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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공포
탈출기 피터와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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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부엌에 피 웅덩이가 있었다. 엄마의 피였다. 그들은 피를 닦지도 않았다. 엄마의 몸은 가져갔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자루에 시체를 담아서 가져간다. 누리끼리하고 두꺼운 자루에. 엄마는 아빠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했지만 아빠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문밖으로 흘러 나가는 연기 너머로 관이 보였다. 관은 열려 있었다. 주현은 그들이 관을 가져가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관이라도 남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분노해야 할까? 관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뭔가가 있긴 했다. 관 안에 있는 것은 재였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재 부스러기. 다 타고 남은 아빠의 몸, 그 일부였다. 이 집으로 이사한 후로 쭉 창문에 붙어 있던 나무판자들이 떼어진 채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얼핏 보면 누군가가 단정하게 정돈한 듯 보였다. 그들은 판자를 박살 내는 대신 조용히 떼어 내 세워 두었다. 주현은 그 여자가 두려웠다. 주현은 일부러 물을 틀고 손을 씻는 척했다. 센서 감지로 켜지는 물은 몇 초 만에 끊겼다. 주현은 다시 센서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물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여자는 여전히 서 있었다. 눈은 멍해 보였지만 무언가를 하려고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주현은 긴장감에 몸이 뻣뻣해졌다. 주현의 머릿속에서 그 여자가 갑자기 다가와 자신을 덮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여자가 입을 커다랗게 벌려 주현의 목덜미를 문다. 주현은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여자의 송곳니가 주현의 목 깊숙이 파고든다. 여자가 주현의 피를 빤다. 주현의 얼굴이 완전히 창백해질 때까지. --- pp.35-36, 「태양 공포」 중에서 그녀는 형사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사는 삼십 대 후반이었고, 여성이었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여성을 신뢰했지만 경찰은 신뢰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자기 말을 믿어 줄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털어놓고 싶었다. 너무나 간절해서, 누구라도 좋으니, 들어 주기만 한다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다. --- pp.66-67, 「탈출기」 중에서 “저기요!” 그녀는 층계참의 사람을 향해 달려 올라갔다. “그거 내 거라고요! 돌려줘요!” 어스름한 노란 불빛이 계단을 밝혔다. 층계참의 사람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엎드려 있었다. 네 발로 기어서 같은 자리를 빠른 속도로 돌고 있었다. 약을 했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내 약인데. 저 새끼가 먹었어. 분노가 치솟았다. 그녀는 계단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질렀다. “야!” 층계참에 엎드린 사람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얼굴이 거꾸로 붙어 있었다. 이마가 있어야 할 자리에 턱이 있었다.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꾸로 뒤집힌 핏발 선 두 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 p.75, 「탈출기」 중에서 - 다벗고빌면용서해줄지도모르지 그녀는 다시 메시지 내용을 캡처하고 신고했다. 모르는 사람이 계속해서 계정을 바꾸어 가며 비슷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메시지와 댓글 기능을 막았다. 계정을 잠갔다. 아예 계정을 탈퇴할까 생각도 해 보았다. 자신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왜 도망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탈퇴는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녀는 훈련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공격당했다. 그녀의 선수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동영상이 돌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의 SNS 계정과 전화번호까지 알아내어 영상에서 캡처한 이미지를 보내며 조롱하고 협박하고 돈을 요구했다. --- pp.81-82, 「탈출기」 중에서 “엄마.” 나는 김숙희 씨의 말을 끊어 내듯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안방 커튼으로 새어 들어온 빛이 만들어 낸 선명하지 않은 그림자의 움직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저, 그냥 얼굴 보러 들른 거 아니에요. 이제 여기 있을 거예요. 