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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변
·들어가며 여자, 바람피다 12세기 경성 스캔들 족보가 꼬였다 고려의 이상적 부마상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콧대 높은 왕녀 그녀와 그의 속사정 여자, 저주하다 저주가 드러나다 인조가 사랑한 ‘악녀’ , 귀인 조씨 성공기 저주의 설계자 재앙의 뿌리 같은 여자 여자, 수절하다 함양 과부 박씨의 자살 박지원이 생략한 박씨의 유서 그녀들의 명예욕, 그녀들의 타산 사대부 남성이 이해하지 못한 하층 여성의 절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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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말, 고려의 황도 개경을 뒤흔든 스캔들이 벌어졌다. 이른바 안정궁주 간통 사건이다. 의종의 둘째 딸 안정궁주가 당시 천한 신분으로 취급되던 악공樂工과 세기의 간통을 저지른 것이다.
--- p.23 안정궁주의 남편 함녕백 박, 그의 본명은 왕박이다. 이름에서 짐작되듯 왕씨 성을 가진 고려의 종친이었다. 함녕백은 ‘함녕(현 경남 고령)에 봉작된 백작’을 의미한다. --- p.23 왕박의 형 신안후는 인종의 사위였다. 인종은 안정궁주의 아버지인 의종과 명종, 그리고 신안후의 부인 창락궁주를 포함하여 총 5남 4녀를 두었다. 즉 신안후는 왕박의 형이자 처고모부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왕박의 동생 연평공은 그의 ‘손위’ 동서였다. 연평공의 부인 경덕궁주가 의종의 첫째 딸이었고, 안정궁주는 그다음이었다. --- p.33 왕박이 동생에게 밀리게 된 가장 결정적 이유는 그와 경덕궁주의 나이 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박의 형 신안후는 1150년대 초반 인종의 셋째 딸 창락궁주와 혼인했다.…그로부터 1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 1162년 창락궁주의 조카 경덕궁주가 혼인하게 된다. 나이 차를 볼 때 신안후의 바로 아래 동생인 왕박보다는 막냇동생 왕평이 경덕궁주의 상대로 적합했을 가능성이 크다. --- p.38 왕박 삼 형제는 왕녀·부마(백작) 부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고작 약관의 나이를 전후하여 정1품 명예직인 사도·사공이 되었다. 태조 왕건이 천명한 ‘종친불사’의 원칙, 곧 종친은 관직에 나아가 국정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논리에 따라 왕실 출신의 사도·사공은 실질적인 관료로서 활동할 수 없었고 그저 정1품 지위에 걸맞은 예우만을 받았을 뿐이다. --- p.50 고려 왕녀들은 정략혼의 굴레에 갇혔다. 왕실 남성들 가운데에서만 남편을 얻어야 했기에 배우자 선택권을 제약당했다. 국왕과 왕후가 혈통·외모·성품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최상의 부마를 간택하고자 했으나, 물리적으로 후보자의 수 자체가 적었기에 결과가 늘 최상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정략혼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왕실의 재산과 작위, 심지어 왕위계승권과 같은 공적 권한에 대한 지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 p.52 무신정변 직후의 혼란이 수습되면서 안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안정궁주는…1175년, 그녀는 다시 시작된 무료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돌이킬 수 없는 일탈 행각을 벌였다. 안정궁주의 간통 사건에 관해 역사서는 “궁주가 악공을 불러들여 거문고를 배우다가 마침내 간통하였다”고 전한다. 악공을 섭외하고 간통하기까지 모든 행위 주체가 안정궁주로 기술되어 있다. --- p.62 안정궁주 사건이 조정에 보고된 이후 명종은 조카의 부정을 질책하지 않고 안정궁주의 남편인 왕박과 안정궁주의 상간남인 가영을 처벌했다. 왕박은 2년간 제왕의 작위를 박탈당한 상태로 치욕의 시간을 보냈으며, 가영은 섬으로 유배되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 p.67 조 귀인은 1630년 궁녀로 입궁하여 7년 만에 종4품 숙원의 첩지를 받고 이후 인조의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마침내 1649년에는 종1품 귀인으로 봉해지면서 명실상부 궁궐의 실세가 되었다. 인조와의 사이에 효명옹주와 숭선군 이징, 낙선군 이숙을 낳아 2남 1녀를 두면서 남편과의 돈독한 사이를 증명했다. --- p.78 1652년 2월 16일부터 3월 초9일까지 대대적인 조사 끝에 창덕궁·창경궁 두 궁궐에서 저주에 쓰는 흉물이 엄청나게 나왔다.…도감의 기록에 따르면 전각 일대의 대들보, 서까래, 계단 밑, 전각 내 온돌 밑이나 구석, 온돌 연통 틈새, 주방의 비석 아래, 전각 기둥 아래, 건물 모퉁이, 처마 아래, 전각 옥상 덮개 등 궐내 건물 곳곳에서 흉악한 주술용 물건인 양밥이 잔뜩 나왔다. --- p.82 당시 이 저주 사건은 귀인 조씨의 사돈이자 인조 대 권신 김자점의 역모와 얽히면서 국왕을 저주한 사건으로 결론이 났다. 지금도 조 귀인 저주 사건은 김자점 역모를 궁중 안에서 도운, 남성이 주역이었던 정치권력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기 위해 무지하고 무모한 궁중 여성이 벌인 어리석은 욕망의 결과로 인식되고 있다. --- p.86 장렬왕후는 1638년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갔다. 