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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볼 때
시인 박준이 한국 현대시 백 년을 톺아보며 67인의 시인과 그들의 시를 함께 읽는다. 작품을 시대별로 따라가며 시절과 시, 시인을 그만의 궤적에서 바라본다. 시를 읽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오는지, 박준이 담아낸 아름다운 탐구의 시간.
2026.09.01.
에세이 PD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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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읽는 사람은 다 가진다 5
1부 삼킨 말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 유언 김명순 14 |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15 사랑의 때 김억 16 | 지극 19 상치쌈 조운 20 | 묵묵 22 왕십리 김소월 24 | 만큼 26 호수 1 정지용 28 | 그 벽에 그 그림 30 언덕에 바로 누워 김영랑 32 | 아슬아슬 아슬 33 역단易斷 이상 34 | 읽고 쓰는 일에 대한 변론 36 찔레꽃 이원수 42 | 그 붉은 사탕 물 44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46 | 빛, 두부, 우동, 돌 50 슬픈 사람들끼리 이용악 52 | 자각 53 산도화山桃花 1 박목월 54 | 울진에서 보내는 편지 56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66 | 역과 역마 68 2부 네가 슬퍼할 때마다 나는 슬퍼했습니다 현대식 교량 김수영 72 | 온몸으로 밀고 나간다는 것 75 북 치는 소년 김종삼 78 | 시,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80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 3 박용래 82 | 어떤 이름 하나 85 누항요陋巷遙 신경림 88 | 해어지다 89 즐거운 편지 황동규 90 | 기다림은 다함이 없다 92 섬 정현종 94 | 섬어譫語 3 96 마음의 그림자 최하림 98 | 그림자의 마음 100 진실로 좋다 천양희 102 | 좋으면 좋음 105 별을 보며 이성선 106 | 물에 밥을 말아놓고는 109 대숲 아래서 나태주 110 | 이별의 셈법 113 밤눈 최인호 114 | 멀리서 멀리까지 117 창살에 햇살이 김남주 118 | 언제쯤이면 옷에 묻은 슬픔이 마를까요 121 겨울 사랑 고정희 124 | 단 한 사람 127 사루비아 신현정 128 | 내겐 참 중요한 이야기 131 곧 이시영 132 | 새벽에 물 한 잔을 뜨다가 134 3부 어쩌면 나물을 삶는 일과 비슷합니다 수선화에게 정호승 138 | 세상에 시가 왜 필요하냐고요? 140 아름다운 너무나 박라연 142 | 어렵고도 슬픈 145 어떤 싸움의 기록記錄 이성복 146 | 우리라는 우리 148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150 | 감정을 곱게 개어두는 일 153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156 | 사랑은 잠자코 160 전염병자들아 김혜순 164 | 환멸 167 가물가물 불빛 최정례 168 | 반짝 171 화양연화花樣年華 김사인 172 | 순간과 영원 174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176 | 상처는 받기만 합시다 179 강 황인숙 180 | 자유 183 반성 673 김영승 184 | 그렇다 하더라도 식구는 참 말을 안 듣는다 187 소금창고 이문재 188 | 마흔 190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정화진 192 | 감각 195 4부 늘 사람이 더 어렵습니다 포도밭 묘지 1 기형도 198 | 한편과 저편 201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206 |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208 가을 함민복 212 | 앙코르는 없습니다 213 늦게 온 소포 고두현 214 | 아득 217 사랑의 지옥 유하 218 | 잉잉 219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220 | 너 223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224 | 이상형 227 별의 감옥 장석남 228 | 이 감옥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230 사과밭을 지나며 나희덕 232 | 길에서 울고 있는 아버지를 만난 적도 있습니다 234 영산포 리산 236 | 채하彩霞 239 봄비 박형준 240 | 이상하게 오늘따라 241 새벽 안주 송경동 242 | 잠들지 않는 것과 잠들지 못하는 것 244 택시 박지웅 248 | 