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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우리가 거기 있었지
김경호
그루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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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늘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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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5

1부 반가운 아침

반가운 아침 12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 14
벌천포에서 16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18
사과를 따며 19
늦은 봄날 20
화살나무 21
성글다 22
코앞 23
격포 적벽강에서 24
내소사 풍경 26
채석강 동백 28
곰소만 향단이 젓갈 30
북마산역 32
봄날 34

2부 죽파리 가는 길

죽파리의 끝 36
죽파리 가는 길 38
천리향 40
깡충거미 41
금광리에서 42
노가다라는 말 44
만지도 동백숲 46
몸꽃 48
배차적을 먹다 50
잔도棧道 같은 길을 52
둥지 54
악마들의 게임 55
키세스 군단 56
우울한 행성 58
우포늪에서 59

3부 늦은 눈발

늦은 눈발 62
나생이꽃 64
개진감자 66
물봉선 68
신신파스 30원, 왕자파스 100원 70
아버지의 싸리꽃 72
녹물에 젖네 74
띠띠미에서 76
세시화 78
시무나무 80
흰 제비꽃 82
왜 그랬는가 묻지 않았지 84
꽃구경 86
별일 88
안개에 반, 비 내리는 숲에 반 90

4부 우연히 우리가 거기 있었지

저 희끗희끗한 것들 94
그리운 사람 96
업는 일 98
고삐 100
어느 그늘 101
녹차라떼 무늬를 젓는 저녁 102
벚나무에 묶이다 104
분홍자전거 106
저녁 강변에서 108
축서사의 봄 110
모과와 청개구리 111
해보다 먼저 철근 다발이 떠오른다 112
풀이 눕는다 114
초록 한 마리 116
우연히 우리가 거기 있었지 118

해설|시인의 산문을 대신한 불친절한 시 읽기 안내서 122

저자 소개 1

1959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77년 〈영남일보〉, 198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 『봄날』 『길을 놓다』 『우연히 우리가 거기 있었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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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202g | 125*200*20mm
ISBN13
9788980695409

책 속으로

어릴 적 엄마 손잡고 고개 넘어
봉성 오일장 가던 날
고갯마루까지 따라온 꼬리 짧은 개를
집으로 돌아가라고 자꾸 쫓았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 개의 눈빛
장에서 돌아오니 개는 간데없고
그때부터 엄마 젖에서
쓴맛이 났다

산수유꽃 늦게 눈 뜨는 마을
띠띠미에 와서 젊은 엄마 생각하네,
엄마 없는 하늘 아래를 생각하네
언제쯤 엄마는 이 마을 다녀갔을까
뒷뜨미 언덕길 산수유꽃 보고 웃었을까

띠띠미 산수유꽃 고운 비탈밭 두렁마다
새로 난 달래, 쑥 냄새 향기로운데
머리 희끗한 한 사내
겨울 빈 강변 왜가리처럼 떠돌다
낯선 길 찾아와 걷네
쓴맛 나던 엄마 젖도
이제는 세상에 없네
--- 「띠띠미에서 전문」 중에서

어릴 적 시무나무 이파리 먹어보았네

“할머니 배가 고파요”
“그래, 기다려라 맛있는 떡 해줄게”
할머니는 내 키만 한 나무의 새순을 한 줌 훑어
밀가루로 버무려 쪄주셨다

가난과 허기에 시무룩하던 어린 시절
“할머니, 이건 무슨 나무예요?”
“그건 시무나무란다,
네가 어제 먹었던 그 밀가루떡”
나 이제 할머니 나이 되어
시무나무 이파리 다시 씹어보네
저 이파리 먹고 뼈가 여물고
머리도 하얗게 세었네
내 걱정 손금 자잘한 손바닥에 배인
우리 할머니, 까칠한 삼베 치마 냄새

엄마는 없고, 배만 자주 아프던 그 시절
시무나무 여린 새잎 피는 봄날들이
아프고 고픈 배 쓰다듬어 주었네
묘포장 일하고 오면
괴춤에서 알밤 꺼내주시던
우리 할머니, 거칠고 따뜻하던
그 약손이 그립네
--- 「시무나무 전문」 중에서

시린 밤하늘 멍하니 바라보다 돌아와
앉았다 일어서도 사진 속에서
무심한 너는 그냥 웃고 있네
캄캄한 하늘 지나온 눈발
간간이 바람에 날리는
정월 초이틀 낯선 도시에는
소리 없는 메아리만 떠돌고

