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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노트
1 저격수의 손에는 피가 묻지 않는다 2 송곳니 뽑기의 정치 3 시린의 여권 4 추궁받는 삶 5 비유와 드론 6 놀이방의 『나의 투쟁』 7 기적적인 깨달음 8 정말로 우리 모두 팔레스타인인인가? 9 “이스라엘인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은가요?” 에필로그: 머지않아 비가 내릴 거야 감사의 말 옮긴이의 글 인용 문헌 주 찾아보기 |
Mohammed El-Ku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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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대한 대량학살은 오직 광고 시간에만 멈춘다. 판사들은 대량학살을 합법화한다. 통신원들은 수동태로 우리를 죽인다. 운이 좋으면 외교관들이 우리의 죽음에 우려를 표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범인을 비판하기는커녕 절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관성적이거나 무능하거나 공모자인 정치인들은 우리의 종말에 돈을 댄다. 동정하는 척이라도 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다. 학자들은 관망한다. 풍진이 가라앉고 나면 그제야,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에 관한 책을 쓸 것이다. 용어니 뭐니를 만들고. 과거형으로 강연을 하고. 심지어는 우리 중에도 있을 독수리들이 박물관을 돌며 정작 당시에는 비난했던 것, 구태여 옹호해주지 않았던 것—우리의 저항—을 찬미할 것이다. 낭만화할 것이다. 신화화하고, 탈정치화하고, 상품화할 것이다. 우리의 살로 조각상을 만들어 세울 것이다.
--- p.20 비인간화의 결과들은 우리가 어떻게 인식되는지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크나큰 것일 수도, 미묘한 것일 수도 있다. 한 사람 속에서도, 공동체 속에서도 나타난다. 속을 파고드는 무단 침입. 비인간화하는 이들의 잔혹성은 우리 거실에까지 쫓아와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에 대한 개념을 세우고 아이들을 기르고 제도를 만들지를 정했다. 보도국과 대학에 떼로 몰려들었다. 기도실을 침략했다. 병원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두려움으로,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는 두려움으로 채워버렸다. 그 두려움은 우레 같던 선언들을 익명의 속삭임으로 바꾸어놓았다. --- p.30~31 이 이분법에—아니, 테러리즘 혐의를 받는 데, 인간의 조건 바깥으로 추방되는 데 대해—우리는 호소의 정치로, 우리의 대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고안한 일련의 창의적 옹호 전술로 대응해왔다. 앞에서 언급한 요건들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써온 것이다. 기준을 정복하기만 하면, 마법적으로, 경이롭게, 팔레스타인인은 마침내 테러리스트라는 사면초가의 범주를 벗어나 훨씬 좁은 피해자성의 교점으로 피신할 수 있다. --- p.33 우리에게 주문하는 인간성, 혹은 우리가 스스로 발명한 인간성은 복잡하고 머리 아픈 규정집을, 상형문자로 쓰인 그 계명들을 따른다. 영원한 피해자성으로써 유지되고, 동정과 연대를 얻으려면 따라야 하는 [외부, 특히 서구의] 자민족중심주의적 한계선을 통해 규제되는 인간화 기획은 부적격이다. 당신은 이것을 실패를 거듭하며 배우게 된다. 이런 틀에서 우리의 정동적·심리적 허용 범위는 극도로 각박하게 제한된다. --- p.47 ‘비당파적’, ‘중립적’ 인물이라는 민간인의 발명은 팔레스타인 대의의 탈정치화를 심화했다. 민간인으로 여겨지려면 우리는 아무런 관점도 갖지 않는 신화적 차원에 존재해야 한다. 이 신화 속에서 상상되는 우리의 대의는 이제 해방 투쟁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위기’의 문제로 이해된다. --- p.71 팔레스타인인은 오로지 송곳니를 뽑혀야만 말하고 서사화될 수 있다. 