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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작품 해설 옮긴이의 말 아베 코보 연보 |
Kobo Abe,あべ こうぼう,安部 公房,본명 : 아베 기미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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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악취가 자욱한, 죽어 있는 방.
---p.7 ·육체를 옷으로 덮은 것이 문명의 진보라면, 앞으로 복면이 상식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p.19~20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간이라는 존재 속에서 얼굴 따위가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할 리가 없다. 인간의 무게는 어디까지나 그 일의 내용으로 평가되어야 하며, 그것은 대뇌 피질과 관계될 수는 있어도 얼굴이 참견할 여지는 없는 세계다. 고작 얼굴의 상실 때문에 저울의 눈금에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내용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p.22 ·표정 근육의 해부도를 참조하면서 점토의 얇은 조각을 한 장 한 장씩 정성껏 쌓아가는 작업은 마치 한 사람의 탄생을 내부에서 참관하는 듯한 극적인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p.75 ·하지만 거머리에 마구 뜯어 먹혀 구멍이 나버린 얼굴 잔해를 떠올리는 순간, 나는 얼굴에 어떤 의미도 일절 부여하지 않겠다고, 흠뻑 젖은 개처럼 거칠게 몸을 떨었다. ---p.84 ·길 가는 사람들은 서로 타인일 텐데, 마치 유기 화합물처럼 단단하게 자물쇠를 채워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곤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검증을 마친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뿐인데 그것이 그렇게도 강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걸까. ---p.97 ·아무리 일요일의 마지막 혼잡이라 하더라도 일단 군중을 이루면 그들의 얼굴은 아메바처럼 서로 다리를 뻗쳐 사슬을 만들어버려 내가 끼어들 여지 같은 건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p.117 ·나에게 당신은 역시 뭐라 해도 타인 제1호다. (…) 우선 가장 먼저 통로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 첫 번째 편지에 이름을 써넣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 그런 의미에서 가장 대표적 타인이다. ·만일 우리가 사고 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정도로 제각각이었다면 이제 와서 새삼 가면 소동까지 벌이면서 무엇을 되찾겠다는 것일까. ---p.128~129 ·당신에게 천 가지 표정이 있다고 하면 내게는 하나의 얼굴조차 없다. ---p.133 ·이런 식으로 내 내부에서는 당신과 나 사이의 통로를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와 반대로 당신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복수심이 서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p.134 ·자, 나가보자! 새로운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새로운 타인의 세계로 나가보자! ---p.150 ·아무래도 가면은 무사히 내 얼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p.156 ·아무래도 가면은 내 의도 같은 건 뒷전에 두고 제 마음대로 걷기 시작한 듯했다. ---p.158 ·가면이란 녀석은 일부러 주머니 위로 단단한 감촉을 두드려보기도 하면서 나의 당혹스러움을 비웃으며 즐기고 있었다. ---p.179 ·나는 나 자신과 가면이 이렇게까지 분열되어버린 것에 참을 수 없는 황폐함을 느꼈다. ---p.200 ·질서다, 관례다, 법도다 하며 아무리 거품 물며 외쳐댄들 결국은 맨얼굴이라고 하는 아주 얇은 가죽 한 장으로 지탱하고 있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p.223~224 ·내가 타인의 가면을 쓴 별종 인간이라면, 당신은 당신의 가면을 쓴 별종 인간이다. 자기 자신의 가면을 쓴 별종 인간……. ---p.269 ·모처럼 가면을 쓰고 통로를 열어 당신을 맞아들인 셈이었는데 당신은 나를 지나쳐 어느새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가면을 쓰기 전과 마찬가지로 고독한 채로 남겨져버렸다. ---p.283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 가면이 약이 올라 악착같이 기를 쓰고 성채를 부수려고 하는데, 당신은 성채에 손조차 대지 않고 슬쩍 울타리를 빠져나가버렸다. 바람이거나 아니면 귀신처럼……. 나로서는 당신을 잘 모르겠다. 