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한국어판 저자 서문 · 5
들어가는 말 | 근대적 배설성과 포스트콜로닉 생명정치 · 17 1장 하수 파놉티콘 35 화장실에 관한 서류 작업 · 42 대변, 감염병의 감시병 · 53 진화하는 하수 감시 · 58 똥을 똥이라 부르지 못하고 · 63 2장 배설한다, 고로 존재한다? 69 똥의 소멸과 근대적 인간의 탄생 · 75 항문이라는 지적 전쟁터 · 81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 90 억압된 똥의 귀환 · 99 3장 식민화/콜론화된 세계 103 배설 식민주의 · 112 화장실, 근대성의 실험대? · 117 변소세의 도래 · 126 똥은 어떻게 물신화된 상품이 되는가 · 132 4장 똥의 힘 137 문학의 배설적 상상력 · 143 탈-식민화/탈-콜론화의 불가능성 · 151 인류학의 똥 구출 작전? · 155 똥을 선망하는 예술 · 167 형언 불가능한 불결의 공포 · 175 5장 장의 감각과 암흑의 대륙들 181 변비 걸린 근대성의 유독한 망령 · 190 똥과의 공생은 가능한가 · 202 야생으로의 회귀? · 210 예외상태의 똥이라는 역설 · 226 나가는 말 | 거꾸로 뒤집힌 존재 · 231 감사의 말 · 241 미주 · 247 옮긴이 해제 · 279 |
워릭 앤더슨의 다른 상품
황정하의 다른 상품
이종식의 다른 상품
|
“더러움에 끈질기게 매혹된 채, 우리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을 안락하게 재현할 방도를, 비천한 것을 안전하게 멀찍이 떨어뜨려놓으면서도 스펙터클로 만들 방도를 끊임없이 찾아낸다. 하수역학과 장내미생물군도 그렇게 정당화된다.”
--- pp.9-10 “똥은 위험과 무질서의 감각을, 개방된 구멍과 침투 가능한 경계에 대한 인식을, 신체의 온전성과 안전성에 대한 상시적인 위협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 p.25 “하수역학과 인간의 장내미생물에 관한 분자 수준의 연구, 각종 사회이론, 정신분석학, 철학, 인류학, 문학, 예술은 일종의 액막이 장르이자, 지각된 배설물의 위협을 물리치는 양태이자, 배설물이 유발할 수 있다고 상정된 문제들에 대항하는 주술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 pp.26-27 “똥을 승화시키거나 방출시키기 위한 우리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똥은 계속해서 되돌아와 우리의 엉덩이를 물어뜯는다. 추방하거나 기록함으로써 안전한 물체로 둔갑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똥은 여전히 ‘비천한abject’ 모습으로 남아 있다.” --- p.28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 p.98 “밀폐된 장소에서 이뤄지는 적절한 배변이 위생적 시민권 혹은 그러한 시민권을 얻을 자격과 끊임없이 결부되었던 것처럼, 변소 건설 역시 끊임없이 근대화와 결부되었다.” --- p.130 “나는 ‘괄약근의 변증법’을 구성하는 대립적 요소들(배출-잔류, 순결-위험, 면역-오염/감염)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변소와 화장실을 통해서도 억누르거나 제거될 수 없고, 승화되거나 지워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이다. 계속해서 돌아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똥,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워지지 않거나 애초 지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속옷의 얼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p.142 “궁극적으로는 그 누구도 서서히 엄습해오는 배설물의 기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살펴보았듯, 반드시 식민지의 피지배자만이 배설물이라는 객체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20세기를 거치면서 백인들 그리고 새롭게 ‘문명화된’ 이들은 반복적으로, 혹은 마지 못해 스스로를 식민화/콜론화하는 과정으로 되돌아갔다. 배설물의 완고한 귀환은 우리로 하여금 탈식민주의적 한계 경험에 직면하게 만든다.” --- p.237 |
|
똥 참는 존재, 똥 같은 존재: 근대적 이분법과 식민화/콜론화의 욕망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근대적이고 문명화된 존재로 믿기 위해 그와 완전히 상반되는 물질인 배설물에 대한 사유를 반드시, 그리고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 점에서 배설은 우리를 ‘근대적’ 인간으로 만든다.” ‘배설 식민주의excremental colonialism’라는 저자의 용어가 시사하듯, ‘똥의 배제’를 통한 근대화는 특정 집단과 인종을 배설물과 결부시켜 타자화하는 ‘배제의 정치학’을 동반했다. 위생-오염, 순결-위험, 문명-자연, 근대-원시, 백색-갈색 따위의 이분법 속에서 부정적이거나 열등한 극단에 해당되는 것들은 타 인종에게 폭력적으로 투사되었고, 그들은 똥과 결부된 더럽고 위험한 존재로 규정되었다. 저자는 ‘식민화’를 뜻하는 ‘colonize’의 어근인 ‘colon’이 ‘결장’(대장)이라는 뜻을 지닌다는 데 착안하여, ‘colonize’ 자체를 ‘식민화/콜론화’로 중의적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콜론화란 쉽게 말해 어떤 존재를 ‘결장’으로, 즉 ‘똥’과 결부된 대상으로 환원하고 낙인찍는 실천을 가리킨다. 