어저께 잠시 잡아 본 손목 따뜻하더니
갑자기 떠나던 그날도 문득
말 없는 오빠, 생각났을까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 거실에
불 밝혀두겠지만

언 강물 풀리고
나무들은 꽃눈 향해 수액을 퍼 올리는데
그리운 두 살 적 엄마, 마른 젖 찾아
저 먼 별자리로 너는 떠나가고
갈 곳 모르는 늦은 눈발들이
차가운 새벽하늘을 오늘도 서성이고 있네
--- 「늦은 눈발 전문」 중에서

반주가 덜 깬 숙취와 아침잠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축축한 작업화에 부은 발을 밀어 넣는
여기는 서쪽 먼 바닷가의 새벽

며칠 전 쇳덩이 떨어진 발등을
작업반장이 사다 준 소염진통제로 달래고
몸이 무거워도 빠질 수 없는
일용이 감사한 일용의 하루

오늘 하루 쉬면 안 되나……
그러나 일용할 자리가 아쉬운
하루만 쓰다가 버려도 아깝지 않은

가라앉은 먼지가 다시 자욱해지는
철로가 시작되는 지하공간
사철 얼지 않는 물웅덩이 옆 공사장
진입로는 늘 먼 활주로 끝에 있고
일용직들 꾸역꾸역 숙소 나서는 길
탁상 위 일용할 약병들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서산 붉은 능선에 흰 보름달 걸려있던 곳
우연히 우리가 거기 있었지

--- 「우연히 우리가 거기 있었지 전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집 속 시편들을 줄 세워 놓으면 시인이 살아온 고뇌와 상처, 슬픔과 기쁨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나타나게 되지요. 돌아보니 즐거웠던 일보다 아프고 쓸쓸한 일들이 더 많았네요. 그래도 인간은 ‘망각’이라는 ‘당의정’을 가끔 섭취하면서 어제를 잊고 내일을 꿈꾸게 됩니다. 가뭄이 지나간 들판에 씨를 뿌리고, 나무 한 포기를 심으며, 꽃 피고 숲에서 새들이 깃들어 노래하는 상상을 하며 오늘 하루를 견디며 살아갑니다.

시집이랍시고 몇 년 만에 원고들을 모아 펼쳐 놓고 보니, 제 개인적인, 가슴 저 아래에 있던 것들을 날것으로 꺼내 놓은 남부끄러운 시편들이 태반입니다.

그래도 한두 편쯤은 독자들 마음에 가까이 가닿는 시가 있다면 오래 시를 사랑해온 사람으로서 너무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 「해설」 에서

추천평

김경호 시인의 시는 봄 비탈 밭두렁에서 피어난다. ‘띠띠미 산수유꽃’과 ‘달래, 쑥 향’에 취하고 ‘쓴맛 나던 엄마 젖’을 그리워하다, 이제는 세상에 없다는 자각에 눈물 흘린다. ‘시무나무 이파리, 아프고 고픈 배 쓰다듬어 주던 약손 같은’ 할머니에 대한 그리운 시편들이다. 편편이 시큰거리는 자작나무요, 졸고 있는 외딴집이다. 동시에, 힘든 세상사를 달래주는 묘한 진통제이기도 하다. 서산 붉은 능선에 걸린 흰 보름달이 위무를 선사하는…….

시인은 감정의 격정이 아닌 치유의 능력을 보여 주는 데 탁월한 재주를 드러낸다. 노래의 선율에 대한 후천적 허기와 박자에 대한 본능적 갈증이 뭔지 잘 알고 있다. ‘곽희 화법으로 그리면 곽희의 그림’이 되고 ‘이필 화법으로 그리면 이필의 그림’이 되는 법. 이를 자기 시작詩作의 근간으로 삼은 셈이다.
여기, 봄의 지상에 내려온 별빛이 그의 눈빛을 통해 빛나고 있다. - 김홍조 (시인)
아린 시간을 모로 돌아오느라 머리가 희끗해진 시인은 이제 희망을 생각합니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흩날리는 이파리처럼’ 누이를 잃고 제망매가를 부르던 시인 앞에 세 살 손녀가 찾아와 꽃을 내밉니다. 사위 환하게 장미 향기가 퍼져나갑니다. 폭설 내리던 겨울이 지나고 복수초가 얼굴을 내밉니다. 봄을 알리는 꽃들이 일제히 피어납니다. 시인은 다시 펜을 쥘 힘을 얻습니다. 절망, 아픔, 헤어짐… 그 뒤에 희망이 있음을 봅니다. 김경호의 시를 읽으며 절망과 희망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서로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있음을 생각합니다. - 김재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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