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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노트, 정기용, 1973년 여름 Carnet de voyage en Espagne, Chung Guyon, été 1973 p. 184 다른 정기용 - 정재은 영화감독 p. 186 문장 사이에 오래 남은 것들: 역자 노트 - 권현정 프랑스 국가공인건축사(D.P.L.G) p. 188 한 권의 연가 - 재영 책수선 p. 190 건축의 뿌리, 삶의 뿌리 - 정다영 건축 큐레이팅 콜렉티브 CAC 대표 p. 192 내 아버지의 여행 Le voyage de mon père - 정구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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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의 7주간의 여행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대성당도, 박물관의 그림도, 역사적 기념물도 아니다. 오렌세와 마드리드 사이를 지날 때 눈앞을 스쳐 지나가던 풍경의 이미지들, 혹은 밤에 칸타브리아 해안을 따라 달리며 보았던 장면들……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곳곳에 서 있던 수많은 경찰, 과르디아 시빌……. 남부에서 우리를 태워 주었던 한 스페인 사람이 외치듯 말했던 이 문장을 나는 적어 두어야겠다. “자유! 보시다시피, 여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p.9 여행 내내 우리는 몹시 가난했다. 우리에게는 옷가지와 카메라, 작은 냄비 하나, 그리고 약간의 음식이 들어 있는 가방 세 개가 전부였다. 때로는 해변에서, 때로는 차고에서 몸을 눕혔고, 또 어떤 날은 코카콜라 공장에서, 혹은 교회 앞에서 잠을 청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그렇게 잘 수밖에 없었다. ---p.13 새벽 해변에서 신문을 읽는 한 남자. 그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바닷가에 있다. 그러나 신문 속 기사를 읽는 순간, 그는 실로 전쟁으로 들끓는 세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셈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추상적 공간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바다의 공간, 또 다른 하나는 세계의 공간이다. ---p.42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리관 안에 들어 있는 모습을 이 교회 안에서 발견했을 때이다. 프랑스 교회들에서는 본 적 없는 광경이다. 우상 숭배적 리얼리즘. 산세바스티안 이후로 나는 스페인 거의 모든 교회에서 이런 형태의 조형물을 보게 되었다. 신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아들의 몸을 본뜬 조각상으로 장식했다. 우상 숭배.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했고, 시걸(조지 시걸 George Segal, 1924-2000)은 석고로 사람의 형상을 본떴다. ---p.50 도시를 비판하는 것은 언제나 쉽다. 그러나 그 도시에 약을 처방하는 일은 늘 어렵다. 병은 이미 불치의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기술 중심 문명은 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맞추고 적응하라고 강요한다. 인간이 기술에 적응해야 하는 현실. 사람은 기계를 만들고, 그 기계는 다시 인간을 만든다. 인간은 기계를 먹고, 기계는 곧 인간의 일부이자 환경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연은 인간을 버린다. 고층 빌딩과 각종 양식이 뒤섞인 전통 건축, 빌바오의 부두 옆 빨간색 자동차, 소음, 냄새, 광고……. 잔인한 것들. ---p.58 집 대문 앞에 집주인과 아이들이 서 있었다. 우리를 이 집에 데려다준 것은 왼편에 있는 소년이었다. 우리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여자는 무척 자랑스럽게 막 완공된 욕실을 보여 주었다. 마치 4성급 호텔처럼, 크고 호화로웠다! ---p.69 그들은 내가 불러도 가까이 오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카메라를 보여 주자, 금세 다가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아시아인인 나에게는 경계심을 보였지만, 카메라에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카메라를 매개로 해서만 소통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미 사진이라는 매체를 경험해 보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더 중요한 것은, 소통을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사전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어쨌든 그들에게 나는 단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p.90 우리는 새벽녘에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 가까워지며 보았던 풍경을 잊을 수 없다. 황금빛 밀밭, 검은 바위들, 소 떼,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 우리를 그곳까지 데려다준 사람은 축구 선수였다. 그는 밤새도록 약 600킬로미터를 운전했다. 