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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1부 2부 3부 역자 해설: 저항하는 지식인의 초상 추천의 글 작가 연보 |
Boris Savink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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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방의 책상 앞에 앉아서 지도에 동선을 표시한다. 나는 총독의 생활을 재현해 보려 시도한다. 머릿속으로 나는 대저택의 응접실에서 총독과 함께 손님을 접대한다. 철문 너머에서 함께 정원을 산책한다. 밤이 오면 함께 침실에 몸을 숨긴다. 함께 신에게 기도한다.
--- p.11 그를 생각할 때 나에게는 증오도 원한도 없다. 그러나 동정심도 없다. 나는 그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원한다. 나는 알고 있다 - 그를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테러와 혁명 을 위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 나는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 p.12 나는 내가 왜 테러의 길을 가는지 모르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는지는 안다. 하인리히는 이렇게 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표도르는 아내가 살해당했다. 에르나는 사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한다. 바냐는……. 바냐에 대해서는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두자. --- p.18 우리는 아이들처럼 약하고 믿음이 모자라, 그래서 칼을 들지.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약하고 겁에 질렸기 때문에 칼을 드는 거야. --- p.40 주위 사람에 대한 사랑도 없는데 어떻게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 진흙 속에 피투성이로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거 아나,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거, 사람들에게 자기 죽음을 바치는 건 쉬워. 삶을 바치는 쪽이 더 어렵지. --- p.43 나는 이 돌로 된 도시에서 이방인이고, 어쩌면 세상 전체에서 이방인인지도 모른다. --- p.50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사랑이 없다면?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존중하는 마음도 없다면?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 죄에 대해 말한들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내가 보매 창백한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그 말이 발을 디디는 곳에는 풀이 시들고, 풀이 시드는 곳에는 생명이란 없으며, 이는 즉 법도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 p.73 관목 숲이 어스름 속으로 가라앉고 숲은 무섭게 어두워진다. 표도르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말이 없다. 그의 눈에 악의가 담겨 있다. “전부 폭탄을 먹였으면, 긴말할 것 없이.” --- p.75 그의 맑은 눈에 슬픔이 담겨 있다. 나는 말한다. “바냐, 그럼 ‘살인하지 말라’는?” “없어, 조지. 살인하게.” “자네가 그런 말을 하나?” “그래, 내가 그리 말하네. 살인하게, 다른 사람들이 살인하지 않도록. 살인하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사랑이 세상을 밝히도록.” “그건 신성모독이네, 바냐.” “나도 알아. 그럼 ‘살인하지 말라’는 신성모독 아닌가?” 그는 내게 양손을 내민다. 커다랗고 환한 미소를 짓는다. --- p.80 사랑도 없고 평화도 없고 생명도 없다.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은 왕관이고, 죽음은 가시관이다. --- p.99 나는 그녀를 원하고, 더 나은 그녀, 더 기쁜 그녀, 더 강한 그녀는 있을 수 없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는 아름답고 강하다. --- p.114 어째서 그런 다정함이 슬픔을 낳는가? 어째서 사랑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가? --- p.144 어쩌면 그녀는 오직 사랑만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오직 사랑 속에 그녀의 빛나는 인생이 있고, 사랑을 위해 그녀는 세상에 태어났으며 사랑의 이름으로 무덤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마음속에서 포근한 악의가 일어난다. --- p.154 나는 사막의 돌 같다. 그러나 나의 손에는 날카로운 낫이 있다. --- p.163 어디가 끝인가? 나의 정당한 휴식은 어디 있는가?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심은 복수심으로 살아간다. --- p.168 나는 지상 낙원도 믿지 않고 하늘의 낙원도 믿지 않는다.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자유로운 노예조차 되고 싶지 않다. 나의 모든 삶은 투쟁이다. 나는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의 이름으로 투쟁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그렇게 원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 --- p.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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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과 권총과 펜’으로 요약된 삶
