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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동시, 렉처 동시, 인터뷰 동시, 콘퍼런스 동시, 포트레이트 동시, 퍼포먼스 롱테이크 노이즈 미술인 것: 「동시, 퍼포먼스」의 매체에 대해 오프포어트리(off-poetry) 지은이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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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나는 ‘동시’와 빈번하게 조우한다. ‘동시’는 여러 개체가 동시다발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행동하고 얽히고 중첩되어 생성된 복잡한 덩어리 상태다. 각각의 경계가 흐려진 혹은 혼종된 감각을 환기하는데, 이는 융합이나 총체 감각보다는 다중이나 집합 감각에 가깝다. ‘동시’를 형성하는 덩어리는 결코 단일한 선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p.13 불확정성과 구조는 서로를 부정하기보다 보완한다. 이들은 중첩된 상태에서 각각의 자율성을 유지한다. ---p.15 시카르: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인식하고 그에 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점점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훈련이 된다. ---p.33 킴: 연습이란 진화를 전제한 반복과 인내다. 그런 점에서, 만빌, 슈미테르, 킴: 가장 좋은 훈련은 그 일을 하는 것이다. ---p.34 시쇼프: 편집은 관객의 현실 밖에 놓인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의 호흡을 찾는 것이다. ---p.36 샹프티에: 시네마토그래피는 움직임이다. 첫 번째는 빛을 만드는 움직임이다. 지적이고 이성적인 작업이다. 크루와 함께하지만 때때로 이 작업은 고독하다. 두 번째는 카메라와 함께하는 움직임이다. 정신적이기보다 신체적이다. 그야말로 몸의 문제다. 이 둘이 결합될 때 비로소 한 숏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둘은 마치 음과 양같이, 숏에 관한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 --- p.36~37 뒤랑: 시네마토그래피는 수많은 거리를 다룬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거리가 그중 하나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어떻게 만들고 또 연결하는가에 관한 제스처 또는 그 세밀한 기술이 곧 시네마토그래피라고 할 수 있다. 보기 싫은 이미지 앞에서는 눈을 감을 수 있지만, 듣기 싫은 소리에 귀를 닫을 수는 없다.. ---p.37 시쇼프: (…) 편집에 정해진 규칙 같은 것은 없다. 한 가지 규칙이 있다면 편집에는 (이 규칙까지 포함해) 규칙이란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스스로 방향을 결정한다. 경험을 통해 영화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천천히 배우게 된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여정이다. 영화는 부분의 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p.40 고다르: 나는 항상 카메라를 직접 조작한다. 이는 필수적이다. 카메라 뒤에서 직접 촬영하는 것은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이다. (…) 카메라와 가까이 있기는 이 작업의 핵심과도 같다. 이는 이미지의 근원적 세포 같은 것이다. 비단 눈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접촉 상태, 즉 정신과 신체의 결합을 이룬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인지 카메라가 나를 들고 있는 것인지 혼동될 정도로, 카메라와 나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다. 촬영에서 이런 감각은 필수적이다. --- p.45~46 김선혁: (…)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리고 원하는 형태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 즉흥은 무계획이 아니다. 몸과 감각을 밀고 당기며 제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 p.51~52 고다르: 영화는 감정이나 생각, 혹은 사색 위에 정지된 시간이다. 이렇게 정지된 시간은 다시 움직이기 위해 사용된다. 즉, 영화는 움직임의 시작이다. ---p.53 뒤랑: 영화는 정말 거대한 기계다. 모든 참여자는 이 거대한 기계의 부분이다. ---p.58 음악은 ‘조직된 소리’일까, 혹은 소리 아닌 무언가를 조직하는 것으로도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p.62 내가 당신을 혼란스럽게 했다면, 당신은 내가 한 말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p.66 근본적으로 영화는 불확정을 향한다. 불확정성은 시간으로 인해 발생한다.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은 움직이고, 시간의 방향을 모르는 우리는 움직임의 방향 역시 확정할 수 없다. --- p.78~79 어디까지 기계고 어디서부터 신체인가? 어디까지 기계적이고 어디서부터 감각적인가? ---p.79 ‘촬영-춤’에서는, 장비와 액션이 춤의 직접적 재료가 되고, 촬영의 목적이었던 이미지는 ‘촬영-춤’의 흔적이 된다. ---p.83 어떤 이들에게 롱테이크는 특정 영화나 특정 장면이 아닌, 영화 자체가 지향해야 하는 기술이다. ---p.99 이미지의 촉감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점의 크기와 거리, 형태, 태도, 그리고 운동성이 결합된 복잡한 결과물이다. 그 상관관계가 부각될 때 이를 노이즈라 부른다. 어쩌면 이미지에서의 ‘신체성’이란 ‘노이즈’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겠다. 