정말 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발렌시아의 한 축구팀 소속 선수라고 했다. ---p.101 오늘날 가우디의 작품에서 진정으로 값진 것은, 지금도 바르셀로나에 남아 있는 건축물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정신이다. 그는 한 개인 건축가로서 “과거의 양식을 반복하는 것을 거부”했다.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관료적 집단주의에 맞선 개인적 태도, 기술 중심의 엔지니어 세계에 대한 예술가의 항의, 그리고 산업과 상업의 문화적 물결에 맞서는 고귀한 예술관이 그의 작업에 담겨 있다. ---p.142 그런데 왜 지금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철근 콘크리트(어쩌면 형편없는 건축 방식일지 모르는)를 덧붙이고 있는 것일까? 완성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가우디는 5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오래된 건물 하나를 복원하는 일조차도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다. 가우디의 창조적 생명력은 언제나 그의 현존 속에서만 가능하다. ---p.156 대학의 첫 학기가 지난 7월과 8월의 여름방학은 부모님이 유럽을 여행할 첫 기회였다. 여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도 부족했고 이웃 나라들에 대한 지식이나 언어 능력도 거의 없었다. 여행지는 자연스럽게 스페인으로 정해졌다. 그들은 새로 친구들과 각자 다른 여정으로 시작한 뒤, 약속한 날짜에 리바데오 중앙우체국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당시에는 여행 중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약속한 날짜를 전후해 며칠씩 기다리는 일도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올 때까지 야영을 하며 기다려야 했다. 가벼운 마음과 가득한 열정으로, 그렇게 그들은 몇 벌의 옷과 침낭, 그리고 카메라 한 대만을 챙긴 채 길을 떠났다. ---p.192 정구노 「내 아버지의 여행」 중에서 박스 맨 안쪽, A4나 A3처럼 규격화된 사이즈가 아닌 큼직한 이형 사이즈의 책자가 내 손에 덜컥 잡혔다. 나는 그 책을 펼치자마자 자유롭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남녀 한 쌍을 발견했다. 한국에서 군사독재가 진행될 때,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훨씬 전에 이국의 땅에서 미소 짓고 있는 그들의 시간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책에 담긴 시간은 내가 함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72년부터 유학 생활을 했으니 1973년에 떠난 스페인 여행은 이제 막 해외에 정착한 젊은 부부의 첫 일탈이지 않았을까 짐작만 했을 뿐. 불어에 손 글씨로 쓰여 있던 글을 읽을 수 없어 스케치와 사진으로만 어림잡던 그 시간들을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 출간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 정다영 건축 큐레이팅 콜렉티브 CAC 대표 ---p.190 「건축의 뿌리, 삶의 뿌리」 중에서 선생이 언젠가 실수로 떨어트린 잉크 자국 하나, 세월에 나달나달해진 페이지의 모서리들, 서로 붙었다 떨어지면서 망가진 사진들, 사실 이 모든 부분은 얼마든지 말끔하게 수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 하나하나까지도 이 노트가 머금어온 세월의 흔적이고 먼저 떠나가신 정기용 선생님과 남은 가족들이 함께 50년이 넘도록 이어가고 있는 기록의 박음질이라 생각하면 그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분명 더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된다. - 재영 책수선 ---p.188 「한 권의 연가」 중에서 이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젊음이 아니었다. 문장 사이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다른 것이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 건축을 읽어내는 감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어 주는 사유. 어쩌면 젊음이란 나이가 아니라 그런 시선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 그리고 그 눈으로 다시 세상을 이해하려는 마음. 나는 그 시선을 따라 천천히 여행했다. 1973년의 스페인과, 2026년의 지금 사이를 오가며. - 권현정 프랑스 국가공인건축사 ---p.186 「문장 사이에 오래 남은 것들-역자 노트」 중에서 스스로 편집자가 되어 글과 사진, 스케치들을 배치하고 차례를 구성한 이 책은, 오로지 정기용의 손으로만 제작된 세상에 단 한 권만 존재하는 한정판 아트북이었다. 사진 속의 정기용은 근엄한 건축가가 아닌 자유로운 히피였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불어는 가지런했고 틀린 글자를 표시한 빨간 작대기마저 인간적으로 보였다. 여행에서 돌아와 인화한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렸을 작은 스케치들은 청년 정기용의 진지함과 꼼꼼함이 고스란히 느껴져 미소가 절로 나왔다. 책상에 앉아 손수 이 책을 만들고 있는 정기용의 뒷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기뻤다. - 정재은 영화감독 ---p.184 「다른 정기용」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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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두 가지 기원이 있다