또한 저자는 식민화/식민주의를 “공식적인 제국주의 체제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외양을 갖춘 다른 모든 형태의 권력적 불균형과 정치적 비대칭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프로젝트로 해석하고자 한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비롯해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 정신분석학자 쥘리아 크리스테바 등의 글을 읽다 보면, 20세기 사회이론을 쌓아 올린 요소들 거의 전부가 똥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슬로터다이크는 근대성의 등장을 자신의 배설물에서 도망치려는 도시인의 필사적 욕구와 연결지었다. “그들에게 도시라는 공간의 본질과 변소의 규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문명은 똥에 대한 억압, 그로부터의 거리두기와 탈취, 비천함의 승화를 요구했다. 여기서 저자는 변소, 즉 화장실로 상징되는 위생 혹은 면역적 관계가 기술적·법적·정치적인 구조로 실현될 때 근대성의 요건이 충족된다고 보는 슬로터다이크의 논의를 비틀고, 브뤼노 라투르의 통찰을 도입해 그 실천들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에 주목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라투르의 유명한 통찰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인간-비인간 집합체와 네트워크 개념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라투르) 역시 대부분 똥에 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이루는 오물, 우리 안의 감염,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근대성을 가로막는 것들 말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똥의 배제’를 통한 근대화는 특정 집단과 인종을 배설물과 결부시켜 타자화하는 ‘배제의 정치학’을 동반하기도 했다. 일례로, 20세기 필리핀에서 식민 통치를 확립한 미국의 식민지 보건 관료들은 자신들이 “불결하거나 유해하다”고 여긴 배설 관습을 근거로 필리핀인들의 신체를 배설물과 동일시하며 낙인찍고 규율했다. 이는 “깨끗함에 대한 집착과 그 위태로움 사이의 복잡하고 불균형한 긴장관계”가 피식민자들에게 어떻게 전이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의 석유왕’이라 불리는 J. D. 록펠러가 설립한 록펠러재단은 이른바 ‘저개발국가들’ 곳곳에 변소를 설치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변소 열풍’을 주도하고 ‘변소세Latrinocene’를 열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수천 개, 수백만 개의 변소가 식민지 곳곳에 생겨나 적도를 둘러쌀 정도였으며, 이런 사업은 “사회의학” 혹은 “농촌 위생”으로 불리기도 했다. 위생 소외 계층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는 작업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이 대대적인 변소 건설은 실상 “고귀한 존재인 백인들”을 열등한 존재인 흑인, 유색인의 더러운 배설물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세균 및 기생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록펠러재단, 국제연맹보건기구를 비롯한 “20세기의 국제기구들은 변소와 하수도가 (...) 백인성의 경계를 확장하여 유색인들을 거의 ‘백인’에 가깝 게 만들되, 결코 완벽한 백인이 되지는 못하도록 작용하는 핵심 기술이 되도록 했다”. 진짜 똥은 어디에 있는가: ‘똥 구출 작전’의 역설 그러나 배척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똥과의 거리두기는 언제나 실패하기 마련이다. 저자가 라투르의 유명한 구절을 빌려 말하듯, 우리는 “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똥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 온갖 기술과 인프라, 주문呪文을 고안해내지만, 똥은 끝끝내 되돌아와 오염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자아낸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우리의 결장 속에 똥을 지니고 있다는 것, 매 순간 배 속에서 똥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우리는 ‘과학’과 ‘예술’의 이름으로 똥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핵심적인 감염병 감시 수단으로 자리 잡은 하수역학(분변 표본에서 바이러스의 흔적을 검출할 수 있고, 따라서 하수 모니터링이 각종 감염병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조기 경보 신호’를 제공한다는 분석에 기반한다)이나, 장내미생물군 연구 혹은 저자가 ‘원기 회복의 인류학’으로 지칭하는 분변 이식술, 대변 캡슐, 대변을 사용한 관장액 등은 똥이 지닌 새로운 생의학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굴했고, 이로써 똥은 오랜 낙인과 오명을 벗고 사람들을 매료시키기 시작했다. 