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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1부 억압하는 권력자들 제1장 하나님은 조롱받지 않으신다! 제2장 강한 자가 어떻게 무너졌는가 제3장 인류가 지워졌다? 제4장 두터움을 칭송하며 제5장 성문의 정의 2부 권력자들에게 저항하여 서다 제6장 권력으로서의 지도 그리기 제7장 희생자의 목소리 제8장 앞서 보다 제9장 ‘너절함’에서 ‘거룩함’으로 제10장 폭포수가 쏟아지듯 확산되는 위기! 하나님의 뜻? 3부 유일한 힘 제11장 나이가 차서! 제12장 은혜 안에서 자라감 제13장 흘러내리는 기름처럼, 산 위의 이슬처럼 제14장 새로운 신들! 제15장 우리는 우리 날을 계수한다 |
Walter Bruegg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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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은 장차 그 앞에서 모든 이가 그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고백할 단 하나의 권세(power)에 초점을 맞춘다. 여러분이 여태까지 월터가 써온 모든 에세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어찌 보면 월터는 겁이 없었다. 그가 권력들에 느끼는 불안은 우리가 그런 권력에 패배할 것이라는 염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이 무력(無力)한 이들에게 해를 입히고, 소외당한 이들이 더 불의에 시달리게 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리라는 염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시 말해, 월터는 자신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걱정한 것이었다.
--- p.9~10 나는 그 잠언 구절의 ‘조롱하다’라는 말에 주목했다. 가난한 이들을 ‘조롱함’은 가난한 이들의 하나님이신 창조주를 모욕하거나 업신여김과 같다. (중략)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이 없을 때마다 하나님이 조롱받으신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허술한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을 때마다 하나님이 조롱받으신다. 가난한 사람들이 적절하거나 믿을 만한 의료 보호를 받을 수 없을 때마다 하나님이 조롱받으신다. 가난한 사람들이 집도 없이, 안전한 거처도 없이 버려질 때마다 하나님이 조롱받으신다. (중략)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조롱받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단호하게 연대하시기 때문이다. --- p.20~22 교회가 신실함을 지키려면, 그 예배와 가르침과 선포를 통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글로벌리즘(globalism, 세계통합주의)의 전제와 실천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고 밑바닥부터 완전히 다른 ‘대안’을 힘주어 강조해야 한다. 글로벌리즘의 참된 실체는 취약한 민중들이 그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폭력의 시스템이다. 교회는 그 생활과 선교의 방향을 폭력에 맞서는 쪽으로 잡아야 한다. 아울러 탐욕스럽게 약탈하는 시장부터 경찰의 야만성, 그리고 공동체를 통째로 왜곡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형태의 폭력에 맞서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 p.32~33 인간은 통치권과 지배권과 통제권을 받았다. 이는 경이롭기만 하다. 이 시의 시인이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는 인간은 허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실로 인류세(Anthropocene)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1절과 9절이 본문을 송영처럼 감싸는 틀이 아니었으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주권을 포기하거나 내려놓지 않으셨다. (중략) 그러나 송영이 인류세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송영과 이 송영을 통해 경외와 경이와 찬미를 표현하는 행위를 그만둘 때, 우리는 비로소 인류세에 들어설 것이다. --- p.41 우리에겐 온갖 얇은 규칙이 있지만, 결국 우리는 그런 규칙을 따라 우리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신뢰에 의존한다. 십계명도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해주신 출애굽의 하나님을 언급하는 말로 시작한다. (중략) 바로 그런 이유로 공동체에서 가장 열심히 법을 강제하고 집행하는 이들도—진보이든 보수이든—이웃의 절박한 곤경을 보면 여전히 그 마음이 긍휼과 관용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규칙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산다. 그것이 바로 이 도덕 공동체의 핵심 주장이다. --- p.70 현재 미국 대법원은 소위 원전주의(原典主義, originalism)라는 유해한 모험을 하면서 활개를 친다. 미국 대법원이 내건 ‘원전주의’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확실히 안전한 권리를 지닌 사람은 재산을 가진 백인 남성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미국의 ‘최초’(original) 헌법이 염두에 둔 이들이 오로지 그들뿐이었다. (중략) 더욱이 그 법원은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백인 남성 재산 소유주의 독점권을 확실히 보장하려는 이들이 꼼꼼하게 작업하여 만들어 낸 것이 그 법원이다. --- p.72 나는 루터가 ‘영광의 신학’이라 말했던 것을 아주 밥 먹듯이 실천하는 것이 현재 교회의 예배라는 인상을 받는다. 말하자면 현재의 교회는 하나님의 행복하고 놀라운 통치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 같다. 현재의 교회에서는 전례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사람을 낙심케 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확신하며 이 교회라는 따뜻한 누에고치 안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중략) 오히려 나는 우리 사회처럼 침묵과 폭력이 돌고 돌며 되풀이되는 사회에는 교회가 다시금 ‘십자가의 신학’을 구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저 아래의 사람들(사회 하층에 자리한 사람들)을 대변하여 그들의 뜻을 명확히 천명해야 한다. --- p.109~110 출애굽 내러티브는 온갖 비루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무리가 떠나는 모습과 함께 가장 근본적인 인간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좋아하든 말든, 억눌린 이들을 해방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확실한 행동 주체를 등장시킨다. 