카뮈에게 영감을 준 작가이자 격동의 삶을 살아간 혁명가, 보리스 사빈코프의 상징적 작품 『창백한 말』 “나는 이 돌로 된 도시에서 이방인이고, 어쩌면 세상 전체에서 이방인인지도 모른다.” (본문) 장동건, 이준호, 김상중 주연의 영화 〈아나키스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 제2의 사빈코프가 되고 싶다고 했지?” 사빈코프는 당시 많은 혁명가들의 목표이자 이상이었다. 수많은 권력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절정의 암살 능력과 카뮈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영감을 준 그의 탁월한 글들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사빈코프가 진정 혁명가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위계적 권력에 대한 그치지 않는 투쟁, 민중의 자유를 믿고 그것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삶. 민중의 이름으로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가 점차 권력 그 자체만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사빈코프는 약자의 편에, 민중의 편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보단 계란이 되길 택했고, 그래서 그의 삶은 숱한 고난과 고초로 가득했다. 보리스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은 작가의 생애와 문학적 지향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작품이다. 사회혁명당의 무장투쟁 조직에서 황제 직속 인사 암살을 주도했던 혁명가 사빈코프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테러리스트로서의 경험과 내면적 갈등을 깊이 성찰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하인리히, 표도르, 에르나는 그가 혁명 운동에서 실제로 함께했던 동지들을 모델로 하였으며, 특히 등장인물 이반(바냐)은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그려진다. 이반과 에르나의 인간적인 고뇌, 조지가 겪는 윤리적 모순과 고통은 사빈코프가 현실에서 경험한 심리적 충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렇듯 사빈코프는 숭고한 관념과 폭력의 모순을 도스토옙스키적인 방식으로 대비시켰고, 이러한 입체성이 『창백한 말』을 단순한 정치 소설을 넘어 러시아 문학의 깊이 있는 고전으로 만들었다. 폭력과 구원의 경계에서 길을 잃은 혁명가의 고백 혁명과 암살, 사랑과 죄의식 사이에서 탄생한 걸작, 『창백한 말』 “사랑도 없고 평화도 없고 생명도 없다.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은 왕관이고, 죽음은 가시관이다.“ (본문) 『창백한 말』은 1900년대 초 러시아제국을 배경으로 암살과 혁명이라는 긴박한 사건들 속에 인물들이 얽히며 펼쳐지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주인공 조지와 그를 둘러싼 두 가지 삼각관계(에르나-조지-옐레나, 조지-옐레나-그녀의 남편)는 소설의 긴장감을 높이는 동시에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빠르고 직설적인 문체로 전개되는 암살 계획과 첩보 작전의 디테일은 미스터리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충분히 선사하며, 동시에 인물들이 마주하는 고뇌와 윤리적 질문을 통해 철학적 깊이까지 제공한다. 더불어 요한계시록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종말과 파멸의 어두운 이미지들이 작품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 강렬한 분위기와 높은 문학성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 『창백한 말』은 오늘날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전한다. 현대 사회 역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그리고 윤리와 폭력이라는 상반된 개념의 충돌을 끊임없이 경험하고 있다. 사빈코프가 생생히 묘사한 내적 갈등과 고뇌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독자들이 겪는 도덕적 혼란과 실존적 질문에 직결된다. 특히 이 소설은 ‘정의’를 위한 폭력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내면이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성찰하게 만든다. 빠른 템포의 서사, 치밀한 인물 묘사, 그리고 강렬한 철학적 질문까지 함께 담고 있는 『창백한 말』은 단순히 러시아 혁명기를 다룬 역사소설의 영역을 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각자의 내면을 되돌아보도록 하는 문학적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보리스 사빈코프는 기록하고, 기록한 것을 지키고,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자였다. 삶의 끝까지 그는 저항하는 혁명가로 남았다. 사빈코프는 모든 권력에 저항한 진정한 민중주의자였다.” ― 소설가·번역가 정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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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빈코프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예리한 통찰력,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런 경험과 문장력을 바탕으로, 그는 혁명과 반혁명의 격동기를 가장 생생하게 기록해 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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