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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Ⅰ. 일본 왕실 보물 창고에 보관된 독특한 가위 Ⅱ. 월지에서 발굴된 또 다른 독특한 가위 Ⅲ. 월지의 금동 가위 톺아보기 Ⅳ. 초심지 가위를 이해하는 또 다른 열쇠, 초와 촛대 Ⅴ. 초심지 가위를 사용한 아주 특별한 공간 • 나가는 말 • 용어 해설 • 참고 문헌 • 사진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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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이와 똑 닮은 가위가 일본 도다이지의 쇼소인에 한 점 보관돼 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가위 모두 어디에 쓰던 물건인지 발굴 당시인 1975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독특한 형태의 가위 두 점. 과연 무슨 용도로 사용했을까요?”
--- 「들어가는 말」 중에서 “금동 가위는 월지의 펄층에 묻혀 1000년이 넘는 세월을 물속에서 견디다 1975년에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월지의 발굴 담당자들은 그 가위가 우리에게 익숙한 가위와 형태가 무척 다르다는 점에서 우선 놀랐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물속에 잠겨 있었음에도 금동 가위 상태가 매우 양호해서 또 한 번 놀랐습니다.” --- 「월지에서 발굴된 또 다른 독특한 가위」 중에서 “가윗날의 가장자리에 있는 반원형의 테두리는 가위로 자른 대상물이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가위로 자른 대상물이 가위 밖으로 떨어지면 곤란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날의 길이가 약 4센티미터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이 가위로 자를 대상물의 크기는 4센티미터를 넘지 않았던 듯합니다.” “원래 쇼소인의 가위는 날 부분의 가장자리에 무언가를 부착했던 흔적만 남아 있었을 뿐, 무엇이 부착돼 있었는지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월지에서 나온 초심지 가위의 존재가 일본에 알려진 이후 쇼소인의 남창에서 보관 중이던 구리와 철로 만든 여러 금속구 가운데서 반원형의 금속구 두 점을 발견했고, 가윗날 부분의 가장자리와 두 점의 금속구를 맞춰 본 결과 서로 간에 납땜 흔적이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 「월지의 금동 가위 톺아보기」 중에서 “752년 일본 왕실과 귀족이 신라 꿀을 사기 위해 매입 허가 신청 문서를 앞다투어 제출했다면, 적어도 8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 양봉이 원활하게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당시 일본에서 밀랍은 물론이고 초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 「초와 촛대, 초심지 가위를 이해하는 또 다른 열쇠」 중에서 “월지 서쪽의 대형 건물은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태자가 머물던 태자궁, 즉 동궁이라는 주장이 거의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와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료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습니다. 헌덕왕이 수종을 부군으로 임명한 지 불과 2개월 뒤에 각간 충공의 딸인 정교를 태자비로 삼았다는 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 「초심지 가위를 사용한 아주 특별한 공간」 중에서 “월지의 금동 가위도 ‘초심지 가위’로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진면목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또 다른 문화유산이 자기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나가는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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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왕실의 명품
-이 독특한 가위는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 1975년 월지 펄층에서 건져 올린 금동 가위는 발굴단도 처음 보는 형태였다. 손잡이에 손가락을 넣을 수 없고, 날 부분에는 반원형 테두리가 달려 있다. 일본 쇼소인에도 똑같이 생긴 가위가 있었지만 그쪽도 용도를 몰랐다. 가위의 이름을 ‘초심지 가위’라고 처음 밝힌 이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무하던 한 여성 고고학자였다. 용도가 밝혀지자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쇼소인 가위의 날 부분도 비로소 원형으로 복원될 수 있었다. 발굴 당시의 영상과 기록을 통해 그 과정을 생생하게 따라간다. -넝쿨무늬와 작은 원무늬로 빼곡히 장식한 화려한 가위 월지 초심지 가위의 앞면에는 여백을 찾기 어려울 만큼 넝쿨무늬와 작은 원무늬가 빼곡하다. 쇼소인의 가위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것과 비교된다. 2024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실시한 최신 X선 형광 분석과 현미경 분석 결과를 통해, 발견 당시부터 논란이 됐던 군청색의 정체도 과학적으로 밝혀 낸다. -아주 특별한 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었던 빛 통일신라 때 초는 왕실이나 최상류층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월지 일대에서 등잔은 수백 점이 쏟아져 나온 반면, 초심지 가위는 단 한 점뿐이다. 책은 밀랍과 양봉의 역사, 752년 신라 사절단이 일본에 가져간 꿀과 촛대의 기록, 쇼소인에 보관된 납밀까지 꼼꼼히 추적하며 초심지 가위가 왜 왕의 전유물이었는지를 설명한다. -월지 서쪽 건물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초심지 가위가 출토된 월지 서쪽 2호 건물은 태자의 공간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그런데 2018년 보완 발굴 조사에서 왕만이 지날 수 있는 답도가 확인됐고, 중앙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은 구조도 드러났다. 초심지 가위를 단서로 삼아, 최근의 연구들을 종합해 월지 주변 건물군 전체의 성격을 새롭게 추측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