더 당신을 시험하려고 든다면 언젠가 자멸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 ---p.284 ·가면은 이미 당신을 되돌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당신의 배반을 확인하기 위한 몰래카메라가 되고 있었다. ---p.301 ·당신이 당신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요? ---p.319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 내가 아니라 거울입니다. 어떤 타인도 당신에게는 어쨌든 자기를 비추는 거울밖엔 안 되니까요. ---p.322 ·이건 마치 불알도 없는 주제에 관념적인 성욕만 왕성한 추잡한 성불구자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p.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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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천 가지 표정이 있다고 하면
내게는 하나의 얼굴조차 없다.” ‘일본의 카프카’이자 ‘무국적의 작가’ 아베 코보 얼굴을 잃어버린 남자의 집요한 사색을 경유해 소외와 소통의 구불구불한 미로를 탐색하다 1960년대에 잇달아 발표한 ‘실종 삼부작’으로 단번에 세계적 작가로 거듭난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타인의 얼굴』, 『불타버린 지도』로 이어지는 실종 삼부작은 대도시의 익명성이라는 시대적 조건이 출연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에 천착한다. 거대한 변화의 초창기에 발생한 혼란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파고든 것이다. 아베 코보는 실종 삼부작 이후 ‘일본의 카프카’, ‘무국적의 작가’로 불리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줄곧 언급되었고,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세계 10대 문제 작가에 꼽히는 등 전후 일본 문학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새로운 표지의 개정판으로 출간된 『타인의 얼굴』은 그중에서도 ‘얼굴’이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뤄 전후 일본과 현대 사회의 소외, 소통 문제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화자는 실험 중 사고로 얼굴을 잃은 남자다. 그의 얼굴에는 끔찍한 켈로이드 흉터만이 가득하다. 얼굴 말고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남자가 모든 것을 잃었다고 확신한다.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은 그의 얼굴을 보면 울음을 터뜨리고, 직장 동료와 친구들도 변화한 그의 얼굴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한다. 무엇보다도 아내와의 관계가 문제다. 아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하게 그를 대한다. 그러나 화자는 ‘얼굴’로만 사람들의 가치를 매기고 소통하는 사회의 분위기에 저항하고자 하면서도, 정작 아내가 자신을 이전과 같이 대하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아내가 일부러 자신을 향한 거리감을 숨기려 든다고 여긴다. 얼굴에 부여된 과도한 사회적 의미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사고 당사자조차, 얼굴의 무거운 의미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의 또 다른 대표작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긴 ‘실종 삼부작’의 두 번째 작품 아베 코보는 얼굴 잃은 남자의 간절함과 자기 구원 욕망으로 가득 찬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현대 사회에서 얼굴이 갖는 의미와 소통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얼굴만이 소통의 통로라면, 현대인은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과는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걸까? 얼굴 없는 사람이 받는 차별은 흑인이나 소수 민족이 받는 집단적 차별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무엇보다, 대도시를 지배하는 유행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과연 얼굴이란 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꾸민 채 거리를 배회하는데, 여기에 도대체 고유한 소통의 통로인 ‘얼굴’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얼굴과 본질, 소통의 의미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화자는 얼굴에 관한 자기만의 비판적 사유를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온전한 얼굴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가면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지난하고 신중한 실험 끝에, 마침내 남자는 남들을 감쪽같이 속일 만한 가면을 만드는 데 성공하고, 다시금 용기를 갖고 세상으로 나갈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나 이후에도 혼란은 지속된다. 