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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산 너머로 가는 날들
2. 노랑상사화꽃이 환하다 3. 먼 길에서 띄운 배 4. 쓸쓸한 날의 여행 5. 단풍나무가 된 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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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지났다. 바지 깃을 적시는 그 이슬 길을 밟으며 새벽 이슥해져서야 비틀거리며 돌아와 죽음처럼 누웠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네. 눈을 뜨니 밤새 내가 몸부림을 치며 잔 흔적들이 폐허 속을 떠돈다. 우편물을 가지러 아랫마을에 내려갔다가 뿌리치지 못한 낮술 몇 잔에 가을비 속을 비틀거리며 돌아온다. 술기운이 점점 몸을 나른하게 한다. 자야지. 아궁이에 불을 때고 들어왔는데 아랫목이 조금 미지근해져온다. 이제 자야지. ---p.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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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마. 그러나 나비는 더 기다려 주지 않고 사르릉 날아 올라버렸다. 갑자기 렌즈의 망막 속에서 나비가 떠나가 버리자 거기 나비가 앉았던 자리가 눈부시게 빛을 뿌린다. 낙엽 부스러기밖엔 아무것도 없는 자리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손을 대어본다. 거기 철 지난 갈잎들이 부서져 거름으로 돌아가고 깨알 같은 연초록빛 풀씨들이 이제 막 깨어나고 있었다.
--- p.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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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44)씨의 『나비가 날아간 자리』는 10여 년 전 전북 전주 모악산 자락에 터를 잡은 시인이 그곳 '모악산방'에서 꾸리고 있는 시같은 삶을 소개한 글모음이다. 1992년에 낸 『쓸쓸한 날의 여행』을 저본으로 삼아 글 몇 편은 빼고 몇 편을 새로 넣었다. 시인의 삶은 혼자서 동치미를 담그고, 창호지에는 멋으로 나뭇잎 몇을 붙여 넣으면 술과 사람이 그리우면 훌쩍 집을 나서 이곳저곳을 떠돌다 오기도 하는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얼핏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만큼 외로움과 가난에 익숙해져야 하는 삶이기도 하다.
--- 한겨레신문 0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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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남준은 만나기가 어렵다. 보통 사람뿐만 아니라, 지인들도 그렇다. 그가 모악산 자락 외딴집에 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화라도 할라치면 “버들치와 놓고 있습니다. 말씀 남겨 주세요. 그럼 안녕”하거나 “음… 햇살이 눈부시지요. 바람은 또 얼마나 부드럽습니까. 저 말입니다. 봄바람 타고 바람났다가 아니 바람나러 갑니다. 그러니 돌아오기는 돌아올 겁니다. 기다려 보세요. 그럼 돌아올 때까지 안녕 안녕 나도 안녕”하며 자동응답기 소리만 듣기 십상이다. 그 소리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돌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 그를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 ‘모악산방(http://home.hanmir.com/~moac)’이다. 그 곳에 가면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듦을 확인할 수 있다. 다들, 섬진강 시인 김용택님이 “남준이를 한번씩 만나고 와야 영혼의 때가 씻겨 나간다”고 고백한 것처럼 영혼의 목욕을 즐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절판된 산문집 『쓸쓸한 날의 여행』(1992년 펴냄)을 가지고 다시 만들자며 그를 만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대가도 아니고 뭘 새삼스럽게…”하며 한사코 거절하였다. 그러나 홈페이지 ‘모악산방’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첫번째 산문집을 구할 수 없겠느냐고 성화를 부리자, 그도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말대로 “새로 넣을 것은 넣고 뺄 것은 빼고” 하여 새 책 『나비가 날아간 자리』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나비가 날아간 자리』는 10년 전 발간했던 『쓸쓸한 날의 여행』에서 젊은 날의 치기어린 글을 다듬거나 빼고, 최근의 글을 더하여 펴냈다. 때문에 그가 10여 년 동안 살아온 삶의 고백이 오롯이 담겨 있다. 10여 년 전, “…아! 창호지 새로 퍼져 나오는 환한 불빛, 저 따뜻한 그리움의 불빛, 누구일까? 누가 왔을까?… 어디 잠시 바람이나 쐬러 밖을 나갔을 게야. 혹시 기다리다 시간이 없어 그냥 떠났을까”(‘중노송동 일기’중에서)하며 불을 켜둔 줄 모르고 나갔다가 밤이 되어 돌아와서는 오지도 않는 사람의 자취를 그리워하던 그가, 이젠 “멀리서 오셨더라도 그냥 돌아가십시오. 들어오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라는 격문을 붙여 놓을 정도로 유명세 타는 모습도 이 책에서 확인하는 즐거움이다. 이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나비처럼 작고 가벼워진 시인이 이곳 저곳 날아다닌 삶의 자취가 선명하게 살아 있다. 비교적 최근에 씌어진 글들이 첫 번째 장인 <저 산 너머로 가는 날들>이고, 두 번째 장은 이러저러한 기억과 소회를 엮어 <노랑상사화꽃이 환하다>라 붙였다. 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담아 세 번째 장 <먼 길에서 띄운 배>로 묶었으며, 여행기는 네 번째 장 <쓸쓸한 날의 여행>이 되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장은 동화도 아니고 민담도 아닌 박남준 표 이야기로 <단풍나무 이야기>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