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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해 겨울, 봉원사에서
2. 그대, 꽃불 같은 사람아 3. 은행나무들에게 4. 가혹한 옛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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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그는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
무한질주의 바람이고자 했다 아니, 광야를 퍼지르고 앉은 한무더기 풀잎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론 그는 발길에 채일망정 땅거죽을 포옹하는 덧없는 시간 속의 돌멩이이고 싶었다 머나먼 슬픔의 구릉에 처박혀 옴쭉달싹 못하는 자가 아니라, 상처뿐인 인간들 가슴팍 속에 조용히 내리꽂히는 황금빛 울음이고 싶었다 누가 와서 여기 빛나는 생살의 그리움을 보아다오 가을날 저녁, 남부여대 어디론가 떠나가는 식구들을 치어다보다가, 피 어린 눈물 몇 장씩 떨구며 스스로의 육신에서 일탈한 안쓰러움과 끝끝내 자기 몸뚱이와 하나 되지 못하고 켜켜한 눈빛으로 달아오른 몸짓과 차마 기다림뿐인 마음에 적막한 세상을 손짓하는 한 떨기 목소리를 껴안아다오 세상을 향해 두 팔 벌린 그대와 세상을 향해 두 팔 오므린 내가 지금 마주한, 허망한 날들의 불협화음이여 아무도 살지 않는 길섶 모퉁이에서 다만 한 마리 짐승으로 늙어가지 않기 위하여 외마디 삿줄을 타고 서성거리고 있는 너 세상을 향해 직립으로 곧추선 자의 슬픔을 누가 진정 단 한 번만이라도 기억할 수 있을까. --- pp.83-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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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살아온 사람이었다면 지나온 저 80년대가 편안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며 그 흔적을 쉽게 지우지 못할 것이다. 그 좋은 사례를 두번째 시집을 엮은 이승철 시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이승철의 시는 80년대가 훌쩍 지나버렸음과 동시에 여전히 8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중성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배신과 좌절이기도 하며, 덧없는 그리움과 기다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이승철의 시가 가치 있는 이유는 여전히 "다만 한 마리 짐승으로 늙어가지 않기 위하여"(「은행나무들에게」) 고민을 늦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과 방황의 흔적은 이승철 특유의 정직한 삶과 시어를 통해 더욱 뜨겁게 다가온다. 모두가 떠난 자리를 홀로 지키더라도 그의 외로움은 시대와 역사와 삶에 바쳐진 숙명의 투쟁이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고귀함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시집은 "오늘 또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홀로 지새우는 것"(「그해 겨울, 봉원사에서」)이, 그래서 끝내 그 자리를 털고 떠나버리지 않는 것이 "청춘이 나에게 가르쳐준 길"(「청춘의 먼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이 어쩔 수 없이 몸담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실존의 무거움과 존재의 가벼움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시대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386세대나 그 전후 세대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이러한 열정이, 그 희소성과 성실성으로 인해 이십일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욱 소중한 가치가 될 것이다. "우리 시대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자체가 목표인 시대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이승철의 시는 그러한 희망의 원리 중의 하나를 우리에게 암시하기에 족하다."고 한 유성호의 해설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