행복 249 5부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 입맞춤 김행숙 252 | 복도 254 흰둥이 생각 손택수 256 | 임종 259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260 | 바람을 알지 못하면 262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264 | 쌀을 씻다가 266 발 없는 새 이제니 268 | 발은 없지만 날개는 있으니까 270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강성은 272 | 사이 274 영화는 밤에 자는 낮잠 같다 신용목 276 | 정동 279 안개 신기섭 282 | 서울의 달 284 첫사랑에 대한 소고 이현호 286 | 바다와 사랑은 닮았습니다 291 나리분지 임유영 292 | 이 장면을 시로 쓸 수 있는 건 295 면역 황인찬 298 | 변화와 번화 301 독도법 봉주연 302 | 고향과 달리 동네라는 말에는 305 졸업반 김남주 308 | ‘새’와 시 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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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이원수(1911~1981)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배고픈 날 가만히 먹어 봤다오. 광산에 돌 깨는 누나 맞으러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하얀 찔레꽃 따 먹었다오. 누나 누나 기다리며 따 먹었다오. * 누나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우리 남매는 큰집에 맡겨졌다. 나는 누나가 문을 나선 순간부터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번은 학교가 끝나고 막 돌아온 누나가 나를 보더니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얼마 후 눈을 뜨자 누나 손에는 붉은 알사탕이 있었다. 하굣길에 친구가 사탕을 하나 주었는데 일단 입속에 넣고 먹는 척을 하다 내게 줄 생각으로 몰래 사탕을 뱉은 다음 손바닥에 쥐고 돌아온 것이다. 그때 누나 손바닥에는 마치 붉은 신호등처럼 동그랗게 사탕 물이 들어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누나의 손바닥에는 그 붉은 사탕 물이 지지 않고 있을 것이다. 까닭에 나는 누나를 떠올릴 때마다 매번 진다. ---「그 붉은 사탕 물」 중에서 * 북 치는 소년 -김종삼(1921~1984)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매일 시를 읽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수 없다. 드문 일이지만 기쁨과 희열을 느낄 때 시집을 펼치는 법이 없다. 밖에 나가 잔을 들거나 집에서 울어야지. 다 울고 나서는 웃어야지, 웃다가 말고 춤을 춰야지. 흔한 일이지만 마음에 들불 같은 슬픔이나 화가 일어날 때 시의 문장과 낱말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울음을 참거나 아니면 울어야지. 아무데서나 울어야지. 희뿌옇도록. 시를 읽는 순간은 문득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오를 때와 닮았다. 예감도 기색도 계기도 없었는데 딱히 골똘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어떻게 이 생각을 떠올렸지? 하고 스스로 기특함이 들 정도의 생각, 거창하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살갑고 세심해서 성글기만 했던 내 지난 시간의 빈 곳을 채워주는 생각. 이를 위해서는 잦아들어야 한다. 비어 있어야 한다. 내가 나인 것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내 삶 주변의 숱한 거짓 사이에서도 진실한 마음 하나가 까치발을 들고 서 있어야 한다. 세상 아름다움은 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잊고 사는 날이 많았을 뿐. 아름다움에 한발 다가가거나 손을 뻗어 당겨오는 것.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힘은 언제나 나의 안녕으로부터 온다. ---「시,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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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멀리서 멀리까지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는 박준 시인이 한국현대시사 백여 년을 톺아보며 함께 만나고 싶은 시인 67명을 부르고, 함께 읽고 싶은 그들의 시 67편을 고르고, 그에 한 편씩 가장 솔직하고 가장 자유로우며 가장 유연한 방식으로 자기만의 산문 67편에 시 한 편을 더한 형식을 자랑합니다. 