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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서로의 기척을 알아챈 순간, 두 아이와 개 한 마리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급히 물러나 바위 벽을 파고 들어갈 듯이 몸을 바짝 움츠렸다.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흰둥이가 고개를 돌려 소년에게 용기를 주듯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용기를 얻은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투누흐 우민이라고 해요. 사람이에요. 당신은 무엇인가요?” (…) 소녀가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두 아이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불꽃에 모였고, 이다스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깊은 계곡물 같은 눈동자를 봤고, 소녀는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그 털북숭이 작은 동물과 똑같은 눈동자를 봤다. 그 눈동자가 소녀에게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줬다. --- pp.23-25 “네가 자고 있을 때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어.” 소년은 어른들이 자신들을 찾아내면 어떻게 할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방법?” “이렇게 하면 네가 집에 조금 늦게 돌아갈 수 있어. 그 사람이 떠난 걸 확인한 뒤에 말이야.” “어떻게?” “우리가 서로 다른 길로 들어왔겠지?” “응. 아마도.” “그러니까 우린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거야.” “응.” “나는 네가 들어온 구멍으로 나갈게. 넌 내가 들어온 구멍으로 나가.” --- pp.26-27 거인은 개체의 상상이 아니라 집단적 상상에 의지해 존재한다. 일정 수의 집단이 함께 거인을 상상해야만 거인은 비로소 발을 들어 대지를 내디딜 수 있다. 따라서 인류가 거인족이 이미 멸했다고 믿고, 대다수 사람이 더는 거인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자 거인도 생명력을 잃었다. 그래서 거인이 인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이곳에 누워 몸을 숨기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들이 더는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아서 이곳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인지, 거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가 유일하게 아는 건 자신이 이미 매우 쇠약해졌으며 어쩌면,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더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어쨌든 요즘 그가 가장 자주 하는 일은 가만히 누워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장난기 가득한 거인이 넘쳐났던 그 시절을 말이다. --- p.130 차가 마을을 돌기 시작하자 경찰차 네댓 대가 조용히 그들을 에워쌌다. 마치 그들이 중요 인물이라도 되는 양 작은 용달차를 호위했다. 그들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일상적인 시위일 뿐이었다. 투누흐는 용달 짐칸에 선 아러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약간 격앙되어 미세하게 떨렸다. 그날은 확성기 소리를 듣고 나와 인사하는 마을 사람도 아주 적었다. 아니, 한 바퀴 한 바퀴 돌 때마다 점점 줄어들었다. (…) 아무도 이런 장면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러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고작 셋뿐이고, 그중 한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조수석에 앉아 있는 우민이다. 게다가 산도를 가진 사람은 투누흐 하나뿐이다. 이것은 초라한 숫자일까, 아니면 아주 큰 숫자일까? --- pp.291-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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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인들이 뽑은 ‘가장 팔고 싶은 책’ 1위
★★★오픈북어워드 ‘올해의 좋은책 상’ 수상 타이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우밍이의 최신 장편소설. 우밍이는 《도둑맞은 자전거》로 타이완 작가 최초로 맨부커상에 노미네이트되고, 《복안인》으로 프랑스 문학상 리브르 앵쉴레르 상을 수상하며 세계 무대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입증해온 작가이다. 신작 《해풍주점》은 현지 출간 후, 초판 1만 3천 권이 나오자마자 품절 대란을 빚었으며 당해 서점인들이 뽑은 ‘가장 팔고 싶은 책’ 1위, 오픈북어워드 ‘올해의 좋은책 상’을 휩쓸며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특유의 마술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유영해온 작가가 이번에 비추는 곳은 타이완 해변에 위치한 가상의 마을, ‘해풍촌’이다. 일본의 타이완 식민 통치 시기 강제로 이주해온 원주민들의 터전이자, 시멘트 공장 설립을 앞두고 도시인이 대거 유입되며 위기에 처한 공간이다. 소설은 우연한 계기로 이곳에서 만난 소년과 소녀의 순도 높은 구원 서사에서 출발해, 터전을 지키려는 소시민들의 연대,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굽어보는 신화적 존재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서정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가 너의 이름이 들리는 쪽으로 갈게 너는 내 이름이 들리는 쪽으로 가” 이야기는 해풍촌 원주민 소년 ‘투누흐’와 외지에서 흘러든 소녀 ‘수쯔’가 처음 만난 해풍촌의 한 동굴에서 막을 올린다. 