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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감사의 말 들어가는 말 무엇이 문제인가? 지식, 진리, 실재에 관한 실용주의적 견해 현실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과학적 실재론 이것은 어떤 책인가? 책의 구조에 관하여 1장 능동적 앎 1.1 개관 1.2 인식 행위자 1.3 인식 활동과 실천 시스템 1.4 작업적 정합성 1.5 목표 지향적 조정으로서의 탐구 1.6 실용주의와 능동적 앎 2장 대응 2.1 개관 2.2 대응실재론: 형이상학과 의미론 사이에서 2.3 지칭이 대응실재론을 구원할 수 있을까? 2.4 과학에 대한 신앙 2.5 실제 재현들 3장 실재 3.1 개관 3.2 정신에 의한 틀짓기가 작동하는 방식 3.3 실재성을 성취하기 3.4 존재론적 다원주의 3.5 조립하기 4장 진리 4.1 개관 4.2 진리의 다양한 유형들 4.3 경험적 진리와 작업적 정합성 4.4 질로서의 진리성 4.5 다원성과 비정합성 4.6 실용주의자들을 복권시키기 5장 실재론 5.1 개관 5.2 실용주의와 실재주의 5.3 내재적 실재론과 관점적 실재론 5.4 다원주의와 실재론 5.5 인식 과정의 반복을 다시 논함 5.6 진보와 과학적 실재론 논쟁 맺음말 인본주의적 지식관 앞으로 열린 길 철학을 다시 삶으로 데려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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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립된 과학 지식에 맞선 도전에 직면하면,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과학에 관심이 있는 시민은 권위주의적인, 심지어 전제주의적인 충동에 굴복하면서, 그런 태도에 흔히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즉, 과학은 우리에게 실재에 관한 진리를(혹은 최소한 그 진리의 근삿값을) 제공하며 과학의 판결에 반발하는 사람은 (악의적인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쏘아붙인다. 많은 이들은 현대 과학이 기본적으로 옳은 답들을, 혹은 적어도 옳은 답들을 얻기 위한 옳은 방법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만한다. 많은 ‘실재론자’는 이 생각을 신앙의 조목처럼 내세운다. 우리는 관찰 불가능한 실재의 면모들에 직접 접근할 수 없으며, 과학의 역사적 실적은 우주의 가장 기초적인 면모들에 관한 과학자들의 견해마저도 심하게 요동해왔음을 보여주는데도 말이다.
---p.20 종교적 근본주의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를 이기는 길이 아니다. 가장 성숙한 사회들이 정치에서 반대파의 입을 대뜸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극복하는 법을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학에서 그런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 억압을 정당화하는 권위를 과학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p.22 어떤 단어가 부정적 함의들로 너무 심하게 오염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 단어의 오용과 남용을 교정하려 부질없이 애쓰는 대신에 간단히 그 단어를 버려야 할 경우가 때때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실용주의’라는 용어는 버려지지 않고 변호되고 향상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 ‘진리’, ‘실재’도 마찬가지다. ---pp.26-27 실용주의자가 푸가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근거는 무수한 사람이 바흐의 걸작들을 들으며 느껴온 감동이다. 그런 음악 작품이 군대의 발맞춘 행진에 도움이 되는 등의 ‘실용적’ 효과를 낼 수 있는지는 실용주의자의 음악 평가와 아무 상관이 없다. 실용주의 정신이 권고하는 바는 철학이 삶에서의 다양한 실천으로부터 동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양한 실천은 과학을 포함한다. 철학자는 색다르고 특이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지만 또한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들에 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안락의자 철학(armchair philosophy)’이 실제로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안락의자는 우리가 가끔 불가피하게 물러나 잠시 머무는 장소로, 우리가 실제 삶의 문제들을 차분하고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장소로 머물러야 한다. ---p.28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선언들(‘외부세상은 실재한다!’)은 대다수 현장 과학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할 만하다(‘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난 자연에 관해서 뭔가 배우느라 바빠’). 내가 주창하는 실재론은 과학의 진보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입장이므로 ‘실재론’보다는 ‘실재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지식이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 영역이 무엇이건 간에 실재주의는 거기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실재주의는 우리가 믿는 바, 혹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바에 만족하며 머무르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런 실재주의 정신은 사회적 진보 및 정치적 진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p.32 나는 이 책에서 제시할 생각들을 열렬히 옹호하지만, 존중으로 충만한 비난, 평화로운 선동, 생산적인 불만의 달인이 되려 애쓴다. 나는 굳이 이성과 합리성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싶다. 실재에 관한 웅장한 주장 없이 현실적이고 싶으며, 테이블을 내리쳐가며 진리를 논함 없이 정직하며 진실하고 싶다. ---pp.34-35 “내가 직접 확인해볼게”라고 말하기가 과학적 태도의 출발점이며, 이 말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선언이다. 