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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기획의 변
ㆍ들어가며 여자, 식모 살다 주인 아씨와 행랑어멈이 싸우다 행랑어멈은 진고개로 떠나고 조선 여인의 일본인 집 식모살이, ‘오모니’ 상경하는 식모들과 “식모 전성기”의 이면 여자, 회사 가다 1990년대, 직장 내 성희롱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다 1980년대, 여자도 회사에 가고 싶었다 가장 여성 친화적인 직장에서도 성차별과 싸워야 했다 연대를 통해 만들어 낸 여성들의 ‘평범한 회사생활’ ‘직장 내 성희롱’ 처벌 명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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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모들이 한국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일제 식민지기였다. 당시 많은 한국 여성들이 식모라는 호칭 외에도 ‘어멈’, ‘안잠자기(안잠재기)’, ‘드난살이’, ‘오모니’, ‘오마니’, ‘가사 사용인’, ‘호내 사용인’, ‘하녀’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사실상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 p.19 1922년 3월…《개벽》에는〈 조선인 생활문제의 연구〉라는 제목의 논설이 실렸다.…필자인 선우전鮮于全은 경성의 가옥 중 7할에 행랑채가 있고 그중 9할에 행랑살이 식구들이 살고 있다며, 경성에만 행랑살이 인구가 4만~5만 명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성의 인구를 모두 합쳐 봐야 30만이 안 되던 시절이니 엄청난 수였다. --- p.23 신문기자에게 “월세방 얻을 돈 조금만 있었으면 이런 설움을 다 참고 살겠습니까. 돈이 없으니 참는 거지요”라고 토로하기도 했던 행랑어멈들은 이미 주인집과의 관계를 상전과 노비 관계가 아니라 경제적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관습적으로 남아 있던 신분제적 차별에 저항하기 시작한 행랑어멈들의 모습은 당대 민중의 근대적 자의식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p.31 억지로 쫓겨난 행랑살이들 중 상당수는 서울 변두리 땅에 토막을 짓거나 토굴을 파고 사는 비참한 ‘토막민’이 되었다. 특히 신당리의 토막민촌은 집주인, 고용주로부터 쫓겨난 이들이 1918년경부터 모여들어 1930년이면 112세대의 303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 p.42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진고개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인 식모들의 모습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24~1925년경이었다. --- p.47 재조일본인 가정들은 조선에 서는 아직 식모 일을 할 젊은 여성들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조선인들에게는 일본인 식모에게 주는 급료의 6할 정도만 주어도 기꺼이 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들은 일본인들에게‘ 어머니’의 일본식 발음인 듯한 “오모니” 혹은 “오마니”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 p.49 《조선중앙일보》의 1934년 8월 26일 자 논설 한편은 “하고 많은 말 중에 ‘어멈’이라고 부르지 맙시다. 부르는 사람은 교양 없어 보이고,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쁩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1930년대 초까지도 집안일을 도맡아 해 주는 여성 가사노동자를‘ 어멈’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이 하인을 하대하여 부르는 호칭이라는 지적이었다. ‘어멈’ 호칭의 대안으로 제시된 말은 다름 아닌 ‘식모食母’였다. 이후 한국에서 가사노동자를 부르는 말은 점차 ‘식모’로 자리 잡아 갔다. --- p.56 사회사업’이라는 이름으로 1920년대 초반부터 몇몇 주요 도시에 설립된 공설 인사상담소는 원래도 직업소개 업무 위주로 운영되던 기관이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후반경에는 아예 전문 ‘직업소개소’로 분리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1928년 10월 하순에 문을 연 경성부 직업소개소였다. --- p.64 식모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내내 직업소개소 중개 실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고학력의 남성 실업자들이 넘쳐나는 당시 상황에서 수요와 공급이 모두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것은 오직 식모뿐이었다.(65 1930년 《조선국세조사朝鮮國勢調査》…에 따르면 ‘가사 사용인’으로 분류된 사람은 전국에 12만 877명이 있었다. 이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976만 5,514명 중 농경 종사자가 75퍼센트를 넘는 상황에서 비농업직 단일 직업으로는 첫손에 꼽힐 만한 규모였다. --- p.67 1949년 이미 ‘가사 사용인’으로 조사된 인원은 8만 5,849명에 달했다. 한국전쟁 이후 생계를 위한 여성의 경제활동은 더욱 확대되었고, ‘식모’는 1950년대에도 여성들이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기억하는 ‘식모 전성기’는 주로 1960~1970년대에 형성되었다. --- p.76 1960년대 후반 제조업의 성장과 젊은 여성 노동력의 공장 유입이 본격화되면서 이미 ‘식모 부족’ 현상이 나타났으며, 1970년대 중·후반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1970년대 중반까지 주로 주인집에 입주해 일하던 식모들이 1970년대 말부터는 시간제 파출부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또 1960~1970년대 식모(가정부)가 대부분 농촌 출신의 20세 이하 젊은 여성들이었던 것과 달리, 1980년대 이후 파출부는 도시 주변 거주 40~ 50대 기혼 여성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 p.78 한국에서 여성들에게 커리어 추구 자체가 문제가 된 건 20~30년 남짓일 뿐이다. 각종 미디어가 ‘커리어우먼’을 선망의 대상으로 그려 낸 시기가 언제일까. 1990년대 이후다. --- p.86 1993년 10월 18일, 그녀는 법원에 A교수와 서울대, 그리고 서울대를 운영하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장을 제출했다(《 여성신문》 2018년 8월 31일 자). 성희롱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소송이었다. --- p.99 1986년 하반기에는 30대 기업의 모집 규모가 전해보다 20퍼센트나 늘어났다. 