되어 정토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 정토의 빛 앞에서는 주야?미추의 대립이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 p. 133-134 나는 ‘미의 정토’가 모든 것이 미 속에 들어 있는 국토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민기라는 구체적인 물건이 그 생생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민기 이외의 것은 구원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사람, 높은 수준의 물건은 아름다움과 굳게 맺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예가 많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뛰어나지 않은 사람, 빈약한 물건이 더욱더 아름다움과 굳게 맺어지는 그 불가사의함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 p. 137 “미를 구하면 미를 얻지 못한다, 미를 구하지 않는 것이 미이다.[求美則不得美 不求美則美矣]” … ‘기자에몽 이도’[조선 다완, 본문 155쪽의 그림 1 참조]는 결코 미를 추구하여 생긴 다완이 아닙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도공들을 천한 직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난한 도공들은 수준 높은 미의 문제 따위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도’가 아무리 아름다운 대명기大名器라도 그것이 미를 추구한 결과가 아니었던 것은 자명합니다. … ‘이도’에는 그 미의 집착심에 속박된 흔적이 없는데, 미를 구하지 않은 곳에서, 구하지 않은 채로 더없는 아름다움이 생겼음은 위의 선구禪句가 잘 예증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p. 171-172 ‘이도’에는 침묵이 있고 정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적조차 목표로 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필연적인 공덕功德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티끌은 움직이지 않고, 달이 연못 밑바닥을 뚫어도 물은 흔적이 없다.[竹影掃?鹿不動, 月穿潭底水無痕]” 참으로 신품神品으로 칭송해도 좋을 물건을 보면 정말로 이 선시의 운치가 그 아름다움에 감도는 것을 느낍니다. --- p. 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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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중심의 ‘범부성불의 미’ 그리고 절대 자유의 ‘불이의 미’
야나기는 이 책에서 미의 문제가 서양사상을 중심으로 해명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미의 표현과 체험을 가지고 있는 동양인은 동양사상에서 미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동양적 체험에 입각한 동양미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야나기는 불교사상, 특히 굉장한 종교체험에 근거하고 있는 대승불교에서 가장 원숙한 동양미학의 관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보며, 불교적 사색으로 미의 세계를 반성함으로써 서양인이 보지 못했던 수많은 진리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즉 미의 세계는 단지 이지적 사상이나 분석적 지성만으로 접근할 수 없고 미에 대한 동양적 직관이 기초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과 자각에서 불교미학을 구성한다. 그는 이미 동양 전통의 밑바탕에는 불교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불교의 미는 주로 자력自力 불교(스스로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름)에 의해 대표되어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는 일본인들에게서(일본에서 크게 발전한 정토종 계통에서) 타력他力 불교(불?보살의 원력에 의지하여 정토에 이름)의 진리가 미의 영역에 처음으로 적용되었다고 본다. 그는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천재 중심으로 전개된 자력적인 서양미학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무명품無銘品의 미를 평가함으로써 미의 영역을 민중에게로 넓혔고, 여기에 바로 타력적인 동양(불교)의 미 사상의 한 특색이 있다고 본다. 그는 평범한 공인이 평범한 채로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시대의 어떤 장소에서는 만드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되는 불가사의함에 경탄한다. 그는 특히 “개인주의·천재주의의 사고가 오랫동안 문화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 타성에 젖어 “지금까지 민중에게서 볼 수 있는 미에 대한 미학”이 발흥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가까운 장래에 천재 중심의 미 사상에서 민중 중심의 관점으로 옮겨가는 그 과정이 드러날 것”이라고 이 책에서 이미 (1950년대에) 선각자적인 혜안으로 예언을 했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의 말은 20세기 후반에 바로 현실화된다. 그러나 야나기의 이러한 입장은 천재미에 대한 관점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는 불교적으로 말하여 범부凡夫성불의 진리를 새롭게 더 선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승불교의 정토 사상을 기초로 한 이러한 타력미他力美가 발생하는 것을 역사적 필연이라고 보며, 이것을 이미 선미禪美에 있어서 서양과는 다른 정상에 도달한 (기존의) 자력미自力美와 융합시켜, 자력과 타력이 서로 맞물려 있는 자타상즉自他相卽의 미 사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불교미학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본다. 야나기는 또한 불교미학을 ‘불이不二의 미美’를 밝히는 학문으로 본다. 불이의 미란 미추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것을 초월한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미추란 상대적이며 조작적이고, 인간의 분별에 의한 가치판단의 개념에 불과하다. 따라서 불이미不二美란 곧 절대미絶對美, 구경미究竟美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을 만들어도 본래 그대로 아름다움의 세계에 모두 받아들여지며, 각자 모두 존재하는 그대로 구원된다. 이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미의 법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을 설하는 것이 미의 법문이다. 나아가 야나기는 불법에는 모든 것에 통하는 보편적 이법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며, 미의 세계도 그 법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어려운 불교 경전의 구절을 현실적인 물건인 민기(조선 막사발 등)에 적용시켜 해명함으로써 미는 결국 법미法美와 같다고 본다. 지은이(야나기 무네요시)의 말 병중이라서 불충분한 점은 많지만, 반대로 병 때문에 이 한 권의 책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서양인이 당분간 접할 것 같지 않은 미에 얽힌 문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보잘것없지만 서구에 대한 하나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머지않은 날에 이것을 영역하여 널리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누군가 번역을 맡아줄 사람이 나온다면 고맙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덧붙인다면 나는 논의가 추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실례를 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958년 7월 중순 병상에서 적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