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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린의 시선 에필로그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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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른 살이다. 아니, 어쩌면 서른하나일지도 모른다.
서른이든 서른하나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세상이 규정한 나이는 의미 없이 나열된 숫자일 뿐이다. 나는 열한 살이다. 그때, 나는 성장을 멈췄다. 누군가 내 열한 살의 몸을 스물일곱 번 찔렀다. 5일간의 혼수상태 끝에 나는 그날 밤의 기억와 나의 미래, 엄마를 도둑맞았다. ---「아린의 시선, 9쪽」중에서 “괜찮아요?” 성준이 큰 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어깨로 손을 뻗자 화들짝 놀란 여자가 벌떡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밑동 잘린 나무처럼 쓰러졌다. 성준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넘어가는 여자의 몸을 안았다. 의식을 잃은 듯 보였다. 여자의 몸은 가볍고 차가웠다. 한 사람의 무게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고, 비에 젖은 몸은 얼음 같았다. 여자를 안은 성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린의 시선, 38쪽」중에서 “오 형사님 오시면 이걸 좀 전해주세요.” “……곧 올 텐데.” “그 여자의 방이에요. 그렇게 얘기하면 알 거예요.” 진희가 더 말을 붙일 새도 없이 아린은 사무실을 나갔다. 갑작스러운 아린의 행동에 미처 대꾸도 하지 못한 진희는 멍하니 있다가 손에 든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종이에는 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그곳은 진희도 한눈에 알 만한 건물이었다. ---「아린의 시선, 209쪽」중에서 조금이라도 아린을 도와주고 싶었다. 아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이 되고 싶었다. 물로 씻어낼 수 있는 상처라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아린을 닦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상처는 새살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 끔찍한 경험을 겪고도 살아났다. 그리고 20년 동안 제힘으로 살아왔다. 아린은 아직 자기 안에 얼마나 강한 힘이 있는지 느끼지 모하는 것 같았다. ---「아린의 시선, 300쪽」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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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군데의 상처와 남은 기억의 잔해
강탈당한 삶, 부서진 미래, 그럼에도 희망을 뒤쫓는 이야기 “……여자가 살해당했어요. 누군지는 몰라요. 묻힌 곳만 알아요.” 경기도 외곽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사건. 그 참혹한 현장에서 열한 살 소녀 아린은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스물일곱 군데의 상처와 매일 꾸는 악몽을 남긴 채, 사건은 아린 안에 철저히 봉인된다. 몸에 난 흉터도 기억도, 조금씩 흐려질 무렵, 의붓동생 재하가 찾아온다.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재하, 그 아이는 아린에게 사건의 범인을 기억해내라는 요구를 해온다. 범인은 아린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며, 기억해낸다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엄마의 연락처를 전달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재하의 방문을 기점으로 아린은 몸이 조각 난 여자의 꿈을 꾼다. 한편, 오성식 형사는 경찰서 앞에 위태롭게 선 아린을 발견하고, 예기치 못한 소나기와 함께 쓰러진 아린을 안으로 옮긴다. 깨어난 아린은 죽은 여자가 묻힌 곳을 안다며 오 형사에게 그 위치를 일러주고, 두학산을 헤매던 오 형사는 정말로 암매장된 여성의 시신을 발견한다. 아린의 꿈을 통해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된 두학산 살인사건.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수사진이 골몰하는 가운데, 아린이 또 다른 단서를 들고 찾아온다. 적절한 때에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는 아린, 과연 두학산 살인사건과 무관한 것일까? 한국 미스터리 스릴러 계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자 ‘추리 여왕’ 서미애의 또 다른 문제작 “여길 떠나면 다시는 책상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아린의 시선』은 서미애 작가의 전작들과도, 이후의 작품들과도 다른 독특한 색을 띠는 작품이다. 일단 냉혹한 연쇄 살인범이나 시스템의 희생자로 그려지곤 하는 사이코패스가 이 작품엔 등장하지 않는다. 뚜렷한 악인을 내세우지 않은 이 이야기에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요소는 사건의 피해자인 아린이 꾼 꿈이다. 주로 사건의 실마리로 활용되는 이 꿈은, 주인공인 아린의 심리 상태와도 연관된다. 그렇기에 꿈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심리 스릴러’의 명수인 작가 서미애의 장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서미애 작가는 주인공 ‘아린’의 캐릭터를 실제 FBI 수사에 도움을 준 ‘심령 수사관’ 아일린 개렛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며, 기존 심리 스릴러의 형식을 탈피한 이 작품에 큰 애정을 보였다. 이 작품이 서미애의 소설 세계에서 유독 다른 빛을 뿜는 이유는 집필 당시 작가의 심리 상태에서도 기인한다. 자신이 가장 잘한다고 믿었던 글쓰기가 단순한 밥벌이로 전락했을 때의 고통, 그 아픔을 달래주고 다시 책상 앞으로 붙들어준 작품이 바로 『아린의 시선』이다. 온몸에 남은 칼자국과 평생을 시달린 트라우마에도 아린이 끝내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오랜 방황을 끝내고 희망으로 나아가려는 작가의 결심이 작품에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둡고 무겁게 내려앉은 사건들의 틈 사이에서 작게 반짝이던 인간을 향한 애정, 서미애를 ‘추리 여왕’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그 특별한 반짝임의 시작이, 반환점이자 또다른 문제작인 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국 사회의 욕망을 정면에서 비추는 장르, K-미스터리의 거장 서미애가 밟아온 30년간의 궤적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대한 선명하고 확실한 응답.” - 박인성(문학평론가) ‘한국 미스터리의 역사가 아닌 현재’라는 박인성 평론가의 말처럼, 서미애 작가는 데뷔 30년을 넘긴 지금도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2010년대는 일본 미스터리가 주류로 올라서며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시기다. 게다가 판타지나 로맨스 같은 다른 장르에 비해 한국의 미스터리 스릴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던 때. 불모지와도 같던 국내 미스터리 시장에 작가는 『잘 자요, 엄마』를 내놓았고, 국내는 물론 해외 독자들까지도 사로잡는다. 충격적인 반전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결말, 한국 사회의 병폐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미스터리 스릴러가 일으킨 파급력은 상당했다. 전 세계 18개국에 수출되며 K-미스터리의 저력을 알린 것이다. 이후 발표한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과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 모두 국내외 독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작가는 독보적인 한국 미스터리의 대가로 올라섰다. 어느덧 데뷔 30주년, 서미애 작가의 전작을 깊게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여럿 있었지만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었다. 이번에 출간된 ‘서미애 컬렉션’은 날선 에너지로 가득한 초기작과 사회 문제에 깊이 천착한 후기작을 모두 묶어냈다.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마음가짐 아래, 꾸준한 장르적 확장과 자기 갱신을 병행하며 이어온 서미애의 소설 세계를, 이번 컬렉션을 통해 새롭게 접해보시길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