작품의 배열 순서를 시인의 출생 연도로 따르면서 총 5부로 구성하게 된 이 책은 부마다 잔잔히 바탕 컬러를 다르게 입힘으로 한국현대시의 역사를 한눈에 압축하고 한 축에 꿰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해낸 건 아닌지 아주 살짝은 감히 자부하는 바입니다. 이 책을 여는 이가 1896년 태어나 1917년 등단한 김명순 시인이고 그의 시 「유언」이라 할 적에, 이 책을 닫는 이가 1995년에 태어나 2026년 등단한 김남주 시인이고 그의 시 「사춘기」라 할 적에, 박준 시인은 한국시 근 백여 년의 자장 속에 한데 흔들렸던 시인들의 면면을 특유의 조심성을 담보로 하여 뒤따라 밟으면서도 고유의 집요함을 잃지 않습니다. 시의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시의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이 책의 목표로 두는 데 일찌감치 동의했기에 가능한 작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시, 어떤 이름 하나 1부는 ‘삼킨 말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이라는 부의 제목 아래 총 열두 명의 시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김명순, 김억, 조운, 김소월, 정지용, 김영랑, 이상, 이원수, 백석, 이용악, 박목월, 윤동주가 그들 이름입니다. 2부는 ‘네가 슬퍼할 때마다 나는 슬퍼했습니다’라는 부의 제목 아래 총 열다섯 명의 시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김종삼, 박용래,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 최하림, 천양희, 이성선, 나태주, 최인호, 김남주, 고정희, 신현정, 이시영이 그들 이름입니다. 3부는 ‘어쩌면 나물을 삶는 일과 비슷합니다’라는 부의 제목 아래 총 열세 명의 시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호승, 박라연, 이성복, 최승자, 황지우, 김혜순, 최정례, 김사인, 박남준, 황인숙, 김영승, 이문재, 정화진이 그들 이름입니다. 4부는 ‘늘 사람이 더 어렵습니다’라는 부의 제목 아래 총 열세 명의 시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형도, 박상순, 함민복, 고두현, 유하, 허수경, 이영광, 장석남, 나희덕, 리산, 박형준, 송경동, 박지웅이 그들 이름입니다. 5부는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이라는 부의 제목 아래 총 열세 명의 시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김행숙, 손택수, 진은영, 한강, 이제니, 강성은, 신용목, 신기섭, 이현호, 임유영, 황인찬, 봉주연, 김남주가 그들 이름입니다. 시,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 제목과 더불어 함께 읽자 한 시인 67명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 데는 때론 어느 한 시절을 한 시인이, 그 한 시인의 시가 대변하고 있기도 한 까닭입니다. 순간 ‘사랑은 모두 다르지만 슬픔은 다름으로 다르지 않다’던 박준 시인의 문장이 불쑥 떠오릅니다. 이름이 시대가 되고 시대가 이름이 되기에 우리의 시(詩)사를 비단 문학적 장르 차원에서 좁혀 읽을 일만은 아니다, 목청을 높일 수 있는 데엔 ‘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그것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 김수영 시인의 시에 기댈 수 있어 가능한 객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아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날개로 오늘날까지 우리의 시사가 날 수 있는 건 도통 지겨움을 모르고 언제나 ‘물과 나무와 꽃 이야기’를 최우선에 놓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또한 시인이기도 해서일 겁니다. 지치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고 한결 순리에서 진리를 찾는 신현정 시인의 시 「사루비아」를 두고 박준은 이야기를 덧댑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고. 아무나 가질 수 있지만 아무도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이라 한 그의 말은 짧지만 강력하게 시의 유용함을 거들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시는 여전히 어렵기만 한 존재인 것도 맞습니다. 어려움과 불가해가 자연스러운 영역이기도 합니다. 곁에 두고 친해져야 한다 했습니다.