이것은 개인들이 사회를 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을 간과하는 낡은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회적 기반을 딛고 자율적 개인이 일어서는 것을 북돋고 경축하는, 행동하는 개인주의다. ---p.74 어떤 2인칭 상호작용이든지 그 바탕에는 다음과 같은 심층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즉, 너는 개인이며, 믿음과 행동의 정합성을 의미하는 기본적 합리성을 지녔고, 소통에 필요한 기본적 인지 역량을 지녔으며, 또한 적어도 최소한의 선한 의지와 우호성을 지녔다는 전제가 말이다. 개인주의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의 통상적인 충돌을 논할 때 우리는 흔히 2인칭 상호작용을 시야에서 놓친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하는 평범한 언어 행동의 아주 많은 부분은 2인칭 유형, 곧 명령, 문답, 주장과 (비)동의, 논증, 설명 등이다. 많은 핵심적인 인식 활동 역시 본질적으로 2인칭 유형이다. 최소한 서술하기나 설명하기가 향하는 상상된 ‘너’가 없으면, 서술이나 설명은 무의미하다. ---pp.74-75 대다수 사람의 실재론적 직관에 따르면, ‘저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이 확실히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심지어 생각하는지 여부와도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이러저러하다. 나는 이 직관을 선형상화의 오류(fallacy of pre-figuration)라고 부르고자 한다. 선형상화의 오류란 실재가 모든 개념화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잘 정의된 부분들과 속성들을 지녔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앎의 대상들이 정신에 의해 틀지어져 있지 않으며 그럼에도 우리 담론의 대상들일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후자들은 반드시 정신에 의해 틀지어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pp.150-151 동굴 은유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그 은유를 더 겸손하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변형하자고 제안하겠다. 내가 상상하는 상황은 이러하다. 우리가 플라톤의 동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단지 또 다른 동굴로 들어가는 것일 따름이다. 우리가 들어가는 새 동굴은 더 널찍하거나 어떤 다른 면에서 더 나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옛 동굴에 남아 있는 이들을 연민할 수 있지만, 오직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우리는 절대로 모든 동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며, 최후의 탈출을 이뤄내 햇빛이 환히 드리운 궁극의 실재에 도달하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동굴 안으로, 이어서 또 다른 동굴 안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바깥으로 내내 동굴들이 있다’(‘아래로 내내 거북들이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무한 층의 동굴 시스템 안에서 영원히 떠돌아야 하는 운명일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있는 동굴 바깥의 동굴은 이미 만들어진 상태로 우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안쪽 동굴에서 벗어나기를 실천하면서 바깥쪽 동굴을 낳는다. 우리는 이 동굴을 둘러싼 또 다른 동굴을 창조하지 않으면서 이 동굴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동굴을 만드는 마이더스 왕이다. 우리가 가는 모든 장소는 동굴의 내부로 바뀐다. (이쯤 되면 내가 플라톤의 비유를 변형하다 못해 해체한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다.) ---pp.166-167 나는 시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축구 경기의 시작이 무엇인지 알고, 심지어 한 지질시대 전체의 시작이 무엇인지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 전체의 ‘시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당신이라면 그 시작 장면을 영화에서 어떻게 연출하겠는가? 그러니까, 첫 순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심지어 공간과 시간도 없었는데, 그다음에… 아니, 잠깐만. 시간도 없다면, ‘순간’도 없고, ‘그다음에’는 무의미하잖아! 혹시 우리는 창조의 순간 이전에 공간과 시간이 이미 있었고 신도 있었다고 전제하는 〈창세기〉의 대중적인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p.179 중세 유럽의 학자들은, 성경 해석의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성경은 기본적으로 옳다는 전제를 당연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가능성의 영역 바깥의 일이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오늘날에는 대다수 과학자와 과학철학자, 기타 많은 사람이 과학에 대한 신앙을 공유한 듯하다. ---p.203 보편적인 회의주의나 불가지론은 가장 잘 훈련된 사상가들이나 부응할 수 있는 벅찬 요구다. 그러나 나는 그런 훈련이야말로, 즉 우리가 현재 생각할 때 의지하는 도구들에 대한 맹목적 신앙을 피하면서 생각하기야말로 철학의 임무라고 믿는다. ---p.205 DNA는 이중나선이다, 물은 H₂O다, 밀물과 썰물은 달 때문에 생긴다, 석유는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잔재에서 유래한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어? 하지만 거듭 말하건대 이런 식의 논증은 왜 우리가 그런 명제들을 그토록 확신하는가, 그 확신은 정당한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p.206 그리하여 표준적인 과학적 실재론자들은 실천에서 다시금 과학에 대한 신앙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즉, 과학자들이 자기네 이론에서 정말로 성공에 기여한 부분들만 보존하는 법을 아무튼 알아낸 것이 틀림없다고 굳게 믿는 경향이 있다. 신앙을 가지면 삶이 더 쉬워진다. 