당시 마흔다섯이었던 인조와 혼인했던 장렬왕후는 명문 양주 조씨 집안의 셋째 딸로 그때 나이가 겨우 열다섯이었다. 첩의 자식으로 간택 후궁도 아니었던 숙원 조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엄한 중전이었지만 장렬왕후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 p.94 『인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조 귀인은 자신의 입지에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로 강빈을 꼽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를 가장 견제했고, 저주사부터 독살까지 강빈을 옭아맬 일련의 사건을 기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p.118 김자점은 인조가 엄청난 반대에도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을 때나, 강빈의 옥사에서 그녀를 대역죄로 규정할 때 임금의 의향에 완벽하게 영합해 인조를 흡족하게 했다. 강빈의 일이 마무리되고 김자점이 영의정에 제수된 것은 인조의 보은 인사였다. 조정에서는 김자점, 내명부에서는 조 귀인, 이 둘이 사돈을 맺어 구축한 권력은 누구도 넘볼 수준이 아니었다. 1649 년 조 귀인은 드디어 귀인으로 봉해지며 자신이 달성한 궐내 입지에 걸맞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입궁 19년 만이었다. --- p.119 조 귀인은 결국 ‘재앙의 뿌리(화태) 같은 종자’가 되었다. 그녀는 국왕을 저주한 역적이 되어 저주 사건이 발생한 20일 후에 자진하라는 명을 받고 죽게 되었다. --- p.122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는 ‘악녀 조 귀인’은 유학 이념에 충실한 남성과 무속신앙에 기대는 여성이라는 조선의 젠더화된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며 욕망에 사로잡힌 비도덕적인 여성이 선택하는 저주라는 수단은 조선의 상층 남성들이 좀처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의 사례에서 확인되듯, 사실 그들도 현실에서는 무속신앙의 힘을 인정했다. --- p.124 임술증은 신붓집에서 간신히 예만 갖춘 뒤 합방도 못한 채 돌아갔고, 그 길로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박씨는 시집으로 달려와 통곡했다. 그리고 개가를 권하는 조부모와 시부모의 말을 거부하고 시집에서 정성을 다해 남편의 상을 챙겼다. 상기 중 시부모 봉양까지 살뜰히 챙기던 그녀는, 남편의 대상大祥을 치르며 삼년상을 마치는 날, 독을 먹고 자결했다. --- p.133 촌구석의 어린 아낙이나 여염의 젊은 과부 같은 경우는 친정 부모가 억지로 개가하라며 핍박하는 것도 아니고 자손이 관직에 못 나가는 수치를 당하는 것도 아니건만, 한갓 과부로 지내는 것만으로는 절개를 이루기 부족하다 생각하여,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뛰어들어 죽거나 독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기를 마치 낙토를 밟듯이 하니, 열녀는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연암집』 권1, 연상각선본〈 열녀 함양 박씨전〉. --- p.135 『삼강행실도』를 읽으며 감명을 받아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자신의 도덕성을 장렬하게 증명한 박씨의 존재는, 온 백성의 교화를 꿈꾸며 책을 펴낸 세종의 의도가 끝내 결실을 맺은 사례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겉모습만으로 수용자의 심리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 p.142 오십 줄에 접어든 덴동 어미의 마지막 남편은 엿장수 조씨였다.…화재로…남편은 죽고 어린 아들은 화상으로 큰 장애를 입었다. ‘덴동 어미’, 즉 덴둥이 어미라는 호칭은 바로 화상으로 장애 입은 아들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이렇게 덴동 어미가 직접 풀어 놓은 자기 삶의 이야기가 〈덴동 어미 화전가〉라는 가사이다. 지독히 신산한 삶을 살았고 살고 있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좋은 일도 그뿐이오, 그른 일도 그뿐이라”며 춘삼월 화전놀음을 왔으면 즐겁게 놀기나 하자고 얘기하는 초긍정적 자세를 지닌 아주머니다. --- p.145 그녀가 보기에 개가해서 고생하는 것보다 수절하는 고생이 훨씬 쉽고, 수절은 칭찬받는 행실이기 때문에 동정은 살지언정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는다. 분명 열녀가 되거나 수절하는 과부로 사는 것은 꽤나 명예로운 일이었다. 함양의 박씨처럼 주변의 여러 문인으로부터 글을 받은 집안은 그것을 두루마리로 만들어 가보로 삼았다. --- p.148 아무도 받아 주지 않고 다들 자신을 어딘가로 내보내려고만 하는 처지, 향랑은 비틀비틀 낙동강가로 나가, 지나가는 나무 하던 소녀에게 〈산유화〉 한 곡조를 남기고 물에 빠져 자살했다. 이때가 1702년(숙종 28), 그 2년 후 조정에서는 정려를 내렸다. 비천하고 배운 것 없는 여성이 개가를 거부하며 장렬하게 자살했다는 소식은 지역 사회를 흥분시켰다. 