개를 구하기 위해 동굴로 쫓아 들어온 소년과 어려운 형편으로 타지에 팔려 갈 처지에 놓인 소녀. 소년은 소녀를 안전한 해풍촌으로 보내고, 자신이 소녀의 마을로 향하기로 한다. “네 부모님의 화가 풀리고 널 팔아넘기지 않을 것 같으면 내가 우리 집이 어딘지 말할게. 그러면 네 부모님이 나를 우리 집에 데려다주러 갔다가 너를 찾게 되겠지.” 본문에서 그러나 끝내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다. 해풍촌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던 소녀는 낯선 곳에 홀로 있을 소년이 가여워 원래 마을로 돌아가고, 소년은 고향 어른들 손에 이끌려 해풍촌으로 돌아온다. 둘은 서로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움을 간직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이어간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수쯔가 다시 해풍촌을 찾는다. 이번에는 자신의 어린 딸 ‘샤오어우’와 함께. 딸의 손을 잡고 내린 기차역 앞에서 그는 어린 시절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투누흐를 발견한다. 단 하루로 평생을 견딜 빛을 나누는 것… 슬픔의 포말 위로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구원의 에피파니! 꿈처럼 스치고 사라진 온기를 잊지 못해 다시 해풍촌을 찾은 수쯔는 예전과 다른 풍경을 마주한다. 고급 세단을 타고 양복을 빼입은 사람들, 무작정 땅을 사들이는 외지인들. 마을에는 시멘트 공장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사람들은 투누흐를 주축 삼아 공장 설립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조직하고 투쟁에 나선다. 해풍촌을 지키려는 이들은 원주민만이 아니다. 전쟁에 휩쓸려 뜻하지 않게 타이완에 정착한 퇴역 군인, 여행 중 우연히 닿은 해풍촌에 마음을 빼앗겨 첫 발령지로 해풍 초등학교를 선택한 교사, 환경 연구차 해풍촌에 체류 중인 대학원생……. 그리고 이 중심에 수쯔의 가게 ‘해풍주점’이 있다. 수쯔는 자신이 예전의 그 소녀임을 숨긴 채, 마을 사람들이 싸울 힘을 잃지 않고 계속 뭉칠 수 있도록 해풍주점을 아지트처럼 내어주며 투누흐를 돕는다. “소설 속 해풍촌은 타이완의 살아있는 역사와 마술적 리얼리즘이 고도로 결합된, 다층적 진실을 품은 마법 같은 공간이다.” 투누흐와 수쯔의 만남부터 시멘트 공장 반대 시위까지, 해풍촌 사람들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현실의 서사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산의 형상으로 이곳에 숨어 사는 거인 ‘드나마이’의 신화적 시선이 지탱한다. 투누흐와 수쯔가 해풍촌 동굴에서 만나도록 이끈 존재이자, 도시화 개발을 명분으로 사람들이 깎고 부수는 산 그 자체인 거인은 서사 전면에 등장해 인간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그 옛날 거인과 인간이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했는지, 제 몸 위에 뿌리내리고 사는 동식물은 얼마나 다종다양한지, 인간이 다시 거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원주민 문화를 재현하는 데 앞장서온 작가가 부족민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 역시 돋보인다. 소설에는 특히 ‘트루쿠족’ 언어가 대거 등장하는데, 예컨대 ‘바키’와 ‘파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뜻하고, ‘부부’와 ‘타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타낸다. 낯선 언어가 주는 감각은 그들이 땅의 주인으로서 새겨온 고유한 정체성과 오랜 세월의 깊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타이완 문학의 자존심 우밍이 최신작 “올해 서점가에 남은 가장 눈부시고 찬란한 기록” 우밍이는 《해풍주점》 출간 후, 독립서점에 대한 응원과 지지의 마음을 담아 56일 동안 6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오가며 타이완 전역의 독립서점에서 총 86회의 북토크를 진행했다. 가오슝의 한 서점에서는 좌석이 오픈되자마자 표가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대기 수요로 인해 시스템이 마비될 정도였다. 성원에 힘입어 독립서점을 통한 도서 예약 주문량만 대형 체인서점의 3배를 웃돌았고, 서점 관계자들은 “이번만큼 대중적인 규모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성공한 사례는 역사상 처음”이라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 작가는 일상의 시간을 살고 남은 자투리 시간에만 글을 쓸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창작이 현실의 삶을 앞설 수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기에 일상의 책임을 다하며 토막토막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는 우밍이. 작가는 어려움 속에서도 “책은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아름다운 매개체”라는 믿음을 새기며 저마다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의 삶을 펼치고 엮어 《해풍주점》이라는 지도를 완성했다. 오픈북어워드는 소설을 ‘올해의 좋은책’ 상에 선정하며 “해풍촌 주민, 신화 속 거인의 기억과 꿈이 교차하며 만든 크로스오버적 시선과 촘촘한 서사망”이 빛난다는 심사평을 남겼다. 현실의 벽은 높고 두꺼우며 그 앞에 선 인간은 너무도 작고 유약하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은 마음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 깊숙이 각인된다. 불빛 한 점 없는 캄캄한 동굴 안에서 서로 손을 기꺼이 마주 잡으며 “우렁찬 기차 소리가 둘의 마음속을 지나”가는 순간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온 수쯔와 투누흐처럼, 독자 역시 《해풍주점》이 마음을 적시고 지나가는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