이 하나님이 없으면 사회 시스템 자체에서 비롯된 고난을 해결할 대안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로 온갖 사람이 뒤섞인 군중으로, 같이 떠난다는 것 외에는 정체성이랄 것이 없고, 고통받는다는 것 외에는 촉구하는 바도 없고, 소망하는 것 외에는 권위랄 것도 없고, 남에게서 빼앗은 것 외에는 재산이랄 것도 없다. --- p.132 우리가 연이어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잇달아 다가온 위기들의 놀라운 경이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 지위에 걸맞은 경외에 이를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주 안에서 우리가 자리하는 위치, 곧 궁극적인 분 아래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이르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지배자라고 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자기기만에서 즉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모든 것을 통달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돌이키게 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기술을 앞세운 지배와 통제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지 않고 다른 피조물과 나란히 창조주를 섬기는 우리 본연의 역할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 p.156~157 실제로 교회는 ‘오직 은혜’만 줄곧 강조하다가 복음의 명령을 무시해 버렸고, 결국, 우리는 많든 적든 ‘값싼 은혜’에 빠지고 말았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쓴 이 말은 그저 막연히 은혜만 믿고 제멋대로 행하는 방종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본회퍼 자신의 맥락에서 보면, 이 말은 교회 사람들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복음의 범주 속에 뒤섞어 그 이데올로기에 순응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오늘날 미국 교회도 나치 시대 독일 교회처럼 인종차별주의나 국가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온갖 이데올로기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긍정하고 있다. --- p.175~176 교회가 이런 신학적 환원주의(reductionism)에 직면해서 선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신들’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역량을 갖춘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완전”(omni)의 은유에 맞서 긍휼을 느낄 줄 알고, 이 세상의 고난에 마음이 움직이는 분이다. 국가가 만들어 낸 신은 멀리 있는 신이지만, 이 하나님은 철저히 고난받는 곤궁한 이들 편을 들고, 때로는 고난과 비참함을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현상 유지(status quo)에 맞선다. (중략) 따라서 나는 교회가 용기 있게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고 그 삶을 당차게 살아가며 세상의 상처를 정직하게 마주할 때 비로소 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p.204~205 나는 내 아흔 번째 생일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을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내 생일을 축하했다. 많은 친구가 나와 함께 축하해 주었다. 그 축하를 받을 때, 내 안에는 벅찬 감사가 가득했다. 그날 나는 내 연약한 실체를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약함은 내 삶의 진실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날이 선물임을 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날을 헤아리고 또 의미 있는 날로 만든다. (중략) 그렇게 멈춰 서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서 시선을 돌려 긍휼이 충만한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에게 우리 손이 한 일을 [의미 있는] 무언가로 헤아릴 수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한다. --- p.22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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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우리 시대를 흔들어 깨운 월터 브루그만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붙들었던 주제 ‘권력’을 다룬 유고작 -2020-2025년에 쓴 에세이들을 편집자 콘래드 커네기가 세 부로 엮어, 억압하는 권력들에서 피억압자와 함께하는 권능들을 지나 유일한 권세이신 하나님께 이르는 흐름을 완성 -사법 불의와 이민자 혐오, 총기 난사와 기후 위기, 소비주의와 국가주의, 인류세 담론과 트랜스휴머니즘까지 우리 시대의 사건을 하나씩 성서 본문 곁에 세워 읽어냄 -전작 『성서와 가난』이 만들어진 가난을 고발했다면, 이 책은 가난을 양산하는 권력을 겨누며 저자가 평생 붙든 주제를 매듭지음 대상 독자 -권력이 전부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 -오늘의 사회 현안을 성서 본문에 비추어 읽고, 그 읽기를 설교와 강단에서 감당하려는 목회자와 설교자 -『예언자적 상상력』, 『안식일은 저항이다, 『성서와 가난』으로 브루그만을 만나 온 독자 -무력한 이들 곁에 서는 일이 왜 신학의 문제인지 묻고 있는 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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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그만의 모든 글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콘래드 커네기 (브루그만 전기 작가·편집자) 그의 모든 저작을 꿰뚫는 주제는 하나, 지배하는 제국에 맞서는 대안적 상상력이다. 우리는 그를 당대 최고의 구약학자로 기억하고 애도할 것이다. - 브렌트 A. 스트런 (듀크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그는 소비주의를, 국가주의를, 백인 우월주의를 이 시대의 우상이라고 못 박았다. 이는 논객의 말이 아니라 예언자의 선포였고, 그 신학은 한 점 흐림이 없었다. - 마이클 W. 딜래시무트 (미국성공회 제너럴 신학교 수석부총장) 그는 어디에서나 ‘파라오’를 보았다. 정치에서, 소비주의에서, 신념을 안락과 맞바꾼 강단에서도. 유진 피터슨이 이 시대의 목회적 상상력을 깨웠다면, 예언자적 상상력을 깨운 이는 월터 브루그만이었다. - 제이슨 G. 에드워즈 (미주리주 리버티 제2침례교회 목사) 권력 앞에서 진리를 말하라. 넘치는 은혜를 기억하라. 불의의 결박을 풀어 주라. 언약의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부르신다. 브루그만은 그 부르심을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해준 사람이었다. - 웨스트민스터 존 녹스 출판사 공식 추모 성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