그러면, 과학 이론에서 보존되는 측면들이 성공을 산출하는 측면들이라고 대뜸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과학의 주요 발전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론적 요소들이 보존된 것은 그것들이 경험적 성공을 산출한다는 점이 증명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편리성, 또는 미적 취향, 단순한 습관, 집단적 사고 때문인 경우가 많음을 알게 된다. ---pp.211-212 지구를 벗어나 우리가 깨닫는 바는, 우주에는 ‘가장 높은 장소’ 따위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여로의 어딘가에서 ‘높은 장소’라는 관념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라는 관념으로 바뀐다. ‘가장 높은 장소’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애석하게도 몹시 좁은 시각이라는 점이, 그 생각 자체가 지구 거주자의 편협함이 낳은 산물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우리 자신이 선 자리에서 사물들을 보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자. 그 자리가 현재 우리가 갇혀 있는 동굴이건, 자랑스럽게 발 디딘 봉우리건 간에 말이다. 모순적인 ‘어디도 아닌 곳에서의 관점(view-from-nowhere)’을 추구하는 것은 부질없다.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여, 우리가 우리의 관점에서 보는 그림을 ‘실재’로 간주하자. ---pp.230-231 확실히 단언하는데, 예컨대 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그 나무는 실제로 쓰러진다. 여기에서 반사실적인 것들(counterfactuals)과 양상들(modalities)을 둘러싼 불필요하게 박식한 토론에 빠져드는 것은 피하기로 하자. ‘그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더라도, 그 나무는 당연히 쓰러졌어’라고 사람들이 말할 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누구라도 현장에 있었다면 그 소리를 들었을 터라는 것, 그 나무가 쓰러지는 자리에 운 나쁘게 누구라도 있었다면 그 나무에 깔렸을 터라는 것, 우리가 지금 거기에 가면 그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등이다. ---pp.241-242 만약에 내가 ‘외부세상은 실재할까?’ 같은 질문에 별생각 없이 손을 댄다면, 아마도 나는 그 토끼 굴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만물을 포괄하는 실재를 생각하지 않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실재는 구체적인 작업적 효용이 없는, 너무나 오만한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p.251 우리가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는데 그 개념이 정합적 활동들을 지원할 수 있음이 밝혀지면, 우리는 새로운 실재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기존 실재에 의존하여 새로운 정합적 활동들을 한다면, 우리는 그 실재를 예전보다 더 많이 실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재성은 잘 설계된 개념들과 활동들을 통해 성취되는 결실이다. 하지만 삶에서 무릇 성취가 그러하듯이, 실재성을 성취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성공할지 여부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통제 바깥에 놓여 있다. ---p.277 하지만 어쩌면 우리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레고 놀이와 유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접시를 깨부순 다음에 접착제로 이어붙일 수 있고, 벽돌들로 집을 지을 수 있으며, 시계를 분해한 다음에 다시 조립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상적인 합성 실천들은 실은 레고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상 속의 평범한 물건들은 일반적으로 서로 달라붙지 않는다. 벽돌로 집을 지으려면 회반죽이 필요하며, 물체들을 접착하려면 접착제가 필요하다. 접착제의 작동 방식은 레고와 영 딴판이다(그리고 실은 대단히 신비롭다!). 따라서 우리가 물체들을 접착할 때(또는 연결핀을 박아 결합할 때, 죔쇠로 조여 결합할 때, 끈으로 묶어 결합할 때) 하는 경험은, 우리가 레고주의적 직관들을 품은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p.311 당신이 전문 철학자가 아니라면, 심지어 전문 철학자라 하더라도, 대체 왜 진리에 관한 이론을 고민거리로 삼아야 할까? 현실적인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판별하는 방법을 자신이 아주 잘 안다고, 철학 논문 따위는 필요치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는 그렇게 간단명료한 사안이 아니며, 이 사안과 관련하여 당신이 느낄지도 모르는 자기만족은 이 디스토피아적인 21세기 벽두에 이미 사라졌어야 마땅하다. 지금 지구 곳곳의 많은 사회는 진리를 둘러싼 매우 기초적인 몇몇 문제에 관하여 합의에 도달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우리 모두가 사실에 관해서 합의할 수 있고 의견과 가치에 관해서 정중히 토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은 상대가 제시하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p.316 우리의 지적인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진리 개념을 정말로 그렇게 무력화해야 할까? 이는 어떤 이가 예외 없고 완벽하게 좋지 않으면 ‘그이는 좋은 사람이야’ 같은 말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이는 ‘근사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거나 ‘좋은 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이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말의 상식적인 뜻을 고수하는 편이 더 낫다. ---p.330 현재 우리가 믿는 최첨단 이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론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곧장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한다면, 현재 우리가 보유한 최선의 이론들도 훗날 거짓으로 밝혀질 가능성이나 심지어 개연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진리’는 기본적으로 사용 불가능한 말이 되어버린다. 