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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때 있음
I. 케노시스 1 봄의 겪음, 혹은 눈의 자기-비움 2 탈창조: 로셀리니와 시몬 베유 3 기관 없는 아름다움: 인류세 미학서설 4 시대횡단의 불/가능성: 한강의 『채식주의자』 5 무해의 시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코나투스 리얼리즘을 넘어서 II. 종말 6 어쩔 수 없음의 어쩔 수 없음: 박찬욱의 서바이벌리스트 디스토피아 7 미래의 악마적 힘: 구로사와 아키라와 벨라 타르의 종말론 8 방사능 폐기물에도 불성이 있는가?: 드라마 〈체르노빌〉 9 안티-코나투스: 종말론의 재구성 III. 전쟁기계들 10 청년 여성 프레카리아트의 얼굴: 이자혜의 〈미지의 세계〉 11 변신극장: 김범의 사유법 12 전쟁기계 혹은 기괴천사: 양혜규 월드 13 건축학적 백골관: SoA(강예린, 이지훈)의 미래 아키텍처 14 우리가 미래를 보는 눈으로 미래는 우리를 본다: 〈서스펜스의 도시, 워치 앤 칠 3.0〉 15 존재에서 사건을 보는 눈: 박신용의 사진들 16 시대를 횡단하는 민중: 브뤼노 라투르와 미클로시 얀초 에필로그: 빛의 머묾 출처 주 |
金洪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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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횡단의 핵심은 그 특유의 이동성에 있다. 그것은 사회적, 계급적,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시대와 시대를 가로지르는 시간적 이동이다. 횡단은 단순한 이행이나 적응, 또는 정해진 길을 성공적으로 따라가는 여정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선에 구멍을 뚫어 출구를 내는 일이다. 방해와 저항과 마찰을 넘어서야 하며, 방황이나 길 잃음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다. 횡단이 이뤄지는 장소는 사막처럼 광활하고, 방향이 없으며, 황량하다.
--- p.7 케노시스는 신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초월의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가는 것”이다. 자기의 바깥에 존재하는 배고픈 자, 헐벗은 자, 불행한 자와 같은 높이로 떨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초월, 해방, 신성, 구원이나 영생이 아니라 타자들의 비참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에 시몬 베유 영성의 정치적 파괴력이 있다. --- p.67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의지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많은 경우 그것은 폭력적으로 도래하는 박탈, 박해, 불행, 상처, 상실, 트라우마의 결과로 주어진다. 비움이 아닌 ‘비워짐’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케노시스의 가장 중요한 자리가 십자가인 것은 그 때문이다. 영혼의 가장 깊은 중심에 박히는 차가운 금속. --- p.91 발전주의적 유산이 강력하게 잔존해 있는 상황에서도, 당대 사회시스템과 지배적 가치에 저항하면서 자본주의 너머, 탄소 문명 너머, 인간중심주의 너머로 나아가려는 시대횡단적 주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 운동, 철학, 욕망은 인류세 생태 파국을 건너가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이들은 아직도 근대적 정신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과 대립하면서, 아직 오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이 도래할 수 있을지 결코 자명하지 않은 미래의 생태 문명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다. --- p.141 만수를 이끌고 가는 어쩔 수 없음은 대안적 상상, 사고, 행위, 이야기의 불가능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의 어쩔 수 없음은 바깥의 부정이다. 지금 목전에 펼쳐진 현실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바깥으로 나갈 방법도 이유도 없다는 것.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길은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 그것은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감각이다. (…) 그것은 코나투스의 어쩔 수 없음, 코나투스 리얼리즘이다. --- p.191 파국의 시대, 사유의 자리는 대학이 아니고 논문이나 책이 아니다. 논리의 자리, 법의 자리가 아니다. 21세기적 사유의 참된 장소는 망상과 사고와 사망과 재난의 현장이다. 사고의 예감, 걱정, 근심, 공포, 불안의 현장이다. 많이 배우거나 똑똑한 사람들이 사고하는 것이 아니다. 