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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 Kad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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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너머로 가볍게 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그는 요염하게 허리를 흔들며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다가 다시 냉정을 되찾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서류 속에 생식 능력 또는 수태를 암시하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너무 늦기 전에 거기에 가야 한다고 씌어 있었다 … 그리고 호메로스의 정액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었다 … !
그는 미친 듯이 서류를 다시 찾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부분을 발견했다. 그래 여기야! '정액'이라는 단어 대신 '골수(骨髓)'란 단어를 쓰긴 했지만 … 정액이나 골수나 다 같은 말 아냐? 그러자 그때까지의 이름 모를 분노가 어디서부터 치밀어오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불임 혹은 생식 능력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그 말들이 왠지 모두 그의 아내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군수는 이 표현을 쓴 자가 아내를 탐내어 정액을 그녀에게 쏟아부으려 발광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했다. 그녀가 출산하기 위해서는 … 너무 늦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생의 황혼기인 폐경기에 다다르기 전에 …. --- p.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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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 맞아요 .그건 사탄의 도구가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그 도구를 이용해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공공연하게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 꼴이죠. 닥쳐올 재앙을 아무도 예감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나는 그걸 상자라기보다는 죽음의 관이라고 부르고 싶어요.아니 그것만으론 부족해요. 그보다 더 나쁜 물건이죠. 그것이 가져다 줄 재앙에 비하면 죽음은 오히려 행복한건지도 몰라요.
은자 : 나는 그냥 커다란 상자라고 들었는데... 성직자 : 커다란 상자라고요? 천만의 말씀! 그 무시무시한 물건을 마을에 들여 놓느니 차라리 페스트를 퍼뜨리거나 교수대나 단두대를 설치하는게 나을겁니다. 커다란 상자라고요? 선생.그건 지옥에서 온 트렁크입니다. 이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드리죠.... --- p.167-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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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가 형성되고 해체되는 순환과정은 우주의 먼지로부터 다양한 세계가 형성되고 풍화되어 다시 태어나는 순환과정 과도 흡사했다. 서사시는 날이 갈수록 그들에게 비밀스런 힘에 의해 움직이 는 시적인 은하계처럼 보였다. 시인들은 자유와 변화의 욕구, 반항정신을 억누르며 아마도 그 은하계의 중심에서 발산되는 비밀스런 지령에 복종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왜 모든 음유시인들이 그토록 유별나게 보이며, 희미한 미광이 서린 눈길과 인간의 울림이 없는 목소리를 가졌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주를 오래 방황함으로써만 연마될 수 있을 것 같은 그 목소리를 말이다.
--- p.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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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신화의 땅에서 펼쳐지는 인간 희비극의 걸작
비극과 기괴한 웃음의 조화, 우화의 신비에 싸인 놀라운 이야기꾼의 재능을 발휘하며 발칸 반도의 대가로 작가적 지위를 굳힌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H 서류』가 출간되었다. 알바니아 관습법(카눈)의 전통을 소재로 인간 실존의 비극을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로 형상화한『부서진 사월』이후 문학동네에서 두번째로 소개하는『H 서류』는 '2000년 서울국제문학포럼' 참가차 한국을 방문하는 거장 이스마일 카다레의 탁월한 작품세계를 다시 한 번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