첫 번째 기원은 1973년 여름이다. 20대 젊은 한국인 부부는 각각 건축과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국비 유학을 오게 된다. 첫 번째 방학을 맞아 그들은 새로 사귄 친구들과 처음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스페인. 옷가지 몇 개와 카메라 한 대만 가지고 떠난 7주간의 여행이었다. 가난했던 그들은 엄지손가락 하나로 히치하이크를 하고, 해변가나 공장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며 여름을 보냈다. 그 여행의 기록은 아직 건축학도였던 남편, 스물일곱 살의 정기용이 직접 촬영하고 인화한 사진을 붙이고, 본 것들을 그리고, 겪은 일을 육필로 써서 만든 한 권의 책으로 남았다. 한국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이 책의 두 번째 기원은 그로부터 52년 후의 어느 날이다. 시간이 흘러 건축학도는 건축가 정기용이 된다. ‘감응의 건축가’로도 알려진 그는 한국 사회에 공공과 건축의 관계를 질문한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나날은 한 영화감독의 카메라에 담겼고, 끝내 영화가 되었다. 2025년, 정재은 감독은 정기용을 주인공으로 자신의 첫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를 만들었던 경험을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이라는 에세이집으로 막 출간한 참이었다. 한국 여성 성장 영화의 걸작 〈고양이를 부탁해〉를 시작으로 몇 편의 극영화를 만든 정재은 감독이 처음 논픽션의 세계로 건너왔던 당시의 혼란과 경험, 생각과 공부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한 권의 책으로 엮기로 결정한다. 책을 통해 건축가 정기용의 시간들이 다시 재생되자, 정기용 선생과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이 연결되기도 했다. 그중에는 정기용 선생의 생전 마지막 전시 〈감응_정기용 건축전〉를 준비했던 당시 일민미술관의 젊은 큐레이터도 있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그들은 당시를 회상하다가, 오래된 책 한 권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책, 젊은 정기용이 손수 쓰고 찍고 그려서 만든 1973년 스페인에서의 여름 기록이었다. 세상 오직 단 한 권 파리의 건축학도 정기용은 크고 넓은 빈 공책을 한 권 펼쳐, 정성 들여 표지를 만들고, 스페인 지도를 그리고, 여행했던 도시들을 연결하고, 목차를 만들고, 본문 레이아웃을 잡고, 사진을 붙이고, 본 것들을 스케치하였다. 오직 수작업만으로 온전한 한 권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책은 만들어진 이후로 정기용 가족의 파리 자택, 수많은 자료들 사이에 잠들어 있다가 아주 가끔 세상에 나오곤 했다. 2011년 일민미술관의 전시 담당자로부터 그가 작고한 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린 회고전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의 담당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잠깐이라도 이 책을 열어본 이들은 비록 전부 불어로 쓰인 글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정기용의 건축과 세상을 향한 열정, 몇십 년 전 스페인의 생생한 풍경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짧지만 강렬한 인상들은 이후 정재은 감독에게 14년 만에 다시 이 책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플레인아카이브에 출간을 제안하게 한다. 이것이 이 책의 두 번째 기원이다. Carnet de voyage en Espagne, Chung Guyon, été 1973 스페인 여행 공책, 정기용, 1973년 여름 이 책은 한국에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한참 전, 정확한 여행 정보도, 편안한 교통편이나 잠자리도, SNS는 물론 간편한 기록 매체도 없던 시절,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지금보다 풍성하지 않던 1973년에 오직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젊음이라는 사명, 그리고 아직 방향성을 탐구하던 열정이 이끈 52년 전 여름 여행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건축가 정기용의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강렬한 의의를 갖는다. 1945년에 태어난 정기용은 서울대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회사와 대학원을 병행하며 불어를 익히고 국비 장학생에 선발되어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프랑스에서 정기용은 실내 건축과 건축, 도시계획을 차례로 공부했다. 고국으로 돌아와 그는 무주 공설운동장, 면사무소, 추모의 집 등 무주 공공 프로젝트, 노무현 대통령 사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 등 건축가이자 인문학자로서 수많은 업적과 생각을 남기고 2011년 3월, 병으로 작고했다.