그러나…수많은 회사의 모집 공고에 하나같이 ‘응시 자격: 병역 필 또는 면제자’라고 적혀 있었다. 여성은 아예 병역의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남자만 뽑겠다는 의미였다. 여성을 뽑는다고 해도 채용 규모는 소수였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들이 2,000명 이상의 신입사원을 모집했지만 그중 여성은 각각 100명뿐이었다. --- p.108 1988년엔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며 공식 모집 광고에 특정 성별만 채용한다는 조건을 넣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래서일까 1990년대가 되니 커리어우먼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 p.111 “저는 그 서류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 많은 서류를 다 써야 입사가 된다길래 그냥 써 내려갔어요. 그 안에 결혼 퇴직각서가 있었을 줄 꿈에도 몰랐죠.”―〈“결혼하면 퇴직” 46년 전 은행‘ 결혼 퇴직각서’ 찢어 버린 여자들〉, 《 한겨레》 2022년 8월 18일) --- p.120 1975년 11월, 조흥은행 의무실 약사 강경자가…장미숙과 송숙진의 부탁을 받고…조흥은행 창립 이래 처음으로, 결혼 특별휴가 신청서를 제출하고 퇴직 없이 결혼했다. 은행 측은 즉각 반응했다. 장미숙은 결혼 퇴직각서 폐지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버스노선도 없는 영등포 지점으로 발령받았다. --- p.122 1999년 6월 25일, 파기환송심에서 A교수에게 500만 원의 손해배상 지급이 명령되며 6년간의 법정투쟁이 끝을 맺었다. 서울대학교 총장과 국가의 책임이 인정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성희롱이 단순한 개인 간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p.135 1999년 2월,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며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명문화되었다. 최초로 성희롱이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또한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부서 전환과 징계 조치를 취해야 하며, 피해 근로자에게 고용상의 불이익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 p.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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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성들, “딱딱하고 무거운 역사책은 가라”
시리즈에는 고려시대 절부(節婦)에서 20세기 식모, 커리어우먼까지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모두 역사의 ‘주역’이라기엔 거리가 있는, 낯선 인물들이다. 하지만, 지은이들은 몇 줄, 혹은 기껏해야 몇 쪽 되지 않는 사료를 뒤져내 그들의 진솔한 목소리에 귀 기울인 끝에 옛 여성들의 기억, 욕망, 분투, 노동을 온전히 되살려냈다. 사료의 행간을 읽고 사실의 균열 지점을 섬세하게 추적해서 상류층 남성과 가부장적 국가의 기록에 담기지 않은/못한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한 이들의 노력은 그 자체로 값지다. 여기에 때로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때로는 주인공의 독백처럼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허구적 서술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점도 눈길을 끈다. 역사학자의 글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독자들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려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들의 목소리를 소환하여 좀 더 쉽게 널리 전달하고 싶다는 소망을 반영한 성과이다. ‘식모’에서 ‘커리어우먼’까지, 여성 노동의 땀과 눈물 시리즈 4권 『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는 차별의 장벽을 넘나들며 고군분투했던 ‘일하는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다. 여성 임노동의 시초라 할 ‘식모’의 사회·경제사적 의미를 짚고, 1990년대 이후 본격 등장한 ‘커리어우먼’들의 일과 일터를 조명한다. 이아리의 〈여자, 식모 살다〉는 일제시기 이래 행랑어멈, 오모니, 식모 등으로 불리며 가내 노동을 담당하던 여성들을 불러온다. 역사적으로 누구보다 먼저 임금 노동의 시장에 진입한 이는 사실 이 식모들이었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했으며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근대적 남녀 성별 분업과 경제적 역할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권혁은의 〈여자, 회사 가다〉는 1980년대 여대생의 생애주기 속에서 경험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커리어우먼’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성희롱과 고용 차별 등 수많은 애로와 그 극복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1970년대 한국은행에서도 결혼 퇴직각서는 물론 서른 살이 되면 퇴직하겠다는 각서까지 요구했다는 사실 등은 일종의 충격으로 읽힐 것이다. 이 시리즈는 ‘오로지 여성 사학자들에 의해 쓰인 여성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여성’을 넘어선다. 여성의 일과 일터의 애환을 다룬 4권의 경우,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스로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땀을 흘려야 했던 여성들이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온갖 차별을 감내해야 했던 근현대 여성 노동사를 접하면 우리 곁의 ‘커리어우먼’들이 새삼 다시 보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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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역사는 이야기인 바,
이 책은 몹시도 투명한 이야기책이다. 이야기를 짓는 이들과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던 이들이 서로 손을 뻗고 있다. 두 손 사이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들을 응원할 수밖에! - 옥자연 (배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