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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부 베를린, 이주자들의 도시로 환영반의 유령들 백번째 구직 두번째 대학 2부 인종차별주의자는 친절하다 말하는 입과 먹는 입 말하기를 배우다 이름을 빼앗긴 자, 존재도 빼앗긴다 3부 죽거나 쫓기거나 살아남거나 사건은 왜 항상 금요일 밤에 일어나는가 피난자의 집으로 들어가기 그 삶은 바다에서 끊긴다 4부 용기와 저항의 연대기 반항을 가르치는 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업 우리는 노래하기 위해 태어났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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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0에 나는 나를 이주시켰다. 이주 자체가 배움이었다.
--- p.8 출신 국가의 문화, 종교, 언어가 ‘다른 것’이 아니라 ‘열등한 것’ 혹은 ‘통합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지목되고 제거된다. 마치 독일의 환영반에서 크리스마스는 남고 무슬림의 기도는 금지됐던 것처럼. --- p.24 차별이 더이상 약점이 되지 않을 때 아이들은 말한다. 우리 아이의 지론에 따르면 차별에도 등급이 있어서 찌질한 싸움부터 선생님에게 꼭 알려야 하는 차별까지 다양하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다면 아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 p.30 비자 없는 디아스포라를 위한 단체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내가 딸을 데리고 거기 입소해야 할 판이었다. --- p.48 모국어의 세계에서 자식에게 전지전능한 존재였던 부모들은 피난지에선 입이 닫히고 손이 묶인다. 이민 1.5세대인 아이들은 양손이 결박된 부모의 입이 되곤 한다. --- p.78 ‘다르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독일 사회 언저리에서 늘 쫓겨날 위험에 처한 삶이라고 해야 한다. --- p.81 경비원은 “여기서 썩 나가. 너희들의 카나켄 블록으로 꺼져!” 하고 소리친다. 카나케(Kanake)는 독일 내 이주자들을 비하하는 표현이고 카나켄 블록은 그들이 사는 낙후하고 고립된 동네를 부르는 말이다. 독일에 몇년을 살든, 심지어 독일에서 태어났더라도 그들은 언제까지나 카나케고 그들이 사는 동네는 카나켄 블록, ‘외노자 구역’일 뿐이다. --- p.82 고향의 맛이 그리워서만은 아니다. 이주자에게 부엌은 집 밖에서 실현할 길 없는 자존을 되찾는 공간이다. --- p.94 아주 드물지만 서로를 초대할 때면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이주자들이 불완전한 독일어나 영어 대신 모국어가 발효된 음식을 나눈다. 까다로운 향신료들이 서로 섞여 이상한 냄새를 풍기지만 우리는 서로를 먹인다. 더, 더 먹으라고 늘 서로를 격려한다. --- p.98 언젠가 슈퍼마켓 계산대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어떤 남자가 갑자기 “너는 예쁘지만 피부색이 문제”라고 했다. 수십년 전 잠깐 뉴욕에 있었을 때는 거리에서 교회 성가대 같은 옷을 입은 한 흑인 여자가 나를 붙들고 “네가 그렇게 태어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닌 조상들의 잘못”이라고 한 일도 있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친절하다. 내가 혹시 이해하지 못했을까봐, 그 때문에 태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것일까봐 큰 목소리로 여러번 되풀이해서 말해준다. --- p.120 “동생이 몇살인데 세탁 세제를 먹었어?” 그런데 11개월이라는 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던져버렸다. 아기는 여러차례 토하고 계속 울고 있다고 했다. 옥사나는 독일에 온 지 몇년 됐지만 독일어를 잘 못해서 우리는 번역기와 떠듬거리는 독일어로 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구급차를 불렀다. --- p.151 아아, 옥사나 너는 왜 이제야 이걸 가지고 왔을까. 폴리나와 옐레나는 왜 목요일에 묻지 않았을까. 당신들은 왜 꼭 금요일 오후에, 내가 혼자 있을 때 오는 것일까. --- p.154 공동숙소는 기다리는 곳이다. 많은 피난자들이 편지만 기다리며 산다. --- p.171 인터넷 댓글에서 지중해에서 많은 피난자들이 사망한 것을 두고 “지중해를 칭찬해야 한다. 가장 많은 피난자를 수용한 곳이니까”라고 하기도 한다. --- p.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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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 접고 나이 오십에 이주한 베를린