과학사에 기초한 비관적 귀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하게 사리에 맞는 길은, 모든 좋은 이론은 진리이며 그 이론의 고유한 범위 안에서 진리로 남는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pp.360-361 나는 많은 사람이 신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많은 정합적 활동을 수행한다는 점을 인정하며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는 그런 만큼 진리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작 유신론자들은 이처럼 단서가 붙은 진리성을 거부할 성싶다. 아냐, 신이 존재한다면 절대적으로 존재해! 그렇다면 살면서 수행하는 어떤 활동이든지 신의 존재에 의존함으로써 정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관건인 셈이고,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만일 천국이라고 불리는 높은 곳에 살면서 모든 이의 기도를 경청하는, 수염을 기른 백인 남성이 우리가 말하는 신이라면, 나의 대답은 확실히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설령 더 합리적으로, 전능하며 더없이 자비롭지만 웬일인지 인간의 삶에서 온갖 악이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는 궁극의 존재가 신이라 하더라도, 나의 대답은 마찬가지다. ---pp.388-389 ‘실재’라는 용어와 ‘진리’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용어들을 아예 제쳐두는 것이 아니라 실용주의적인 방식으로 재개념화할 것을 제안한다. 이 용어들을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강력한 단어들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만일 권력자들이 ‘법과 질서’를 내세우며 잔혹한 짓을 저지를 경우, 뒤로 물러나 법치와 사회 질서를 촉구하기를 멈추는 것은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올바른 대응은 그 명예로운 용어들을 되찾아 그 용어들로 불릴 자격이 있는 행동과 상황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질서라고, 저것은 법치가 아니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pp.396-397 나는 한국어에서 realism의 일반적인 번역어로 쓰이는 ‘실재론’과 구별하여 나의 realism을 ‘실재주의’로 옮기고자 하는데, 실재주의의 핵심은 행동하는 탐구의 이상(activist ideal of inquiry)이다. 바꿔 말해, 실재주의의 핵심은 실재들에 관한 더 나은 지식을 더 많이 추구하는 것을,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의 인식적 실천들을 개선하는 것을 책무로 짊어지기다. 무릇 실재주의의 전체적인 목표는 지식의 범위를 넓히고 질을 향상하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p.403 이론이 사변적인 방향으로, 경험적 검증의 기회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사례가 꽤 있다. 검증 불가능한 가설들을 향한 이행의 동기는 흔히 통일성과 아름다움 같은 형이상학적 요구사항들이다. 이런 이행들이 지속적인 전통을 이뤄, 고대의 4원소 이론에서부터 무게 없는 유체들에 관한 18세기의 이론을 거쳐 오늘날의 초끈이론들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의 역사를 관통한다. ---p.407 진보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거의 동어반복이지만(더 좋게 만들기가 좋은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비非진보주의적이면서 소중한 몇몇 이상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예컨대 질서와 안정에 대한 보수적 갈망, 불교가 조언하는 수용과 단념이 그런 이상이다. 심지어 지식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이미 품위 있는 삶을 떠받치기에 충분할 만큼 많이 알며 추가적인 배움은 문제만 일으킬 개연성이 높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만하다. 이것이 옳은 태도인지는 구체적인 사례에 기초하여 판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나는 인류가 추가적인 지식을 싸잡아 거부해야 할 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p.409 과학이 계속 진보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는 과학이 어떻게 진보를 이뤄내는지, 또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과학의 진보에 관한 논의를 기피하는 세련된 사상가 중 다수가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진보와 정치적 진보를 거침없이 열렬히 옹호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런 양면적 태도는 물론 논리적 모순이 아니지만 확실히 불만스러운 구석이 있다. ‘진보’라는 개념이 과학의 영역에서조차도 논의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설득력이 없다면, 윤리학이나 정치학의 영역에서 확고한 진보의 개념을 거론할 수 있다고 어떻게 전제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과학은 사회적 진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여전히 하고 있으며 해야 한다. 그 역할은 지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차원 모두에서 수행된다. ---p.410 이처럼 ‘과학적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충분히 내실 있는 단 하나의 대답은 없을 것이다. 과학적 진보는 미리 내려진 지시를 준수하는 협소한 진보부터 제약이 전혀 없는 진보까지 유형이 다양하다. 다양한 진보의 유형을 하나의 지표 아래 뭉뚱그리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는 좋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유의미한 진보의 유형들을 모두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일반적인 진보 개념이 빈곤해지거나 편협해지지 않는 것이다. ---p.413 그리하여 떠오르는 탐구자의 이미지는 겸손하게 풍요로움을 육성하는 자의 이미지다. 행동하는 실재주의는 점점 더 늘어나는 삶 속의 실재들에 관하여 계속 배우는 것을 책무로 삼는 태도다. 