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추억과 영감을 남겼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매년 무주를 찾는다. 오래된 여행의 기록, 종이로 지은 정거장이 되다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는 정기용 선생과 가족들이 소중히 보관해온 세월을 고스란히 책으로 옮겨 독자들께 소개한다. 헌책을 수리하는 재영 책수선의 도움으로 손상 없이 모든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분리하고, 종이 위 잉크 자국, 수정한 자국, 사진의 구김과 뜯어진 흔적까지 모두 고화질로 스캔하였다. 도서 디자인을 맡은 스튜디오 홍박사는 젊은 정기용이 고심하여 설정한 페이지 레이아웃을 창조적으로 잇고 해석하여 책 읽기의 즐거움에 디자인적 매력을 듬뿍 더했다. 국문 번역은 프랑스 국가공인건축사(D.P.L.G) 권현정이 맡았다. 스페인의 역사적 건축물부터 동시대 가장 평범한 건축물까지 세심하게 관찰한 정기용의 시선을 건축의 전문가이자 여행자의 마음으로 번역하였다. 이 책의 시작이 된 정재은 영화감독의 글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를 만든 정다영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도 오래전 이 책과의 짧고도 강렬한 마주침을 회고하는 글을 보탰다. 무엇보다 이 책은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토대로 완성되었다. 전체 기획은 물론 디자인 방향, 표지 선정까지 함께하며 오직 가족의 것이었던 책이 독자라는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힘썼다. 정기용 선생의 아들이자 현재 프랑스에서 건축사로 일하고 있는 정구노가 쓴 아름다운 에세이 「내 아버지의 여행 Le voyage de mon père」로 이 책은 종이로 지은 작은 정거장이 된다. 이곳에서 1973년의 젊었던 아버지의 시선은 이제 그 시절 아버지보다 나이 든 아들의 기억과 교차한다.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나는 아버지에게 그에게 건축가라는 직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는 프랑스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내가 생각하는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계와 우주, 사회와 인간을 전체 속에서 들으려 하고 이해하려 해야 한다. 사물을 전체 속에서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나의 이해와 지식을 쌓아갔을 때, 비로소 주어진 질문들에 응답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 「내 아버지의 여행」 중에서 책의 제목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는 정기용 선생이 아들 정구노에게 남긴 말에서 따왔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의 건축가. 그가 평생 지녀온 건축가의 초상을 독자는 젊은 정기용의 여행기에서도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다. 정기용의 여정은 산세바스티안에서 출발하여 빌바오, 마드리드, 톨레도, 세비야 등 대도시와 작은 마을들을 거쳐 종착지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그 길에는 산티아고의 대성당,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등 역사적이고 기념비적 건축물은 물론 보통 사람들의 주택과 광장이 있다. 예술을 향한 인간의 원시적 본능과 마주하게 한 알타미라 동굴이 있으며,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까사 밀라, 구엘 공원이 있다. 그로부터 50여년 후, 2026년에 드디어 완공을 선언할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가우디 사후의 혼란을 짐작하기도 한다. 그 길 위에서 그의 시선은 자꾸만 보통의 사람들, 보통의 건축이라는 그저 지금 존재하는 삶의 풍경들에 머무른다. 1973년 스페인에서 시작된 여행, 마침내 독자에게로 닿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에서 독자를 가장 사로잡는 것은 건축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과는 정보도, 자료도, 접근성도 비교할 수 없이 빈곤했던 시절, 미지의 세상과 다름 없었을 스페인을 누빈 자유롭고 도도한 젊음의 장면들이다. 그리고 다시 파리의 작은 책상 앞으로 돌아와, 여행에서 보고 듣고 익힌 것을 꼼꼼히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을 정기용의 뒷모습이다. 그때 그는 어떤 독자를 상상했을까? 표지 사진 속, 그가 다정한 시선으로 찍은 아름다운 여행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생길 아들이었을 수도, 언젠가의 자기 자신이었을 수도 있겠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여겼을 수도 있다. 그 마음을 더이상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책이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파리의 책상 앞, 그로부터 머나먼 미래인 오늘에 마침내 독자인 우리를 만나, 1973년 스페인의 어느 특별했던 여름을 들려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