겁 많은 자들, 벼랑에 몰린 자들, 두려움에 떠는 자들이 생각한다. --- p.208 니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동물의 높이로 낮춰, 스스로 매맞는 동물처럼 마비되고 부서져버린 철학자-동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멸시하던 ‘노예’에게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근대 유럽인이 저질러온 잘못을 비는, 노예-이하의 존재로 스스로를 비워낸다. 이런 자기-비움을 통해서 그는 19세기 유럽의 지적, 도덕적, 윤리적 한계 너머, 인간-너머, 백인-너머, 남성-너머로 나아가는 작은 틈 하나를 찾아낸다. --- pp.214-215 영성의 핵심에는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아의 보존, 자아의 강화, 자아의 축적을 꿈꾸는 자아 제국의 근본적 변형이 있다. 영성은 궁극적으로는 반反-자아, 안티-코나투스, 자아의 종말, 자아가 생각하는 세계의 끝, 자아가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 그 지점으로 가는 운동이다. 이런 점에서 영성은 종말론적이다. --- p.257 『채식주의자』는 문학적 종말론이며, 영혜는 20여 년 전에 벌써 한국 사회에 도래한 종말론적 주체다. 이 소설이 세상의 종말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혜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메시지는 복음의 형태를 띤다. 영혜가 왔다. 영혜가 안티-코나투스의 형상으로 도래했다. (…) 이제 영혜와 같은 수많은 종말론적 주체가 현실 속에 나타날 것이다. --- p.282 신애는 이제 구원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허기로 신을 찬양하거나 예배하지도 않을 것이다. 신애는 다만 종찬과 함께 다시 밥을 먹을 것이다. 다시 절망하고 기억하고 몸서리칠 것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스며든 죽음과 이별의 흔적들을 지우지 못한 채, 그렇게 그대로 살아갈 것이다. 신애는 더이상 빛나는 빛을 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두운 빛을 욕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 주변에 머무는 은총의 빛과 더불어 살아나갈 것이다. 죽지 않고 머물 것이다. 빛의 머묾. --- pp.450-451 케노시스의 주체는 무언가를 하거나 겪는 ‘인격’이 아니라 자기-비움이 발생하는 ‘자리’에 더 가깝다.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가 자기-비움을 행하거나 겪는 것이 아니라, 자기-비움의 격렬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주체가 움터 나오는 것이다. --- pp.451-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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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횡단이란 무엇인가
생존주의를 넘어 자기를 비우는 연약한 존재들의 연결 김홍중은 『시대횡단』에서 자기보존과 자기강화를 존재의 근본 원리로 설정해온 서구 근대의 지배적 인간관을 비판하며, 자기를 축소하고 비우는 케노시스(kenosis) 존재론을 깊이 파고든다. 그가 보는 자기-비움은 단순한 자기희생이나 금욕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와 손상, 파괴의 경험을 겪어나가며 타자에게 자신을 열게 되는 극한의 경험이자, 자기보존과 확장을 향한 맹목적 충동이 중단될 때 일어나는 자아의 근본적 변형이다. 김홍중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생태 파국이 코나투스 존재론의 환상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고 본다. 계속 존재해나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힘을 줄이고, 자기를 비워야 하는 기묘한 문명적 시간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몬 베유, 레비나스, 들뢰즈를 경유해 한강과 박찬욱의 작품에서 시대횡단자의 징후를 읽다 이러한 사상적 탐색은 영성과 미학 사이의 유기적 대화를 통해 전개된다. 우선 김홍중은 시몬 베유와 레비나스의 사유에서 자기보존 충동의 질주를 중단시키는 안티-코나투스의 영성을 읽어낸다. 또한 한강, 양혜규, 김범, 벨라 타르 등의 작품에서는, 근대의 지배적 가치를 부정하며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대횡단자의 형상을 발견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시대횡단은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미래에 적응해나가는 ‘이행’이 결코 아니라, 우리 시대와 아직 알 수 없는 미래 사이에 놓인 심연을 건너는 필사적인 시도를 가리킨다. 시대를 횡단하려는 자에게는 정해진 길도, 확실한 방향도, 성공의 약속도 없다. 오직 현시대의 견고한 시스템에 균열과 출구를 내는 실험이 있을 뿐이다. 오해, 박해, 방황, 우회, 실패 속에서 횡단선(線)은 언제나 가까스로 만들어진다. 