엄마 죽을 때까지.” --- pp.116-117, 「피터와 모」 중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해야만 하는 가장 큰 숙제 중의 하나는 작은방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방엔 내가 이 집을 떠난 모든 이유가 어둡게 색염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 방의 문을 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문만 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여기 오기 전까진 알지 못했다. 집에 머무는 이상, 집의 그늘에 젖어 든 이상 그 방의 문을 열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엄마는 오래도록 그리 사는 게 가능했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나에게 할아버지의 방은 언제나 매서운 유혹 그 자체였다. --- p.125, 「피터와 모」 중에서 “볼 것도 없는 방이야.” “볼 게 왜 없어요?” “볼 게 뭐가 있는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부러 더 입을 꾹 닫았다. 그건 내 못된 버릇 중 하나였고, 내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 어깨를 찰싹 때리곤 했다. 가볍지만 따끔한 엄마의 매. 그 매가 남긴 흔적은 내게 사랑의 흉터 같은 거였다. 나은 뒤에도 그 자리를 자꾸만 만져 보게 되는 상흔 같은 것. 갓 재생된 엷은 피부의 단단하지 않은 장벽에 새겨진 간지러움 같은 것. “그 방에 도대체…….” 엄마는 더 이상 나를 때릴 힘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나를 상처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았다. 내게 모진 말을 할 수 있고, 냉담하게 굴 수 있고,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무엇보다 보란 듯이 죽을 수 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사라질 수 있다. “……볼 게 뭐가 있냐고.” --- p.132,「피터와 모」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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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산 「태양 공포」
태양의 경계 지점에 선 주변인의 위태로운 생존기 인간 엄마와 흡혈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낮의 세상에 반쯤 발을 걸치고 살아가던 주현. 태양을 숭배하는 ‘그들’에게 부모가 무참히 살해당하며 주현의 일상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난다. 그들의 추격을 피해 거액의 현금이 든 가방을 챙겨 백화점으로 간 주현은 난생처음 화려한 매장들을 둘러보며 쇼핑을 한다. 잠시 뒤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는 주현을 오래된 건물로 이끌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싣고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를 마주한다. 목돈을 챙긴 뒤 사람을 한 명씩 고르라는 노인의 말에 주현은 본능적으로 그날의 의식을 치르게 되는데……. 「태양 공포」는 감각을 자극하는 서늘한 묘사를 통해 인간과 흡혈귀, 낮과 밤, 두 세계의 경계에서 주현이 겪는 위태로운 정체성의 혼란을 생생하게 체감하게 만든다. 한순간 홀로 남겨진 주인공의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 그 취약한 존재 위로 서서히 깨어나는 흡혈귀로서의 본능적인 공격성을 날카롭게 그려 냈다. 정보라 「탈출기」 부조리한 사회의 덫에 걸린 어느 피해자의 비망록 성폭력과 강제 마약 투약의 덫에 걸린 전직 무술 선수. 그녀는 금단 증상을 이기지 못하고 무언가를 구하려 주소판도 붙어 있지 않은 허름한 건물로 향한다. 그곳에서 물건을 찾다 정신을 잃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차가운 경찰서 조사실. 그녀를 괴롭힌 가해자가 건물에서 시체로 발견되면서 살인 혐의를 받는 피의자로 둔갑한 것이다. 가해자가 남긴 불법 촬영 동영상이 도리어 ‘합의의 증거’로 제출되고, 경찰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노골적으로 경시한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진술을 이어 가지만, 환각과 섬망이 혼재되면서 진실을 전달하기가 어려워지는데……. 「탈출기」는 피해자가 오히려 피의자가 되어 버리는 불합리한 사법 시스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동시에, 잔혹한 부조리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무력하기만 한 여성의 사각지대를 매섭게 조명해 낸다. 특히 현실과 환각을 오가는 서술로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허진희 「피터와 모」 지독한 소외와 어둠이 빚어 낸 관계의 파멸극 입양아 출신의 극작가 남지우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스스로 도망쳐 나왔던 본가로 돌아간다. 엄마가 삶의 빛을 잃어 가는 과정을 곁눈질하며 마음속 어둠을 담은 희곡을 완성해 나간다. 어린 시절, 자식이 없어서 자신을 입양한 부모는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태도가 돌변해 버리고, 유일한 도피처라곤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로 섬망 증세에 시달리며 가족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외할아버지뿐이다. 외할아버지는 ‘피터’와 ‘모’라는 어둠을 어깨에 짊어진 채 점점 잠식당해 가고, 지우는 매일같이 그 방을 드나들며 어둠의 실체를 들추기 시작하는데……. 「피터와 모」는 해묵은 소외감과 차별 속에서 버텨 온 주인공이 내면에 켜켜이 쌓아 온 어둠을 털어내는 과정을 흡인력 있게 담았다. 집 안 곳곳에 잔존하는 과거의 상처를 낱낱이 끌어내며 ‘희곡’을 완성해 가는 여정을 쫓아가다 보면 어둠의 서사가 던지는 짙은 마력에 절로 빠져들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