현대 인류학 역시 아프리카, 남아시아(인도) 등의 여러 지역에서 원시사회를 중심으로 똥에 대한 민족지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똥 구출 작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배설적 전회excremental turn’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똥을 장르로 한 예술shit art’, 즉 배설물을 소재로 한 현대미술은 똥과 오물을 소환하여 ‘문명의 가냘프고 피상적인 속성’, 그리고 그 문명에 언제나 어두운 배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배설물에 관한 언급은 정통 유럽 미술 내부에서도 이따금 존재해왔지만, 그 관심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기존의 유럽 예술에 반발심이 가득했던 예술가들은 똥을 통해 ‘원시적인 장면’을 호출해내고자 했고, 똥을 경유하여 짓궂은 위반과 신성모독의 양식으로 표현했다. 마르셀 뒤샹의 〈초콜릿 분쇄기 2번〉에서부터 (이 책의 한국어판 표지에 실리기도 한)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1961, 배설물이 담긴 캔 90통에 작가 자신의 서명을 한 작품), 빔 델보예의 〈클로아카 프로페셔널〉(2010, 음식을 배설물로 변환시키는 배설기계를 설치해 배설물을 수집하고, 그것을 레진 용기에 담은 작업)에 이르기까지, “지난 60년간 똥을 장르로 하는 예술이 보여준 폭발적 번성은 단순하게 요약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예술계에서 똥을 주제로 한 사례는 무척이나 흔하며 그런 작품들은 질서/규범 위반에 대한 상상력과 ‘순수한 미적 즐거움’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비교적 최근의 흐름인 이 매혹과 탐구 역시 멸균과 위생에 대한 집착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그 점에서 위생-오염, 순결-위험, 문명-자연, 근대-원시, 백색-갈색과 같은 근대적 이분법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 말하자면 예술과 과학은 질서와 정체성에 대한 기존 감각을 흐트러뜨리는 배설물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지만, 그것을 일종의 “대항-생명정치”로서 동원하지만, 근대 세계의 공고한 이상인 ‘위생정치체’ 모델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체하지는 못한다. “공교롭게도 ‘동원된다’는 말은 실제로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것들의 집합 안에 흡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술적·과학적 재현물들에서 보게 되는 것은 근대적이고 백인적인 정체성을 위협하는 그 비천한 물질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캔이나 병 속에 봉인되어 있거나 이미지 속에 소외되어 있고 박물관과 미술품 시장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물신화된 똥의 대체물”이며,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으며, 순서대로 정렬되어 있고, 심지어는 유익하기까지 하며, 물론 냄새도 나지 않는” (똥의) 상징적 등가물일 따름이다. 똥과 항문을 복권시키고, 지배적인 담론 속으로 편입시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것의 절대적인 타자성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 어디에도 진짜 똥은 없다. 되돌아오고 되돌아오는 똥: 세계는 어떻게 근대가 되는 데 실패하는가 이렇게 볼 때 똥은 “근대인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체 기능과 함께 살아가는 데 얼마나 어렴움을 겪고 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대상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종 과학적 의례와 장치를 동원해 똥을 추상화하며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지만, 그런 시도들 역시 결국에는 임시방편에 그칠 뿐이다. 이처럼 배설물을 소외시키거나 제거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며, 똥은 잊을 만하면 다시 돌아와 오염에 대한 새로운 불안과 걱정을 자아낸다. “추방하거나 기록함으로써 안전한 물체로 둔갑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똥은 여전히 ‘비천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있는 힘껏 밀어내고 소외시키지만 우리와 영영 완벽하게 분리될 수는 없는 어떤 것으로서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세계가 똥을 정화함으로써 어떻게 근대를 이루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반대로 “세계가 근대가 되는 데 어떻게 거듭 실패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옮긴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국의 맥락에 적용하여 논의를 이어간다. 한국은 똥을 거름으로 활용함으로써 농작물을 키우던 ‘순환’의 시기를 지나 1970년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화장실 혁명’을 이뤘다. 