남들이 가면이 가면인 걸 못 알아보는 데 희열을 느끼면서도,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일 수는 없다는 자조에 괴로워하는 식이다. 무엇보다, 남자는 가면에 점차로 별도의 인격이 생겨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란다. 가면은 화자가 이전에는 절대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대범하게 저지르고도 태연자약하게 굴 수 있는 빌미가 되어준다. 남자는 그런 가면에 이끌려 과감한 행동을 일삼는데, 여기에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가면을 벗는 대신 은근히 가면을 부추긴다. 대도시의 집단적 행동 규칙을 위반하는 폭력적 행위와 사유에 몸을 맡기며 점차로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 선정 세계 10대 문제 작가 아베 코보, 얼굴과 가면의 불분명한 경계를 파고들다 얼굴과 가면에 대한 남자의 실험은 가장 과감한 데로 나아간다. 사고 이후 관계가 소원해진 아내에게 가면을 쓰고 접근해 유혹해보려는 것. 가면을 통해 가장 친밀한 타자인 아내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사고 이후 끊겨버린 현대 사회와의 전면적인 연결도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 번 남자는 자기 모순적 딜레마에 빠진다. 남자는 아내가 가면의 유혹에 응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발생하면서 이 감정은 더욱 극대화된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가면이 하자는 대로 이끌리는 아내에 대한 도덕적 단죄가 남자의 상상 속에서 무수히 벌어진다. 가면은 자신이 도시의 인파 속에서 공격적으로 펼쳐낸 성적 충동은 까맣게 잊고, 모든 도덕적 책임을 아내에게 떠넘기려고만 한다. 이 모든 실험을 마친 화자는 지금까지의 기록을 세 권의 노트에 나눠 정리한다. 사고 발생 이후 남자가 가면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 방법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노트, 가면 제작기를 담은 노트, 가면 완성 후 겪는 자아의 혼란과 아내를 유혹하는 사건을 담은 노트. 남자는 이 모든 노트를 자신의 비밀 아지트에 남겨두고, 아내를 이곳에 초대한다. 그러고는 아내가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만히 아내를 기다리기로 한다. 얼굴, 타자, 소외, 소통의 사유 끝에 도달한 충격적인 반전! 그러나 충격적인 반전이 있다. 아내는 처음부터 가면이 남편이라는 걸 알았다. 일부러 모른 채 남편의 가면 놀이에 응해줬을 뿐이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한 남편의 비난을 받아친다. 비극적 사고에 사로잡혀 자신을 꼼짝 못 하게 한 것은 남편인데도 그 탓을 자신에게만 돌리는 남편에게 치를 떨며 영원한 결별을 통보한다. 혼자 남겨진 화자는 순식간에 바보가 되고 만다. ‘관념적인 성욕만 왕성한 추잡한 성불구자’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타인과의 연결을 회복하기 위한 가면의 실험은 철저한 실패다. 가면의 촌극은 ‘잃어버린 연결’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일깨운다. 익명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대도시에는 이미 회복할 관계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친밀한 대상인 아내와의 관계도 이런 꼴이라면, 남자가 얼굴 없는 설움과 좌절, 열등감에 휩싸여 그토록 복구하고자 했던 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이 아베 코보가 전후 일본과 현대 사회에 편재한 소외와 소통의 부재를 고발하는 방식이다. ‘얼굴’의 중요성과 가치가 더해지는 시대,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아베 코보의 성찰 아베 코보의 또 다른 대표작 『모래의 여자』가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활용해 ‘실종’의 문제를 다룬다면, 『타인의 얼굴』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천착해 사유의 미로를 펼쳐놓는다. 그리고 그 미로의 끝에 모든 것을 단번에 비트는 반전을 마련해둔다. 얼굴을 잃는 데서 오는 보편적 공포에 착안하여 서서히 문제의식을 고조시키다가, 최후에는 잃어버릴 얼굴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선포함으로써 독자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것이다. 지금도 ‘얼굴’은 타인과 대면하는 첫 번째 관문이고, 대도시에서 얼굴 관리의 중요성은 더더욱 커지고 있다. 소설 속 화자가 가면을 만드는 행위를 오늘날의 성형 수술과 꾸밈 노동으로 치환해도 별 위화감이 없을 것이다. 소설 속 화자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여전히 ‘얼굴’과 ‘가면’의 모순적인 이분법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을 여전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