‘아시아인다움’ ‘여자다움’ ‘이주자다움’을 넘어 유력 일간지에서 18년 동안 일하며 언론상을 수상하고 전국부 데스크까지 지낸 베테랑 기자. 남들이 보기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듯했던 인생 제1막을 정리하자마자 아슬아슬 줄타기의 연속인 인생 제2막이 시작되었다. 21세기 지구에서 가장 ‘힙한’ 도시, 시민 3명 중 2명이 도시 밖에서 온 이주자들의 거처, 대규모 난민 유입으로 도시 인구가 가장 빠르게 늘고 있는 곳, 베를린. 기자 시절, 난민 정책을 주제로 베를린에 연수를 왔던 저자는 “다문화사회를 향해 열렸던 독일 사회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9면)고 믿고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주자들의 도시라고 해서 이주자를 환대하리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인종·나이·성별에 따른 차별과 독일어 특유의 언어 장벽, 극우 세력의 득세까지 어느 하나 호의적인 환경이 없었다. “너는 예쁘지만 피부색이 문제” “네가 그렇게 태어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닌 조상들의 잘못”(120면)이라며 친절하고도 노골적인 차별의 얼굴들을 마주치기 일쑤였다. 마침내 저자는 자신과 같은 이주자를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독일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한다. 뒤늦은 이주와 공부는 아시아인다움, 여자다움, 이주자다움 등 온갖 ‘~다움’을 넘어 자신만의 언어와 경험을 지닌 존재로 저자를 거듭나게 했다. 그것은 편견과 무지에 부닥치는 과정이자 “나 자신을 다시 쓰는 일”(72면)이었다. “여기서 썩 나가. 너희들 구역으로 꺼져!” 가난하고 못 배운 ‘나쁜 이주자’를 색출하는 극우 낯선 이주 생활에 적응하면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것은 이주자 통합을 표방하는 독일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주 배경 아이들의 독일 사회 통합을 돕기 위해 설치된 ‘환영반’의 실상이 대표적이다. 환영한다는 뜻으로 이름 붙은 곳이지만, 환영반에 편성된 저자의 중등학생 딸은 학교에서 독일어 교육을 받는 대신 이불·옷가지 등의 구호품만 제공받고 돌아오는 날이 잦았다. 출신 환경과 사용 언어가 서로 다른 아이들을 그저 한데 묶어두기만 한 결과였다. 제대로 된 수업이 운영되지 않는 교실의 문은 곧잘 잠기곤 했고, 갈 곳 없는 이주 배경 아이들은 불 꺼진 창고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진짜 독일 아이들”(22면)이 속한 정규반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이자 사회복지학과 학생으로서 지켜본 독일의 환영반 제도는 선의가 낳은 실패작이었고 차별과 배제의 온상이었다. 중동 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난민과 이주자가 급증하면서 베를린에는 외국인 혐오 정서와 이를 앞세운 극우 세력이 강력하게 부상했다. 독일을위한대안당(AfD) 등 극우·보수 정당들은 독일어 구사력과 경제적 효용가치를 기준으로 ‘좋은/나쁜’ 외국인을 가르고 ‘게으르고 무능하며 독일 사회복지를 갉아먹는 이주자’ 이미지를 선동한다. 유럽의 학계에선 차별과 비하의 맥락을 지니게 된 ‘난민’이라는 표현 대신 ‘피난자’로 쓰기를 주장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지만, 이름이 바뀐다고 인식까지 바뀌지는 않는다. 여전히 독일의 이주청은 가난하고 못 배운 이주자들을 색출하는 공간이다. 저자가 딸과 함께 비자를 받기 위해 이주청에 갔을 때 그 자신도 이주자인 이주청 직원은 모녀에게 “난 너희 같은 사람들을 알아. (…) 네 엄마는 그냥 너를 독일 대학에서 공짜로 공부시키려고 이러는 거지.”(83면)라며 폭언을 던진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영국에서는 이주자들을 추방하자는 시위가 일어나고, 유럽 각국에서는 극우 포퓰리스트가 집권했으며, 유럽연합은 점차 무기력해지고 있다. 저자는 독일 사회의 일선에서 퇴보하는 유럽의 이면을 목격하고 그 실황을 꼼꼼하게 기록해냈다. 금요일 밤마다 만나게 된 ‘쓸모없는 사회복지사’와 ‘주변부 인간들’ 피난자의 삶을 현장에서 맞닥뜨린 것은 사회복지학과 실습생으로 난민 공동숙소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처음에 저자는 숙소 입주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목숨 걸고 피난 와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지, 왜 아프다면서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하는지. 독일어도 실무 경험도 부족한 “쓸모없는 사회복지사”(162면)로서 떠듬거리며 번역기를 돌리고 머리를 싸맨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는 독일 관청의 각종 허가를 받기 위해 무한 대기 상태로 사는 삶의 곤경을, 매일 경찰차나 구급차 사이렌이 울리는 동네에서 피난자 신분으로 사는 불안을,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독일의 국경을 넘지 못한 ‘주변부 인간’으로서의 삶을. 고향에서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경험을 안고 죽을 고비를 넘어 도착한 피난자들을 가까이 접하면서 저자는 점점 더 마음을 기울여 이들을 돕는다. 독일어 학원에 가라고, 병원 예약에 늦지 말라고 잔소리하며 귀찮게 하고 쫓아다닌다. 그러다 보면 피난자들이 스스로의 존엄을 빛내는 순간들을 만나기도 한다. 독일인이라면 응당 받을 공공서비스를 제공받고는 자신의 명예를 지켜주어 고맙다며 몇시간치 급여를 털어 저자에게 건넬 꽃을 사오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 날 가슴이 꽃으로 가득 찬 것 같”(161면)았다. 