노이즈는 보려고 하면 아무리 미미해도 결국 보이지만, 안 보려고 하면 아무리 극심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나는 ‘노이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일부 품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작품마다 어떤 노이즈를 선택할지 고민한다. ---p.113 ‘기술’도, ‘기량’도, ‘또 다른 기술’도, 결국 모두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일종의 해석이다. 해석은 다양한 방향으로의 분화를 전제하며, 다양한 해석은 서로 어느 정도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해석은 늘 노이즈를 형성한다. ---p.133 퍼포먼스는 관객 참여를 통해 무대의 권위를 내려놓거나 예술가의 저자성을 해체하거나 관객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관객은 도구적으로 사용된다. 그에 비해 「동시, 퍼포먼스」는 관객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대신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참여하는 영리한 방식으로 관객을 개입시킨다. 작위적인 형태의 참여를 비판적으로 전유하고 자연스럽지만 필수적인 참여를 제안한다. 그렇기에 「동시, 퍼포먼스」는 매체를 반성하는 것으로서 미술이 된다. 이는 단지 어떤 아름다운 모습을 감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음악의 구조, 극장의 관습, 퍼포먼스의 문법을 재귀적으로 돌아보고 새로운 문법을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이 퍼포먼스는 일상적 사건과 구별된다. 크라우스가 말하듯이, 예술의 고유한 역할로서 매체를 탐구함으로써 자율성을 갖는다. ---p.144 영화가 이미지로서의 과거를 포획하여 노출한다면, 시는 말에 담긴 모든 관념으로서의 과거를 노출한다. 시는 읽는 이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를 영사해 보게 하고, 영화는 스크린에 빛을 영사해 보게 한다. 영화관의 관객들이 스크린 위에서 같은 이미지를 본다면, 시를 읽는 이들은 같은 시를 읽고도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를 본다. (…) 그러나 영화를 보는 이들은 정말 서로 같은 것을 볼까?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언제나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수십 개의 머리들이 같은 빛을 반사하는 스크린을 향해 있다 하더라도. 당신과 내가 곁에 앉아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므로 모든 보기는 시를 경유한 보기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p.151~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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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실천으로서의 ‘즉흥’
‘동시’의 개념에서 나아가 그 기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을 구체적으로 주목하며 펼쳐지는 『동시, 즉흥』에서, 기술이라는 개념은 예술 실천과 맞물리며 ‘즉흥’이라는 운동으로 발현된다. 오민은 동시대 예술 담론에서 여러 해석과 오해를 불러일으켜 온 기술을 철학자 육후이의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 예술 실천과 연결해 응답하려 시도한다. 목적 지향적 수단이나 일관성에 함몰되는 체계가 아닌,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으로서 변수를 받아들이는 열린 구성으로서의 기술. 오민에게 기술은 각 개체가 “위계 없이 관계 맺는 태도”에서 출발해 “차이와 유사를 인식하며 다층적 관계를 배열하는 문법”으로 작동하고, “발생한 변수에 응하며 스스로 생성을 지속하는 운동”이다. 오민의 「동시」 연작은 이러한 운동을 통해 여러 맥락이 얽힌 복합적인 생태계로서의 예술 작품으로 존재하고자 자신의 구성을 재배치하는 실험으로 생성의 기술을 탐구했다. 다양한 층위의 개체들이 서로의 이질성을 통과하면서 공통된 구조를 짜고, 변수를 동등하게 받아들이며 관계를 중첩하는 기술. 오민은 이러한 ‘동시’ 기술을 ‘즉흥’이라 일컫는데, 이 ‘즉흥’ 역시 앞선 ‘기술’과 같이 여러 해석과 오해를 벗어나 탐구되는 개념이다. ‘동시’ 기술로서의 ‘즉흥’은 오랜 시간 면밀히 구축된 구조의 안팎에 더해지는 변이이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막연한 자유로서 즉흥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 시간과 연습을 통과하며 갖춰져 온 구조적인 상황에서 변수가 발생했을 때 이를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운동의 방식이자 태도로서의 즉흥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로서의 ‘즉흥’은 “자발적 임시적 공생체”인 오민의 「동시」 연작에서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성을 지속하는 생태계로 존재하려는 예술 작품들에서 자연히 예술 실천으로 드러나게 된다. 『동시, 즉흥』은 이렇듯 기술과 예술 실천으로서의 ‘즉흥’을 시간을 통과하면서 직접 체득해 온 여러 목소리로 거듭 중첩해 말하면서, 우리가, 오늘날의 예술 작품들이 ‘동시’적 ‘즉흥’에 열린 상태로 작동해 가고 있는지 우회적으로 질문한다. 일회적이 아닌 동시다발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모든 측면, 모든 부분에서 서로 작용하고 반응”하는 “무한 집합”이 되어 가는, “‘되기’(becoming) 안에 서식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과정이자 결과. ‘동시’는 우리의 상태이며, ‘즉흥’은 우리에게 필요한 상태이자 누군가 이미 실천하고 있는 상태이다. ‘동시’적 ‘즉흥’은, 연습은, 실험은, 실천은, 운동은, 생성은 계속된다. 이 모두가 스스로 계속됨의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와 함께 질문과 답의 상태를 오가는 『동시, 즉흥』은 이러한 실천 실험의 여러 덩어리 중 하나로서 계속해서 열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