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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하)
박영호
두레 200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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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 top20 9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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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머리말
2. 축간사
3. 결편(結編)

저자 소개 1

朴永浩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 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 예수”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 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5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4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다석 마지막 강의》 등이 있고,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 《잃어버린 예수》《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깨달음 공부》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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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01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422쪽 | 774g | 148*210*30mm
ISBN13
9788974430290

책 속으로

함석헌이 방학이 되어 서울에 오면 김교신의 집에 묵거나 스승 류영모의 집에 머물렀다. 류영모는 제자 함석헌이 온다면 스스로 집안 청소를 할 만큼 귀한 손님으로 맞았다. 함석헌은 류영모에게 육친의 자녀보다 더 귀한 정신의 아들이었다.

짐승인 제나(自我)의 사람들에게는 피(血)를 잇는 자녀가 소중하지만 하느님 아들인 얼나(靈我)의 사람에게는 얼(靈)을 잇는 제자가 귀중하다. 류영모는 성령으로 거듭난 얼나(靈我)를 주체로 하는 정신인이다. 그러므로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이 아버지가 되어도 좋으나 정신의 아들(제자)을 많이 두는 것이 역시 육신의 아들보다 더 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함석헌은 스승 류영모에게만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다. 동갑 나이의 김교신에게도 경애함을 받았다.「성서조선」의 동인의 한 사람인 송두용(宋斗用)은 "김교신이 왜 그렇게 함석헌을 받드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1934년 동계 성서연구회에서 함석헌의 모습을 류달영은 이렇게 그렸다. "함 선생의 세계역사 연구의 강의가 시작되다. 함 선생의 역사는 독보(獨步)로서 산 역사를 들려 주심은「성조」지에 실리는 한국역사를 통하여 이미 아는 바이다. 오랫동안 사모하던 선생을 처음 뵈오니 기쁜 마음이 가슴에 충만함을 느낀다. 초면이면서도 오랫동안 아침저녁으로 만나던 분같이 여겨짐은 기이하다. 그 빡빡 깎은 머리에 거칠은 수염과 찢어진 눈은 위엄 속에도 인자함이 가득한 선생에게 누구나 다 친숙함을 느꼈다. 평안도의 사투리가 간간이 섞인 세계역사의 서언(緖言)이 약 1시간 반에 걸쳐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류달영, 1934년 12월 29일.「성서조선」73호 1935년 2월호)

예수,석가,공자처럼 몸 생명에서 얼 생명으로 거듭난 이는 몸의 어버이보다 얼의 스승을 더 귀하게 여기며, 몸의 자녀보다 얼의 제자를 더 귀하게 여긴다. 이것이 얼나로 거듭난 사람의 실증이다.

--- pp.128-129

출판사 리뷰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사상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는 온 생애에 걸쳐 진리를 추구하여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이다.

그는 민족교육의 요람인 정주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철학, 불경, 유교, 동양경전, 주역, 성경, 천문, 지리에 통달한 당대의 천재였다.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여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한 것과 YMCA 연경반에서 강의한 것 외의 공적인 활동은 없으며 농사짓기 위해 구기리에 들어가 은둔하며 살았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보다는 함석헌의 스승으로 세상에 더 알려져 있다.

다석은 16세에 기독교에 입신(入信)하였지만 그 후 불교와 노장(老莊), 그리고 공맹(孔孟)사상을 두루 탐구하여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 동안 묻혀 있었던 보화와 같은 다석사상이 다시 드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으며 마하트마 간디처럼 드높은 경지에 이른 한국이 낳은 위대한 정신적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생 동안 진리의 구도자로 살아왔고 또한 일상의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여 몸소 그 본보기를 보여 주었기에 다석의 생애와 사상은 삶의 지침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많은 깨우침과 용기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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