영남의 사대부 들이 향랑을 주제로 지은 전기만 아홉 편이나 될 정도였다. --- p.156 하층 여성들의 자살은 성폭력이 만연하고 자기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중 극히 일부에게 열녀라는 칭호가 부여되기도 했으나, 사대부 남성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사대부 남성들은 때로는 지역의 풍속에서, 때로는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한 것이라 말하며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신들 마음대로의 의미부여였을 뿐이다. --- p.168 여성의 정절을 추앙하는 문화 속에서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자, 이들은 더욱 과감히 이를 결행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이 부여한 규범에 예속되는 과정이었으나, 동시에 그러한 종속을 통해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 p.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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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성들, “딱딱하고 무거운 역사책은 가라”
시리즈에는 고려시대 절부(節婦)에서 20세기 식모, 커리어우먼까지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모두 역사의 ‘주역’이라기엔 거리가 있는, 낯선 인물들이다. 하지만, 지은이들은 몇 줄, 혹은 기껏해야 몇 쪽 되지 않는 사료를 뒤져내 그들의 진솔한 목소리에 귀 기울인 끝에 옛 여성들의 기억, 욕망, 분투, 노동을 온전히 되살려냈다. 사료의 행간을 읽고 사실의 균열 지점을 섬세하게 추적해서 상류층 남성과 가부장적 국가의 기록에 담기지 않은/못한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한 이들의 노력은 그 자체로 값지다. 여기에 때로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때로는 주인공의 독백처럼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허구적 서술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점도 눈길을 끈다. 역사학자의 글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독자들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려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들의 목소리를 소환하여 좀 더 쉽게 널리 전달하고 싶다는 소망을 반영한 성과이다. 공주의 외도, 궁중의 저주 그리고 수절의 진실 시리즈 2권 『여자, 기어이 욕망하다』에는 자아실현의 욕망, 권력욕, 명예욕 등 여성들의 욕망을 다룬 세 편의 글이 실렸다.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전략과 실제 성취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함으로써, 여성들의 주체성을 복원했다. 황향주의 〈여자, 바람피다〉는 고려 의종의 둘째 딸 안정궁주가 천한 신분의 악공 가영과 통정한 사건을 추적하는데 고려 왕실의 근친혼 배경 등 체제와 관습을 조명함으로써 ‘간통’ 이유에 초점을 맞췄다. 이 과정에서 숙종의 막내 딸 복령궁주의 묘지명 중 “비록 왕녀였음에도 오히려 부인의 도리를 고집하였다”는 구절의 행간에서 고려 왕실 여성들의 실태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민정의 〈여자, 저주하다〉는 조선 후기 인조의 후궁 조 귀인이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속의 저주라는 양날의 검을 활용했던 사례를 분석한다. 그녀에 대한 악녀화가 젠더화된 구조에서 양산된 클리셰임을 지적하며, 남성의 전유물이던 조선의 정치 지형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 조 귀인의 삶을 재평가한다. 장지연의 〈여자, 수절하다〉는 조선 후기 합방도 못한 채 먼저 떠난 남편의 대상을 마친 날 자결한 함양 박씨, 정절을 지키려 자살한 향랑과 네 번 결혼한 끝에 “좋은 일도 그뿐이오, 그른 일도 그뿐이라”고 달관한 ‘덴동어미’의 사례를 들어 사대부들이 이를 어떻게 보았는지 살피면서 하층 여성들의 자살은 성폭력이 만연하고 자기결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저항이라 짚어낸다. 이와 함께 하층 여성들의 명예욕과 계산속을 신분이라는 조건과 교차 검토함으로써 사대부 남성의 열녀 담론에 균열을 내고, 남성들의 시선을 답습해 조선 후기 열녀의 행적을 분석해 왔던 기성 역사학의 시선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이 시리즈는 ‘오로지 여성 사학자들에 의해 쓰인 여성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여성’을 넘어선다. 2권의 경우,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닌 여성의 욕망이 그간의 역사 서술에서 소홀히 다뤄졌음을 일깨워주는 덕분이다. 여기에 여성의 욕망에 투영된 시대상을 읽노라면 체제가 허용한 것을 영리하게 활용하기도 하고 때로 체제의 한계에 도전하기도 했던 여성들의 삶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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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역사는 이야기인 바,
이 책은 몹시도 투명한 이야기책이다. 이야기를 짓는 이들과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던 이들이 서로 손을 뻗고 있다. 두 손 사이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들을 응원할 수밖에! - 옥자연 (배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