기껏해야 가장자리에 걸쳐지는 서사지만 그래도 서사이기는 한, 당신이나 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인의 이야기란 팔레스타인인을 그의 존재에 서사가 없는 세계로, 또는 더 엄밀히 말해 그가 자술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규정 뒤에 놓이는 세계로 옮겨두려 하는 이야기다. --- p.93 언어는 점령당한 골란 고원과 시리아의 나머지 지역을 가르는 경계지대보다 더한 지뢰밭이었고, 어린아이였던 우리는 우리를 신뢰 못 할 존재로 만들 폭탄 같은 말을 실수로라도 밟지 않기를 바라며 그 지뢰들 사이를 이리저리 팔짝거리며 다녀야 했다. 틀린 말을 쓰는 일에는 사물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이 있었다. 농담조로든 화가 나서든 틀린 말을 뱉으면 군화, 총탄, 몽둥이, 멍,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틀린 신념을 갖는 것은 훨씬 더 위험했다. 그랬다간 그런 잔혹 행위를 당해도 싼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빼앗긴 특권은 시민권, 자결권, 이동의 권리만이 아니었다. 단순한 무지마저도 사치였다. --- p.113~114 무엇보다도, 팔레스타인의 해방 투쟁은 영웅적이다. 여기엔 그 어떤 단서도 필요치 않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공통의 진리라 불러온 것을 《하아레츠》나 《뉴욕 타임스》가 기적적으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기 기술(技術)에 대한 존중에 기반해 지식 생산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술가들과 옹호자들이 국가의 비서가 되기를 거부하는 문제다. 이야기꾼들이 지루한 공식을 깨고 식민적 시선에서 벗어나는 문제다. 우리가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 p.177 서구의 지식 생산자들 혹은 서구의 목소리를 활용해 지식을 생산하는 이들이 자문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이 작업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들은 주체성이라 할 만한 것을 지녔는가, 아니면 논지를 제시하기 위한 도구인가? 내가 착취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어떻게 책임 있는 저자성을 실천할 수 있는가? 나의 기획에 관객이 그것을 비판적으로 소비하도록 독려하는 단서를 충분히 넣었는가, 아니면 그저 내 등을 토닥이고 있는가? 저녁 식탁에서 시온주의자인 고모를 붙들고 말을 꺼내고 편견에 가득 차 설전을 벌이는 나의 공동체와 이야기를 나누는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가대를 향해 설교하고—실상 굽실거리고—있는가? 내가 정말로 가서 ‘직접 확인해야’ 했던 것인가, 아니면 한 세기에 걸친 팔레스타인 문헌들을 무시한 것인가? 현지의 풀뿌리 지식 생산에 관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세계 무대에서 그 지식의 가치를 계속 깎아내리고, 팔레스타인 서사의 가치와 권위 또한 깎아내리는 일임을 나는 인식하고 있는가? 내 작업에 계급 분석이 있는가? 학생 운동이 범죄화되고 정학과 검열을 당한 원인이었던 말들과 비슷한 것을 말하고서 나는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내가 받은 제도적 지원을 명시하는가? 내가 증폭하는 목소리의 주인들이 처한 물질적이고 금전적인 조건은 어떤가? 내가 죽은 이들만 참고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참고 문헌 목록은 어떤 모습인가? --- p.179 불손은 존엄을 되찾는 거부 행위다. 포위나 감금으로 갇혀 있는 이들이 마음속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굴을 파려면 땅에 삽을 박기 전에 우선 굴을 상상해야 한다. 불손은 점령이 결코 꺾을 수 없는 상대가 아니고 점령자가 내쫓을 방법이 없는 존재가 아닌 대안 현실을 지어 올린다. 경관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도 않고, 저격수가 어디에나 있지도 않은 곳이다. 여기서 군사 장벽의 상징적인 의미는 손에 만져지는 콘트리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 p.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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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마저도 전쟁통에 죽어버렸다.”