금요일 밤, 정규직 직원들은 퇴근하고 실습생만이 공동숙소 사무실을 지키는 시간, 피난자들에게는 더이상 문제 해결을 미룰 수 없는 마지노선에 내몰린 시간, 절박하게 하소연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내달리는 풋내기 사회복지사의 진심은 그런 것이다. 함께 밥을 나누고 곁을 내어주는 일 미친 세계에 저항하는 단순하고도 꿋꿋한 연대 최근 독일에서는 이주자와 피난자를 겨냥한 공격이 심상찮다. “돈만 축내는 돼지새끼들” “너희 나라로 꺼져”와 같은 낙서 테러는 흔한 일이 되었고, 피난자 집단 거주지에 불을 지르고 나치 표식인 하켄크로이츠를 그려두기도 한다. 2025년 3월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난민 숙소를 습격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주자를 향한 혐오와 폭력은 날이 갈수록 격해지고 ‘일상화’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주자들의 공동체에서 피어오르는 연대와 돌봄의 불씨를 발견한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이주자들은 이따금 서로를 초대해 고향 음식을 나눠 먹는다. “까다로운 향신료들이 섞여 이상한 냄새를 풍기지만” 서로를 먹이고, “더, 더 먹으라고”(이상 98면) 서로를 격려하고, 저마다 고향 음식을 자랑하며 자존을 되찾는다. 이주민·피난자·현지인이 함께 교류하는 작은 동네 모임을 열기도 하고, 팬데믹 때는 이웃끼리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전화번호 쪽지를 문틈으로 주고받기도 했다. 타인을 염려하는 마음과 격려하는 행동들이 모여 작지만 단단한 연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로를 먹이고 환대하는 이 단순하고도 꿋꿋한 돌봄은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라는 이 미친 세계에 저항할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실천이 된다. 차별과 폭거가 늘어만 가는 시대, “우리의 정신이 시들지 않는 것은 이런 책 덕분”이라는 철학자 고병권의 추천사처럼 극우의 부상과 이주 배경 인구의 확산을 동시에 마주한 한국 사회에 이 책이 전하는 돌봄과 연대의 이야기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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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의 언론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귀화한 내게, 독일을 비롯한 유럽 세계의 퇴행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50대의 나이에 자발적으로 고생길을 선택한 한국 여성의 삶이었다. 늦깎이 이주자 신분으로 사회복지사 일을 배우며 저자가 겪는 다이내믹한 사건들은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면서도 값진 일인지 몸소 보여준다. 난민과 이민자를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이 급변하는 지금, 이제 막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주는 책으로 적극 추천한다. - 알파고 시나씨 (중동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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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온통 낯선 사람들 속에서 하필 금요일 밤에 사건이 나면 누가 나를 도와줄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할까? 낯섦 속에 던져져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수없이 많은 이유로 이 용감한 책을 권하고 싶다. 저자는 낯선 곳에서 (그야말로 ‘내 코가 석자’인 와중에) 너무나 아름답게 관계를 맺고 연결되었다. 이 연결이 이 책의 아주 큰 힘이다. 이 책 덕분에 우리는 더 잘 연결되고 더 용기 있어지고 더 잘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 정혜윤 (작가,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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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업’. 저자가 한 편의 글에 단 제목이지만 내게는 이 책 전체가 그렇다. 독일로 이주해서 뒤늦게 시작했다는 공부. 그런데 나는 그가 이주한 곳이 독일이 아니라 국경임을 깨닫는다. 어느 나라든 그곳에서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의 공간 말이다. 이곳에서 이주자와 피난자, 기독교도와 무슬림, 장애인과 여성, 과거와 현재는 서로를 돌본다. 환영한다는 문구 아래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이들의 말은 소리 없이 반짝이고 숨죽인 노래는 온기를 전한다. 권력이 추방하고 언어가 침묵하고 역사가 망각하는 이들에게 배우는 수업. 우리의 정신이 시들지 않는 것은 이런 책 덕분이다. - 고병권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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