실재들에 관한 배움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새 개념들을 발명해야 하며, 또한 서로 별개이거나 겹치는 다양한 영역에서 정합적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옛 개념들을 모두 보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더 많은 실재들에 관하여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p.415 탐구가 제약 없이 진행되도록 놔두면, 모든 탐구자가 똑같이 최대한 성공적인 방식으로 배우려 애쓰더라도, 탐구의 결과들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발산하는 듯하다. 우리는 모두 지상에서 지식을 ‘위로’ 쌓아갈 수 있지만, 모든 ‘위로’가 동일한 방향인 것은 아니다! 우루과이에서 ‘위로’ 가는 것과 한국에서 ‘위로’ 가는 것은 둘 다 상승이라는 의미에서 진보지만 우주에서 보면 방향이 정반대다. 단지 우리가 어떤 발전 방향이 옳은지 모른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유일무이하게 옳은 방향이나 최선인 방향 따위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p.455 목표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복적 과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목표를 성취하려고 시도해보지 않으면 그 목표를 수긍할 만하게 추구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정은 지식의 정당화를 위한 의심할 수 없는 토대는 없다는 점과 맥이 통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단 성취 가능하고 바람직해 보이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활동들을 고안하려 애써야 하고, 그 활동들의 결과를 길잡이로 삼아 다음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목표를 포기하는 것도 그 자체로 진보일까? 성취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목표의 포기도 그 자체로 진보일 수 있다. 또한 수긍할 만하지 않은 목표를 처리하는 방식이 오로지 그 목표를 아예 포기하는 것뿐이냐 하면, 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에 탐구의 결과는 목표를 더 수긍할 만하고 생산적으로 되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목표를 버리는 것이 향후 발전을 위한 긍정적 토대가 될 수 있다. ---p.472 우리가 보유한 최선의 과학 이론들은 근사적인 진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통상적인 물타기 행마를 생각해보자. 진리 아니면 거짓이라는 양자택일적 판단에서 멀어지려는 욕망은 나도 충분히 공유한 바지만, 우리의 과학 이론들이 대응-진리를 근사적으로 성취한다는 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표준적인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대응-진리는 작업적 의미가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2장 참조). 논점을 명확히 하자.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법칙은 지구 표면 근처에서 낙하하는 물체에 관한 문제의 완전한 뉴튼적 해의 근삿값이라는 사정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정은 갈릴레오나 뉴튼이 궁극적 진리의 근삿값을 우리에게 제공하는지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p.479 나는 나의 생각이, 철학이 기타 학문 분야들 및 삶에서의 실천들과 관계 맺는 것을 촉진하기를 바란다. 더 비판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나의 생각이, 삶에서의 실천들과 연결되지 않은 개념들에 기초한 철학적 논쟁을 맥 빠지게 만들고, 철학자들의 에너지와 재능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더 단호하게 이끌기를 바란다. ---p.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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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도록 전복적인 비전, 경이로운 역작!”
『온도계의 철학』 『물은 H2O인가?』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가 과학철학의 최전선에서 되살린 실용주의 정신 “과학은 실재에 관한 진리를 말하는가?” 과학 숭배를 버리고 실천 속에서 다시 세우는 지식, 진리, 실재 가장 실용적이고 대담한 실재론, ‘행동하는 실재주의’로의 초대 세계적인 과학철학자 장하석 교수가 처음 쓴 본격적인 철학서. 과학이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저 바깥’의 실재에 관한 궁극적 진리를 밝혀낸다는 ‘과학적 실재론’은 오늘날 과학의 표준으로 자리잡은 견고한 믿음이다. 하지만 장하석 교수는 신간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을 통해 이러한 통념이 과학자들이 실제로 하는 작업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비현실적인 이상일 뿐만 아니라, 과학을 교조적으로 만들어 실제 과학의 진보에 오히려 해를 끼친다고 지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을 ‘신성한 진리’의 집합으로 숭배하는 권위주의적 태도를 거부한다. 과학은 비판으로부터 보호받는 교리가 아니라, 끊임없는 탐구와 논쟁이 이어지는 역동적인 인간 활동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난 40년간 공부하고 가르치며 품어온 의문과 고민을 발전시켜 집대성한 이 책은 과학적 실재론의 대안으로 ‘행동하는 실재주의(Activist Realism)’를 주창한다. 실용주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은 저자는 과학을 포함한 경험적 영역에서 지식, 진리, 실재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구축한다. ‘지식’은 단순히 명제적 정보의 소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할 줄 아는 능력’인 ‘능동적 앎’이 되고, ‘실재’는 인간의 정신과 무관한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정합적인 활동 속에서 성공적으로 채용되고 의지할 수 있는 실천적 대상이 된다. ‘진리’ 역시 실재와의 대응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이 목표를 향해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게 돕는 ‘작업적 정합성’의 실천적 속성으로 규정된다. 이 대담한 실재론 개조 프로젝트에서는 과학사의 구체적 장면들이 철학적 논증의 핵심 증거로 소환된다. 