정밀함과 아이러니로 벼려낸 분노와 저항의 목소리 팔레스타인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통렬한 해부와 증언 우리의 공감은 왜 선택적으로 작동할까? 피해자의 자격을 가르는 시선에 대하여 지난 4월 10일 이재명 대통령이 SNS에 이스라엘 비판 발언을 올려 큰 파장을 낳았다. 이 대통령은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아이를 고문하고 옥상에서 떨어뜨렸다는 주장과 함께 게시된 영상을 공유하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위안부 강제, 유대인 학살”과 다를 바 없다고 썼다. 이후 추가 게시물을 통해 해당 영상이 2024년 9월 서안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성인 시신에 행해진 일임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국제인도법은 준수돼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은 최우선 가치’이며 시신도 국제법의 보호 대상이라 언급했다. 하지만 법의 문제를 떠나, 군홧발에 차여 추락하는 대상이 아동이나 산 자가 아니면 우리의 윤리 감각을 그다지 거스르지 않는 걸까? 이미지 속 형체를 처음에 ‘아이’로 인식해 더 큰 공분을 느꼈던 것이 근래 국내 반이스라엘 정서 확대에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분노의 크기가 피해자의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면, 우리의 공감이 선택적으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힌드의 목소리」는 5일 만에 관객 수 1만 명을 돌파하며 호응을 얻고 있다. 여섯 살 힌드 라잡은 335발의 총탄이 박힌 차 안에서 가족을 잃고 절박하게 구조 요청을 했으나, 결국 구급대원들과 함께 이스라엘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사건에 많은 사람이 분개했고 힌드의 사진과 녹음된 목소리가 널리 퍼졌다. 2023년 10월부터 시작된 집단학살로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가 7만 2000명을 넘는 사이, 죽음이 받는 주목은 균등하지 않았다. 세상은 힌드처럼 너무나 명백히 ‘무고한’ 이들의 고통에 더 아파했다. 어리고 힘없는 ‘약자’에게 더 깊이 공감하는 것은 인간 본성이자 제도의 결실이기도 하므로 그 자체를 문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고함과 무해함을 강조할수록, 의도와 무관하게 팔레스타인인들을 더 좁은 틀에 옭아매게 된다는 점이다. 『완벽한 피해자』는 이처럼 인간의 조건 밖으로 내쫓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피해자성만을 내세워야 하는 인간화의 역설을 밝혀낸다. 점령당한 예루살렘 출신 작가이자 활동가인 저자 모함메드 엘쿠르드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서구의 호감과 신뢰를 살 만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호소의 정치’라 명명한다. 이는 팔레스타인인에게 분노와 저항을 박탈하고 그저 수동적으로 고통받는 ‘완벽한 피해자’가 되길 요구한다. 이 책은 식민주의 체제의 이 같은 작동 방식을 통렬하게 해부하며, 그 틀을 거부하고 저항과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는 언어를 묻는다. 팔레스타인인에게 허락된 단 두 가지 이름, 인간 동물 혹은 송곳니 뽑힌 인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비인간화되고 피해자 아니면 테러리스트라는 이분법으로 재현된다.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공개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을 “인간 동물”, “박멸해야 하는 야만인”이라 일컫고 “팔레스타인 민족 같은 것은 없다”라든가 “애들도 다 죽여야 한다”라는 주장을 내뱉는다.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인이 겪고 있는 끔찍한 폭력과 억압, 말소 앞에서 대체로 냉담하다. 그들이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자동으로 인간이 될 수는 없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나 도덕성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다움’, 즉 팔레스타인인으로서의 정체성 자체다. 따라서 인간화는 “결백—백인성, 교양, 부, 타협, 협력, 비동맹, 비폭력, 무력함, 미래 없음—에 가까워짐으로써”(47쪽) 가능하다. ‘민간인’으로 인정받으려면 분노와 행위자성을 포기한 채 정세, 집단의 대의, 이데올로기 따위 입에 올리지 않으며 오직 인도주의적 위기에 대한 구제만 기대해야 한다. 팔레스타인인은 송곳니를 뽑혀야만 제한적일지언정 말하고 서사화될 수 있다. 이 책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스라엘 및 적극적인 공모국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연민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부지중에 피해자상(像)을 재생산해온 지지자도 포함한다. 연대자들은 팔레스타인인의 무고함을 강조하고, 그들을 자유주의적 기준에서 존중하고 공감할 만한 형태로 묘사한다. 엘쿠르드는 그럴수록 함정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호소의 정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인간의 자격을 두고 오디션을 봐야 하는 권력 구조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구조 안에서 인간성을 입증할 수단을 갖지 못한 팔레스타인인, 식민 폭력에 (때때로 총, 화염병, 돌멩이, 주먹을 들고) 맞서는 팔레스타인인은 권리와 존엄을 갖고 살아갈 자격을 잃는다. 