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이에 그의 문장에 밑줄을 그어보니 숨었던 용기가 슬그머니 머리를 듭니다. ‘한 편의 난해한 시를 읽을 때 우리의 표정은 낯선 이를 바라볼 때, 다시 사랑과 마주할 때, 나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한 그의 문장을 베껴도 봅니다. 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과 태도를 보이기도 전에 제 스스로 단정하여 시 앞에 ‘무지’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 기억은 없는지, 이제 시 앞에 ‘미지’라는 단어를 습관적으로 갖다 써야지 일견 다짐하게도 됩니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시에 기대하는 선한 영향력이라면 바로 이러한 수고로움의 자처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 세상에 시가 왜 필요하냐고요? 시인들의 시로부터 딱 한발 뒤에서 박준 시인은 저만의 궤적을 그립니다. 그들의 시로부터 일어난 감흥을 고스란히 쏟거나 따져 물으려 하거나 시시콜콜 타전하려 하지 않고 저만의 ‘생의 물가에서 오래도록 혼자’ 놉니다. 그저 놀고 또 놀뿐입니다. 시는 시대로 나는 나대로, 리드미컬한 ‘겹’의 반복에서 꼿꼿한 ‘격’을 잃지 않는 데서 마치 이 책은 시인들의 시라는 재료를 차곡차곡 얹고 박준의 산문이라는 빵으로 야무지게 위아래를 포갠 아주 건강한 풍미의 샌드위치 같습니다. 이 책이 기존에 보아왔던 시 해설서나 시 감상법과 다른 태도와 형식과 스타일을 유지하는 건 그처럼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고, 겉넘거나 뒤섞지도 아니하고, 예컨대 옷장 속에 적당한 틈을 주고 옷을 걸 때, 그래서 옷들이 숨을 쉴 수 있게 앞으로 얼마간은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게 둘 때, 그때 비로소 옷과 옷의 틈틈마다 ‘어둠’이 걸림을 아는 시인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바가 꽤 클 것입니다. 박준 시인의 산문은 ‘저 너머’로 ‘절로’ 넘어가는 ‘바람’의 자연과 꽤 닮아 있습니다. ‘때’라는 패를 손에 쥐고 시를 읽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기다림’이라는 자리를 엉덩이에 깔고 글을 쓰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에 시가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읽을 수 있는지 많은 울음 속에 오늘을 사는 박준 시인입니다. 시험 문제에 답안 구하듯 시의 주제 찾기에 혈안이기보다 이 시를 읽고 딱히 골똘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가 이 생각을 다 떠올렸지? 스스로에게 행하는 기특함부터 챙기라는 시인의 메시지가 이 책의 작은 숙제가 아닐까 합니다. 이를 위해서 내가 나인 것이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내 삶 주변의 숱한 거짓 사이에서도 진실한 마음 하나가 까치발을 들고 서 있어야 한다는 시인의 전언이 실은 이 책의 어마어마한 숙제가 아닐까 합니다. 저기 멀리 시의 때가 오고 있습니다. 정작 시는 그다음에 오십니다.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의 마무리를 왜 꼭 이렇게 위의 두 줄로 짓고 싶은지, 그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읽는 사람이 다 가진다 한 사람이 박준 시인이었으니 그의 시를 읽는 마음에서 두둑하게 한번 찾아볼 심사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닿는 것은 짙은 바다가 아닌 흰 파도인 것처럼. 별이 아닌 별빛인 것처럼. 욕망의 입이 아닌 사랑의 말인 것처럼’ 시인이 이리도 큰 희망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작가의 말 나는 한때 읽는 일에 영향받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냉철하게 아름답고 흐드러지게 슬픈 길을 따라 걷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답이 아닌 전에 없던 오답을 구하며 읽었다. 시와 문학이라면 내게 가장 드넓고 견고한 불가해의 세계를 만들어줄 거라 믿으며 얼마간의 문장이나 낱말 몇 개만을 손에 꼭 쥐고 먼길을 가고 싶었다. 오기와 치기로 시집을 펼칠 때가 많았으나 이 역시 생의 한 기운이라 여겼다. 쓰는 사람은 다 가지지 못한다. 한창 울고 있을 때 내 울음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일과 같다. 대신 읽는 사람은 다 가진다. 결국 우리에게 닿는 것은 짙은 바다가 아닌 흰 파도인 것처럼. 별이 아닌 별빛인 것처럼. 욕망의 입이 아닌 사랑의 말인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