온도계의 보정 과정이나 초기 전기학 실험처럼 실제 과학이 작동하는 세밀한 지점들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실용주의적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추출해내는 서술 방식은 독자에게 단순한 주장을 넘어선 압도적인 지적 설득력을 선사한다. 과학사와 철학적 통찰을 넘나들며 저자 특유의 친절한 해설과 치밀한 분석, 그리고 과감한 통찰을 입체적으로 엮어낸 이 책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신뢰하고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하는 모든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지적 이정표가 될 것이다. "과학과 기타 다양한 삶의 실천들에 관하여 숙고할 때 우리는 왜 ‘실재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주요 관심사로 삼아야 할까? 왜냐하면 우리는 상상이 아니라 사실을 존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정된 견해 뒤에 안락하게 숨는 대신에 열린 태도로 경험으로부터 배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경험적인 지식이 우리를 물질적인 세계에서 더 잘 살게 도와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무지한 현 상태를 개선함 없이 체념한 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실재들에 관한 진리들을 배울 수 있다는 낙관론을 품고 살고 싶기 때문이다." (394~395쪽) “신성한 진리란 없다” 비현실적인 이상 때문에 과학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다면, 보다 ‘현실적인 실재론’이 필요하다! “너무나 많은 그릇된 정보, 무지, 선입견, 기만, 불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무엇에 의지해야 신뢰할 만한 사실들과 통찰력 있는 이론, 행동을 위한 지침을 얻을 수 있을까?”(19쪽) 저자는 이 물음에 여전히 “최선의 희망은 과학과 과학적 태도”라고 답한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역설적으로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견고한 믿음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다. 과학 지식을 의문의 여지가 없는 ‘신성한 진리’ 혹은 그 근삿값으로 포장할수록, 실제 과학이 그런 과장된 이미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대중은 과학을 하나의 종교와 같은 수준으로 치부하며 불신에 빠지게 된다. 기후변화 부정론자나 평평한 지구 우주론자들이 자신들의 주장 역시 ‘과학적’이라며 확립된 과학 지식에 도전하는 현실은 이 위기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위기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신의 관점’을 과학의 표준으로 삼은 데서 기인한다고 진단한다. 과학이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환상은 지식 향상을 위해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침을 주지 못하는 “부질없고 해로운 철학적 꿈”이다. 대신 저자는 칼 세이건을 인용하며 “과학이 유일하게 내놓는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진리란 없다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탐구 과정에서 실제로 채택할 수 있는 ‘작업적 이상’이다. 이 책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현실 속에서 보유한 도구로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실재론’의 길을 제시한다. 그런 작업적 이상을 짊어진 실재론은 과학의 진보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입장이므로 저자는 자신의 실재론(realism)을 ‘실재주의’로 명명한다. “이상이 언젠가 성취될 가능성은 물론 희박하지만, 이상이 유용한 기능을 하려면, 이상은 우리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무언가일 필요가 있다. 오류가 전혀 없는 바이러스 검사법을 발명하기, 또는 대도시에서 1년 내내 살인사건이 없도록 만들기는 작업적 이상이다. 비록 우리가 이 이상에 영영 부응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반면에 절대적 진리란 실제로 추구할 수 있는 이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상에 접근하기 위하여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21쪽) “아는 자는 행동하는 자다” 실용주의가 재정의한 ‘능동적 앎’의 세계 이 책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에서 처음 형성된 ‘실용주의’를 현대 과학철학에 본격적으로 도입한다. 실용주의란 지식은 행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고 모든 쟁점 역시 실천에 기반해서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실용’이라는 말이 주는 세속적인 어감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중요한 철학적 전통이다. 실용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아는 자는 행동하는 자”이며, “앎은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서만 유의미하다”.(31쪽) 따라서 지식은 참인 명제나 이론적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특정한 목표를 위해 수행하는 활동이자 무언가를 할 줄 아는 능력인 ‘능동적 앎’으로 재정의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은 앎을 얻고 평가하고 사용하는 행동 프로그램들의 연결망, 즉 ‘실천 시스템’이 된다. 이처럼 지식을 ‘활동’ 중심으로 바라보면 ‘진리’ 개념 또한 실용주의적으로 재구축된다. 어떤 이론이나 진술이 진리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정신과 무관한 실재와 신비롭게 대응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해당 진술에 의존하여 수행하는 우리의 활동이 목표를 향해 조화롭고 사리에 맞게 맞물려 돌아가게 돕는 ‘작업적 정합성’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현대의 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GPS)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라는 추상적인 이론들과 정지궤도위성, 원자시계와 같은 물질적 기술들을 정교하게 조율하여 ‘위치 파악’이라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해낸다. 