나아가 이 책은 거울이 되어 스스로를 비춘다. 식민 논리를 내면화하고 완벽한 피해자 역할을 수행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해서다. 유럽연합 여권이나 전문직 사원증, 졸업장을 무죄 보증서처럼 내미는 자들, 특권층, 계급 상승의 길이 있는 자들 등등. 이들은 언어를 순화하고, 정체성과 정치성을 탈색하고, 계급주의적 세계관에 복무한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의 사랑을 받는 기자였던 시린 아부 아클레는 취재 중에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살해당했다. 이후 사망 보도 과정에서 미국 시민임이 알려져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죄’에서 사면되었고 서구의 주목과 애도를 받았다. 반면 그 3주 후 마찬가지로 ‘프레스’ 조끼를 입은 채 이스라엘군에게 살해당한 구프란 와라스네는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런 차이는 목숨의 위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은 완벽한 피해자의 조건을 충족시켜줬을 뿐 목숨을 지켜주진 못했다. 결국 인간화 기획은 식민 논리와 인종주의적 서사를 강화하고, 집단적 해방 대신 개인적 승리를 위해 팔레스타인을 소비하게 하며, 해방 운동의 동력을 내부에서 잠식한다. 정착민 식민주의 체제의 책략, 폭력과 점령으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프로파간다 이 책에서 엘쿠르드는 호소의 정치에 대한 거부와 함께, 식민주의와 봉쇄, 군사점령이라는 문제의 핵심에서 우리의 주의를 돌리도록 설계된 시온주의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말 것을 요청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을 수감하거나 폭행하거나 살해하고서 그 경위와 구실로 허튼소리를 하기 일쑤다. 가령 이스라엘 대통령 헤르초그는 군이 팔레스타인인의 집 아이들 방에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 아랍어판을 찾았다며 그것이 팔레스타인인들이 유대인 절멸을 획책하고 있는 증거인 양,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정당화해주는 구실인 양 다뤘다. 이스라엘 경찰들은 팔레스타인 청년의 얼굴에 다윗의 별 모양 낙인을 찍은 후 그것이 경관의 신발로 인해 생긴 자국이라 주장했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 또 이스라엘군은 가자 알아흘리 병원을 폭격하고서 아군 포격이 원인이었다는 허위 주장을 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스라엘의 이런 비논리, 날조, 신화를 논박하려는 충동을 다스려야 한다. 그들의 의도가 바로 그런 논쟁을 일으켜 팔레스타인인들과 그 연대자들의 주의를 분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중상모략을 반박할 때 그것이 중요해 보이게 되고, 그 논리가 부지중에 정당화되고, 때론 시급한 눈앞의 현실이 외면당한다. 이를테면 『나의 투쟁』이 조작된 증거라고 증명하려 드는 순간, 책을 무기로, 범죄의 증거로 대하는 시온주의 논리를 인정하는 셈이다. “거짓 혐의에서 내 이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게 혐의를 씌우는 이들의 기만과 이중성을 폭로하는 것”(134-135쪽)이 옳은 방향이다. 저자는 연단에 설 때마다 받는 질문에 대해 말한다. “이스라엘인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은가요?” 그는 갈수록 경박하고 불손하게 답한다. “그렇게나 빠져 죽을까 봐 걱정되면 수영을 배우면 될 일 아닌가요?” 이런 질문들은 식민자 정착민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미래의 재앙을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나크바(대재앙)보다 우선시하는 담론적 악순환을 부추기기 때문이다(213쪽). 이에 대해 웃음과 농담, 풍자, 불손으로 응답하는 행위는 도덕적·정치적으로 사소한 일이 정말로 심각한 일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한다. “저 폭탄 앞에서 글이란 얼마나 모자란가?” 애도가 멈춘 곳에서 터져 나오는 시적 말하기 엘쿠르드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답게 정밀한 비유와 간결한 논변, 절제된 감정과 시적 리듬으로 진동하는 언어를 구사한다. 영어와 아랍어, 운문과 산문, 선언과 증언, 개인적 서사와 르포르타주가 교차하는 글쓰기는 참담한 진실을 다루면서도 종종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동시에 언어에 깃든 권력관계, 인종주의적이고 확장주의적인 수사적 장치, 주류화된 서사와 담론을 주요하게 분석하고 심문한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책 맨 앞에 배치한 「작업 노트」에서 의도적으로 글 전반에 남성 대명사를 과다하게 썼다고 밝힌다. 팔레스타인인을 너무 오랫동안 ‘여성과 아동’으로 축소하는 관행이 여성과 아동에게서는 주체성을 빼앗고 남성은 악마화해왔기 때문이다. 또 각주를 특별한 방식으로 활용한다. 각주는 결코 주변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많은 팔레스타인 수감자들과 순교자들의 약력을 담고 있고, 핵심적인 아이러니나 유머를 형성하는 비평적 기능도 한다. 종종 아랍어로만 쓰인 각주가 나온다. 