김홍중은 이 책에서 다음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과 씨름하며 이러한 시대횡단의 사유를 구체화하고 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며 동시에 아름다운가”_한강 한강이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던진 이 물음은 김홍중이 인용하는 시몬 베유의 다음 문장과 공명하며 책을 가로지른다. “배들이 종종 침몰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바다가 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한강과 베유 모두 아름다움의 이면에 도사린 고통과 죽음과 어둠을 응시한다. 아름다움은 생명의 충만함에서뿐 아니라, 상실과 소멸, 세계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될 수 있다는 자각 속에서 더욱 예리하게 지각되기도 한다. 파국과 아름다움은 깊이 얽혀 있다. 소멸 직전의 사물, 상처 입은 인간, 종말의 문턱에 선 세계가 끔찍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는 곤혹스러운 사실이 이를 역설한다. 파국에 잠긴 세계가 드러내는 이 ‘종말론적’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인류세의 경계를 넘는 시대횡단을 위한 감각적 출발점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인가”_레비나스 레비나스가 던진 이 질문은 근대적 인간관의 근본 전제를 뒤흔든다. 자신을 보존하고 강화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의 ‘제국주의적’ 존재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묻는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른 생명의 살이며,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은 다른 존재의 자리를 빼앗아 차지한 곳이 아닌가? 우리의 ‘있음’은 다른 존재의 ‘없어짐’을 전제하지 않는가? 이처럼 나의 생존이 타자의 파괴를 요구한다면, 과연 나에게 존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김홍중은 이 질문을 기독교 신학의 케노시스, 즉 자기-비움의 독트린과 연결시킨다. 자기-강화의 충동을 거슬러, 스스로의 힘과 권리를 거두어들이는 존재. 김홍중은 바로 이 ‘비현실적’ 형상에서 안티-코나투스라는 미래의 주체성을 예감한다. “방사능 폐기물에도 불성(佛性)이 있는가”_나카지마 타카히로 김홍중이 씨름하는 세번째 질문은 일본 철학자 나카지마 타카히로가 던진 위의 물음이다.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 대승불교의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우주의 물질인 방사능 역시 불성을 갖고 있다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가공할 살상력과 파괴력을 지닌 방사능 폐기물에도 정말 불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살을 녹이고, 피부를 태워버리는 방사능을 자비로운 부처라 부를 수 있는가? 김홍중은 이 질문에서 21세기 인간 조건의 근본적인 분열을 발견한다.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포스트휴먼적 사유 사이에 가로놓인 해소되지 않는 균열이 그것이다. 저 질문은 우리를 사고하도록 강제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며,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민중의 자리는 비어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민중은 결여되어 있다. 민중은 보이지 않는다. 민중의 자리는 비어 있다. 그러나 그 비어 있음이 민중의 존재방식이다. 그들은 지배적 힘에 밀린 채, 식별 가능성 너머에서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소수자로 잔존하다가 징후처럼 불현듯 출현한다. 시대횡단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아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의 민중을 이루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미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한강의 영혜를, 이자혜의 미지를, 박신용이 촬영한 쓰레기 산과 강예린과 이지훈이 주목한 빈집들을 만나고 있지 않은가? 21세기의 리얼리티를 겪어가면서, 우리 자신이 바로 그 결여된 민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조금씩 더 확실히 깨달아가고 있지 않은가? 김홍중의 『시대횡단』은 결여된 민중을 부르는 책이다. 그들을 호명할 새로운 언어를, 그들의 삶을 엮어낼 이야기와 우화를 창조하려는 책이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사회사상이며, 그것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영성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