이처럼 진리란 우리 삶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내고 실용적인 사리 파악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천적 질(quality)이다. “인간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들은 언어를 말할 줄 알고, 추론할 줄 알며, 거짓말하고, 설명하고, 서로 논쟁하고, 사물들을 세고 분류할 줄 안다. 우리 대다수는 달리고, 수영하고, 공을 찰 줄 안다. 우리 중 일부는 심지어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제작할 줄 안다. 우리는 (...) 아이를 양육할 줄 알고, 다른 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칠 줄 안다. 왜 이 모든 활동 안에 중요한 앎이 있다는 점을, 단지 그 앎이 명제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부인해야 할까?” (51쪽) ‘노이라트의 배’를 타고 흔들리는 늪지 위에서 지식을 구축하는 법 인간의 앎은 견고한 암반 위가 아니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늪지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실용주의의 또 다른 창시자 찰스 샌더스 퍼스의 통찰처럼, 탐구는 사실의 반석 위에 서 있지 않으며, 우리는 그저 “이 기반이 당분간 탐구를 지탱할 것 같으니 무너지기 전까지는 여기에 머무르겠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먼바다에서 항해하는 채로 배를 재건해야 하는 선원들”이라는 노이라트의 비유는 우리 인식의 근본적인 처지를 관통한다. 이는 앎의 출발점이 언제나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현실적인 정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진보시키는 핵심 동력으로 저자는 ‘인식 과정의 반복’ 개념을 제시한다. 인식 과정의 반복은 과거의 지식을 일단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존중의 원리’에서 시작하여,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탐구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다시 출발점의 결함을 수정하는 데 되먹임으로써 지식을 점진적으로 향상하는 과정이다. 예컨대 온도계는 측정 기준을 다듬는 반복적인 자기 교정 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정교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지식은 의심할 수 없는 토대에서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출발점을 끊임없이 자기 교정하며 구축된다. “그런데 우리에게 확고한 토대가 없다면, 앎은 무엇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까? (당연히 한 가지 대답은 앎은 어떤 것도 기반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 혹은 탐구는 확실히 그러하다는 것이다.) 탐구하면서 착실히 진보하려 애쓸 때 우리는 물려받은 무언가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서 그 무언가를 토대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충분히 운이 좋다면, 우리는 출발점으로 돌아와서 그 배운 바를 사용하여 출발점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401~402쪽) 철학을 다시 삶으로 ‘행동하는 실재주의’와 다원주의적 비전 이 책은 과학을 인간의 지적, 물질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벌이는 ‘인본주의적 사업’으로 간주한다. 과학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탐구와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는 지식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역동적인 활동이다. 실재론 논쟁이 ‘외부세상은 실재할까?’ 같은 공허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붙잡으며 삶의 주류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과학과 같은 경험적인 영역에서 구체적인 상황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신념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행동하는 실재주의’는 세상을 관조하며 지식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구경꾼의 태도를 단호히 거부하며, 실재에 관한 지식을 향상하기 위해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는 실천적 결의를 보여준다. 이러한 실천적 태도는 자연스럽게 다원주의로 귀결된다. 저자가 제안하는 ‘진보’는 단 하나의 정답을 향해 수렴하는 목적론적 과정이 아니라, 다양한 실천 시스템들이 공존하며 우리 삶의 실재들을 확장해가는 다원주의적 여정이기 때문이다. 빛이 상황에 따라 광선들의 집합으로, 파동으로, 입자로 서술되는 것처럼, 하나의 절대적 정답 대신 다양한 실천 시스템이 공존할 때 실재는 더 풍요로워진다. 철학자, 과학자, 학생, 정책 결정자부터 일반 대중까지, 이 책이 제시하는 지식과 실재의 작업적 이상은 과학과 정치, 윤리가 교차하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지적으로 진보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현실적이고 능동적인 항해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일(work)은 겸손의 미덕을 요구하고, 또한 사회적 협력과 관용을 요구한다. 우리가 겸손한 실용주의적 시각으로 우리 인간이 처한 상황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다원주의가 귀결된다. 지식을 획득하고 개선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는 일은 수많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며 다양한 실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질 것인데, 그 시스템들 각각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입증된, 좋은 지식을 생산할 잠재력을 지녔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각자 선택한 시스템을 발전시키려 애씀으로써 진보를 이뤄낸다. 