이는 아랍어를 모르는 독자들의 세계 바깥에서 활발히 생산되고 유통되는 논의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저자는 “독자를 내 집을 찾은 손님처럼 대하고 싶”다고도 말하는데, 가장 ‘집’처럼 느껴지는 텍스트가 바로 이곳이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딜레마를 진솔하게 고한다. ‘팔레스타인의 해방 투쟁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내가 구성하는 언어와 이미지는 장차 어떤 영향으로 되돌아올까?’ 시온주의의 폭압을 기록할뿐더러 집단 투쟁이 일어나는 데 촉매 역할을 한 작품을 예로 들면서도, 각종 글과 예술을 통해 세계 여론이나 현 상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미미하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을 함께 적는다. 함께 해방된 미래를 꿈꾸기 한편 이 책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물질적 분석에 헌신하는 일”(176쪽)을 강조한다. 그것은 거리에서 생산되는 지식, 민중의 경험과 전문성에 근거한 이해를 길어 올리는 일이다. 엘쿠르드는 가자의 시민 언론인들이 일궈낸 변화를 다루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이 해내야 할 실천의 하나로 “비판적인 시청자와 비판적인 독자가 절대 빠지지 않는 실천”(177쪽)을 꼽는다. 이 책은 연대의 위치에 서고자 하는 이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다양한 일을 알려주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비판적인 독자’로 만들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기 기술(記述)에 얽히게 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간명하고 강력한 요구가 전해진다. 조건 없는 존엄을 존중할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팔레스타인인이다’라는 시위 구호를 은유가 아닌 실질이 되게 할 것. 가자와 팔레스타인이 구호를 혼자 외치게 두어선 안 된다. 이것은 또한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요청이다. 호소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체제를 거부하고 바꿔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적어도 독자를, 그들의 호소를 듣고 자격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빠져나오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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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불의 강이 있다. 감히 할 수 있다면 뛰어들어라. 안개가 걷힐 것이다. - 아룬다티 로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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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시인이란 진실을 말하는 이들이고, 진실은 아프다. 날것의 생생함과 정교한 감응력, 면도날 같은 명료함을 갖춘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아파하고 저주하고 울게 만들며, 때로 웃음 짓게 한다. 일부는 이것이 ‘타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곧 이 책이 ‘우리’, 즉 연대자들, 심지어 연대라는 이름으로 부지중에 ‘완벽한 피해자’를 요구해온 동지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 로빈 D.G. 켈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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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을 요구하면서도 피해자성을 거부하는 글쓰기다. 저자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인간화’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분노를 박탈하려는 집요한 시도를 통렬히 비판하며, 이를 팔레스타인인의 ‘송곳니 뽑기’라 명명한다. 그리고 자신의 송곳니를 드러낸다. - 론 제이컵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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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허함, 아이러니, 불경함은 자기방어의 언어이며, 말은 저자의 무기다. - 닉 에스테스 (역사가·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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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주류적 재현 방식과, 너무나 많은 것을 양보하는 결과만을 가져온 팔레스타인의 ‘호소의 정치’에 강력한 논평을 제시한다. 인정받아야 한다는 필요에서 해방된 팔레스타인인의 존엄에 대한 선언이며, 상상된 청중이 베푸는 호의에 기대지 않는 정치에 대한 단호한 요구다.” - 압드 알자와드 오마르 (팔레스타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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