그 이후로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로 대체되었고, 그곳에서 배출되는 하수를 운반하기 위해 지하 하수도망이 설치되었으며, 곳곳에 하수처리장이 건설되었다”. 이제 한국의 하수 인프라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지역별 하수처리장에서 정기적으로 하수 시료를 채취해 데이터화하고 방역 정책 결정에 참조하는 등 세계적 흐름을 주도했다”. 이와 같은 ‘화장실 혁명’ 혹은 ‘하수 혁명’에도 불구하고 똥과의 단절은 결코 완벽히 달성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똥을 정제하고 안보화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2022년 여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일가족이 하수관로가 역류하며 밀려든 빗물과 오수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사건은 향기로운 공중화장실을 자랑하는 한국마저 “반복해서 되돌아오는 똥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선명히 보여주었다. 그러한 위협은 “소외되고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닥치지만, 정작 인분과 관련한 대부분의 역학 연구는 “중산층 이상의 지역사회와 그들의 하수도, 다시 말해 잘 정비된 하수 시설을 향유하는 30퍼센트의 인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똥과 함께 사유하기: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위한 감각 “똥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며, 우리가 무엇이 아닌지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재료가 된다. 그러므로 똥이란 그것을 가지고, 그것에 맞서며, 그것의 곁에서 사유하기 좋은 대상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똥과 함께 사유하기’란 우리가 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따라서 결코 근대인이 될 수 없다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위생-오염, 순결-위험, 문명-자연, 근대-원시, 백색-갈색과 같은 여러 이분법에 문제를 제기하고, 질서와 경계를 거슬러 사고해보자는 제안이다. 똥은 “식민주의가 애써 구축했던 우월한 몸과 열등한 몸 사이의 경계”를 뒤흔들고, “몸 안과 밖의 경계”도 흐려놓으며(어째서 몸 안에 있을 때는 불결하게 여겨지지 않던 똥이 항문을 통과해 배출되는 순간 더럽고 냄새나는 물질로 간주되는가),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의 경계” 역시 뒤흔든다(똥은 과학자들이 건강 정보와 새로운 에너지원을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자원이기도 하다). “이처럼 똥은 계속해서 혐오의 대상이자 희망의 원천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우리가 근대성의 문법이라 여겨왔던 이분화된 사고방식을 끊임없이 거스른다.” 더불어 똥을 배제하고 정화하려는 근대적 실천에 대한 저자의 예리한 비판을 새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인류가 “그러한 실천을 손쉽게 부정하거나 포기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즉 이 책의 통찰은 우리가 재래식 화장실로 되돌아가야 한다거나, 높은 수준으로 이룩된 하수도, 하수 기술을 부정해야 한다는 데 있지 않다. 그런 과학기술이 실제로 인간을 여러 건강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고, 평균 수명을 연장해주며, 수많은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옮긴이들이 제안하듯, “그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이 보여주는 다양한 실천들 속에 공존하는 모순과 이중적 면모들, 그러한 실천을 빚어낸 양가적 가치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다면성과 복잡성 자체를 세심하게 감각하고, 직시하고, 그와 ‘함께 머무르는’ 태도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이 문명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고, “그 이면을 구성하는 사람과 기술, 권력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똥과 함께 사유하기’의 진정한 의미일 수 있다. |
|
“《배설 스펙터클》은 유쾌하면서도 지적인 책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책은 ‘분석analysis’에서 ‘항문anal’의 의미를, ‘식민주의colonialism’에서 ‘결장colon’의 의미를 다시금 끄집어낸다. 이론과 문학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이 유쾌한 여정 하나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앤더슨이 주장하듯, 우리가 결코 근대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언제나 이미 똥통 속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 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