이것이 삶 전반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485쪽) * 방대한 철학적 논의와 풍부한 과학사의 사례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독자의 관심사와 수준에 따라 선택적 독서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각 장은 핵심 아이디어를 평이하게 설명하는 개관으로 시작한다. 바쁜 독자나 입문자라면 이 개관들만 연결해 읽어도 새로운 실용주의의 밑그림을 충분히 그릴 수 있다. 반면 전문적인 학술 논의나 기술적인 세부 사항이 담긴 절은 본문과 다른 서체로 표기되어 있다. 깊이 있는 탐구를 원하는 독자는 이 부분을 통해 철학적 논거를 치밀하게 따라갈 수 있다. 이러한 입체적 구조는 철학의 문턱을 낮추면서도 학술적 엄밀함을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배려이며, 철학을 현실적인 도구로 만들고자 하는 이 책의 목적과도 맞닿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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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담하고 폭넓은 책에서, 장하석은 과학적 실천에 대한 깊이 뿌리내린 사고방식에 도전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관점들을 통찰하여, 그것이 어떻게 자신만의 독특한 실용주의 과학철학에 유익하게 결합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경이로운 역작이다. - 필립 키처 (컬럼비아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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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가 과학철학의 비전과 관련하여 여전히 가치 있는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음을 과학철학자들에게 새삼 환기시키는 책이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부터 분리된 형태를 포함한 진리대응론의 가치, 실용주의적 진리론, 적절한 형태의 실재론, 그리고 일원론과 다원론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이 책은 매우 환영할 만하고 신선한 기여를 하고 있다. - 폴 호이닝엔-휘네 (하노버 라이프니츠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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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가 과학철학의 비전과 관련하여 여전히 가치 있는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음을 과학철학자들에게 새삼 환기시키는 책이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부터 분리된 형태를 포함한 진리대응론의 가치, 실용주의적 진리론, 적절한 형태의 실재론, 그리고 일원론과 다원론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이 책은 매우 환영할 만하고 신선한 기여를 하고 있다. - K. 브래드 레이 (오르후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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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미묘함과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은 과학철학의 어려운 과제이다. 이 책에서 장하석은 그 이상을 성취한다. 지식을 능동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그의 시도는 과학의 인식론적 틀을 재구성하고 개선하는 데 고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마틴 카리에 (빌레펠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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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놀랍도록 전복적인 비전은 이미 전통적인 철학 체계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을 매우 짜증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그들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책은 다양하고 실질적으로 다원적인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러한 공동체는 과학적 태도를 추구하고 그것이 인류 복지에 미치는 영향에 기여하는 데 있어 공동의 인본주의적 기반을 주요 부분이자 약속으로 여긴다. 영감을 찾는 사람들에게 저자의 새로운 실용주의 철학이 보여주는 환대의 풍경은 분명히 새로운 항해를 위한 새 바람이 되어줄 것이다. - 대니얼 브룩스 (부퍼탈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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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이 이 책에서 제시한 포괄적인 비전은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과학적 실천에 대한 그의 연구를 보완하며, 과학철학에서 적절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실재론에 대한 방대한 문헌에서 핵심적인 주장만을 뽑아낸 매우 인상적인 성과이다. - 데이비드 스텀프 (샌프란시스코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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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은 이 책에서 자신의 이전 저작들에서 사용된 개념들과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결합하여 독창적인 과학철학을 전개한다. 이를 통해 그는 과학의 진보를 더 잘 설명해낼 뿐 아니라, 회의론자나 비판자들에 맞서 과학을 옹호할 수 있는 강력한 접근법을 제시한다. 실천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과학과 그 실천에 대한 평가를 해당 실천의 목표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이 책은 대단히 실용주의적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지식과 실재, 진리에 대한 기존의 표준적인 이해를 재구성하는 일종의 개념 공학 프로젝트다. - 샤론 크라스노 (노르코칼리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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