『H 서류』는 카다레가 1979년 터키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미국인과의 짧은 대화, 즉 호메로스 서사시의 자취를 찾아 알바니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던 미국인의 얘기에서 영감을 얻어 써내려간 것으로 1980년대 초 <넨토리>지에 발표되었을때 공산정권이던 알바니아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다. 알바니아의 전설을 소재로 다루고 있고, 알바니아에 거류하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든지 감시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사소한 행적, 몸짓, 말 한마디까지 모조리 감시했던 공산정권의 스파이 활동, 전제적 정치 상황의 부조리를 소설에 빗대어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비난의 이유였다. 『H 서류』는 대문자 H, 즉 호메로스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마지막 서사시의 땅, 북부 알바니아의 작은 마을을 찾은 두 아일랜드인 학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마을 사람들의 의심과 오해, 무지가 빚어내는 '우스꽝스런 비극'을 참을수 없는 유쾌한 희극으로 펼쳐보이는 탁월한 풍자 코미디다. 1930년대 중반, 알바니아의 산악지방 N군에 두 명의 젊은 아일랜드인 학자가『일리아스』와『오디세이아』의 저자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서사시의 자취를 연구하기 위해 음유시인들과 구전 서사시의 전통이 살아남아 있는 유럽의 작은 왕국, 알바니아를 방문한다. 두 사람이 머물게 된 곳은 알바니아 산악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 N군. 조용하기만 하던 이 시골 마을은 그 당시로선 놀라운 발명품인 녹음기의 초기 모델을 들고 나타난 수상쩍은 두 외국인 때문에 묘한 혼란에 휩싸인다. 두 외국인을 스파이로 오해한 N군의 군수는 자기 휘하의 스파이들 중 최고 실력자인 뒬 라수팡트를 시켜 그들을 감시하게 한다. 엿듣기에 관한 한 최고의 귀를 자랑하는 첩보원 뒬은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유려하고 시시콜콜한' 보고서를 군수에게 올린다. 보고서 내용보다는 뒬의 글솜씨에 관심이 더 많은 군수는 두 외국인의 체포를 숙고하고, 그 사이 군수의 젊은 아내 데이지가 꿈꾸던 이국 청년과의 환상적인 사랑은 엉뚱하게도 수도에서 파견된 비겁한 스파이의 품으로 귀결된다. 아무런 감정의 떨림이 없는 우스꽝스런 불륜으로. 한편 마을 사람들은 무한대의 시공간 속으로 울려퍼져야 할 서사시의 소리를 억지로 한 곳에 가둬놓는 기계, 녹음기를 '악마의 기계'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수상쩍은 세르비아 수도사의 등장으로 두 외국인은 발칸 반도 민족분쟁(알바니아와 세르비아 간의 민족감정)의 한가운데로 휘말려들게 한다. 두 학자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수수께끼에 한발 한발 다가서지만 사건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복잡한 결말을 향해 치닫고, 소멸의 운명에 이른 서사시의 장엄한 시간과 한갓 정치적 우화극에 갇힌 인간 운명의 비극적 아이러니가 절묘하게 맞물려 전개된다. 카다레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것은 정치적 음모, 오해, 무지, 허영 따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 운명의 비극적 아이러니다. 인간과 역사의 신비와 위엄을 보여줄 서사시가 당대 인간들의 한낱 초라한 사적 욕망인 민족감정에 휘둘려 파괴되는것, 그리하여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려던 수수께끼가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는것, 서사시의 수수께끼를 풀러 떠났던 사람들이 수수께끼 같은 서사시가 되어버리는것 등은 "논리로도 죽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고통스런" 운명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러나『H 서류』에선 이러한 무거운 주제가 흥미롭게 희화화되어 나타난다. 아내가 바람피우는줄도 모르고 엉뚱한 데만 관심을 쏟는 군수와 엿듣기의 달인이자 빼어난 글재주의 소유자인 스파이 뒬 라수팡트의 관계, 두 학자를 스파이라고 믿는 엉뚱한 오해에서 빚어지는 웃지 못 할 사건들, 알바니아 판 보바리 부인을 꿈꾸는 군수부인의 몽상 등은 장난스럽고 절묘한 웃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엔 죽음과 파괴의 그림자가 너울대고 있어 단순히 웃어넘길 수 없는 깊은 희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 소설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탁월한 위인이자 위대한 장님인 호메로스에 대한 경의를 바닥에 깔고 있다. 또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창작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두 학자의 탐색 과정에서 제기되는 의문들은 작가 자신, 스스로의 글쓰기에 대해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와 비극, 알바니아의 신화와 전설, 게르만 민요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등은 이스마일 카다레 작품의 웅숭 깊은 바탕이다. 카다레는 작품 속에 전설과 신화적 요소들을 풍부하게 녹여내면서 속되고 덧없는 운명에 갇힌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인류의 집단적 혼이 살아 숨쉬는 보편적이고도 영원한 세계를 그려낸다. 알바니아 기사들의 이야기에 특히 자주 등장하는 저주받은 산정은『H 서류』의 두 주인공이 호메로스 서사시의 수수께끼를 탐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비한 서사시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교차시키면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시간'에 대한 대가의 근원적인 질문을 내장하고 있다. 절묘한 풍자와 장난기가 번뜩이지만 깊은 재미와 사색의 즐거움을 함께 느낄수 있는『H 서류』는 한구절 한구절 놓칠 수 없는 소설적 묘미와 불가사의한 문학의 내밀한 감동을 전하는 걸작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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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
모든 위대한 작가는 그 시대의 신화를 창조한다. 작가는 당대의 하잘 것 없는 인물과 사건을 언어의 도가니 속에 넣고 제련해서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대한 놀라운 직관과 통찰을 빚어내는 연금술적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고 있는 세계 여러 작가 가운데 이스마일 카다레는 흡사 이러한 명제를 증명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을 통해 유럽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 알바니아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대는 범인(凡人)들의 희비극과 영웅의 분투, 그리고 신의 섭리가 공존하는 신화적 공간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평범하고 진부하기조차 한 산문적 현실이 이 작가의 펜 끝에선 돌연 시적 후광을 쓰고 인류라는 종(種)의 시초와 종말을 알려주는 은밀한 상징으로 변형된다. 이미 우리는 죽은 군대의 장군과 부서진 사월 같은 작품을 통해 비가 추적추적 내리거나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알바니아 산악지대의 음울한 풍경 속을 거닐어본 적이 있다. 아울러 낯설기 이를 데 없는 그곳 풍습과 이질적인 문화, 그리고 피에 피를 물고 계속되는 복수와 몰락의 드라마를 감상한 바 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와 너무나 다르면서도, 이상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우리의 일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고 삶과 죽음의 맨 얼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소개되는 작품 H서류에서 카다레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소설은 녹음기라는 기계가 대중화되기 전, 알바니아 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양 문학의 근원인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의 작가 호메로스를 연구하는 두 명의 미국인 학자가 이 서사시의 발생과 전승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 아직도 음유시인의 전통이 남아 있는 알바니아의 오지(奧地)를 방문한다. 미국 대사관에서 알바니아 왕국의 내무부 장관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산악지방의 군수에게 전달된 두 사람의 방문 소식은 고인 물처럼 닫혀 있는 그곳 지방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거기다 두 사람이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당국의 감시와 그곳 주민의 무지 때문에 다양한 소극이 연이어 벌어지게 된다. 아마도 이점, 시종 어둡고 비극적인 죽은 군대의 장군이나 부서진 사월에서 볼 수 없었던 지독한 유머 덕분에 이 작품은 의외로 경쾌하다. 작가는 전편에 걸쳐 냉혹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인간 속에 숨어 있는 속물 근성과 허위의식을 들추어낸다. 처음엔 단순한 착각에서 시작된 군수의 과잉조치가 편견의 고착화를 거쳐 거의 신경증적 강박에 도달하는 과정은 권력의 자기 희화화를 여실히 보여주며, 답답한 생활에 싫증을 느낀 군수 부인이 꿈꾸는 미국인과의 로맨스는 우스꽝스러운 불륜으로 귀착돼 현실과 환상의 격차에 대한 쓰디쓴 인식을 불러온다. 두 사람을 감시하는 첩보원의 격식을 차린 보고서는 거기 담긴 내용이 엄숙하고 성실하면 할수록 더더욱 웃음을 자아낸다. 그 결과 이 작품은 전체주의 사회의 인간군상에 대한 뛰어난 소묘가 되어주고 있으며 이 작품이 씌어질 당시의 알바니아 공산정권에 대한 알레고리적 비판의 의미를 띠게 된다. 이와 병행해서 작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얽힌 비밀을 풀고자 하는 두 학자의 노력이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의 민족감정의 대립에 의해 덧없이 수포로 돌아가는 삽화를 통해 지난 몇 년간 발칸반도를 뒤덮은 민족분규의 비극을 예견하는 투시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읽는 사람에게 둔중한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대한 탐구와 그것의 불가능성이 새삼 환기하는 인간 조건의 비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과 망각에 대항하여 삶을 기획하지만 그 어느 것도 운명의 장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사시의 비밀은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 하다가 영원히 미궁 저편으로 사라진다. 지상에 남는 것은 침묵, 그리고 점차적인 실명(失明) 상태가 암시하는 죽음일 뿐이다. 이처럼 사라지고 지워지는 망각의 물결을 거슬러 작가는 우리 앞에 잊을 수 없는 현대의 신화를 한편 완성해 놓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