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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나목(裸木)의 사상 - 박수근과 박완서의 경우 2장. 생존주의 욕망기계 - 김기영의 시네마 3장.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란 무엇인가? 4장. 생존주의적 통치성과 근대의 꿈 - 박정희를 중심으로 5장. 한국 자본주의 정신 - 정주영을 중심으로 6장. 신자유주의적 서바이벌리스트의 초상 7장. 생존주의, 사회적 가치, 그리고 죽음의 문제 8장. 민중의 자기초월 - 민중신학에서 생태계급까지 9장. 21세기 생존주의의 재구성 - 공(公), 케노시스, 인류세 참고 문헌 출처 |
金洪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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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을, 죽음의 방식을, 존재와 체험의 틀을 만들어간 그 서글프고, 야비하고, 모질고, 집요하고, 잔인한 질문. 살아남는다는 것, 생존한다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학자들의 연구실이나 도서관이 아니라 시정(市井)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철학적 질문. 생존이란 무엇이냐?
--- p.7 ‘내가 살아남았다’는 명제는 ‘그들이 죽었다’라는 명제와 뗄 수 없이 묶여 있다. 환언하면, 나의 생존과 동일시되어야 하는 것은 누군가의 죽음이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 이 인식이 윤리적 사고의 시발점이다.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제기된다. 즉, 타자의 죽음과 나의 생존이 분리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과연 자신의 생존을 기뻐할 수 있는가? 견딜 수 있는가? --- p.27 생존한다는 것은 자동사적 사태가 아니라 타동사적 사태다. 생존은 목적어가 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언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타자에 의한 자기(自己)의 파괴와 상실 속에서만, 서바이벌은 성립된다. 모든 생존자는 생명을 끌고 죽음 쪽으로 최대한 가까이 감으로써,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 살아난 자들이다. --- p.50 우리는 현기증 나는 변화를 겪어낸 사회를 산다. (중략) 말하자면, 많은 한국인들은 발전주의자이며, 민주주의자이며, 동시에 신자유주의자다. (중략) 어떤 점에서는 지독하게 경쟁적이며, 다른 점에서는 평등 지향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내심 은밀하게 여전히 개발과 발전을 욕망한다. 이러한 분열증적 다각성은 한국적인 것의 중요한 특성이다. --- p.103 성장이 영원할 것이라는 암묵적 신념, 하면 된다는 빈대의 마음, 자연을 정복하여 낙원을 구성할 수 있다는 파우스트 콤플렉스, 경제가 삶의 모든 것이라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이제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지 않으면 새로운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이른바 재귀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의 역설이다. --- pp.188-189 그렇다면, 이런 생존주의적 근대가 가져온 한국사회의 일반적 풍경은 과연 무엇일까? (중략)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정당하고, 옳고, 합리적인 것이라는 규범적 정당성을 얻게 되면, 사실상 사회적 가치는 텅 빈 허상으로 인지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략) 사회적 가치를 억압하게 되면, 그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사회적 가치가 억압된 상태에서 ‘사회적인 것’은 어떻게 존속하는가? --- pp.240-241 가혹한 경쟁을 통해 서바이벌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을 삶의 일반적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회는 ‘정글’이다. 생존 압박에 시달리며 타자를 누르기 위해 삶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협력이란, 희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 p.243 왜 페미니스트가 비건이 되고 동물권에 더 빨리 민감해지고 생태주의자가 되는가? 왜 겪는 자들이 겪는 것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인간-너머의 겪음까지 실천을 뻗쳐 가는가? 피해자들이, 무너진 자들이, 아픈 자들이 왜 함께 움직이는가? 파괴 관계에서의 위치성, 겪는 자들의 감수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 p.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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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서였음을 왜 말하지 않았던 걸까?
한국의 20세기를 이끌었던 의식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우리가 살면서 제일 중요하고 치열하게 좇았던 가치와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사회의 집합 심리를 예각적으로 탐구해 온 사회학자 김홍중은 전쟁, 독재와 민주화, 그리고 급격한 경제성장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마침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생존주의(survivalism)’를 제시한다. 생존주의에 의하면, 세계는 정글이다. 경쟁과 도태의 공간이다. 생존주의자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따라서 생존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가치들은 배제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한국의 20세기는 살아남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이에 방해되는 것들을 피하거나 제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생존주의로 특징지어진다. 그동안 한국의 근대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이 있었다. 서구의 제도들을 빠르게 수용하며 근대화 과정이 복잡하게 혼재된 ‘압축적 근대성’, 정치와 경제에 과도한 중심성이 부여되는 ‘환원근대’, 냉전 시기의 전쟁과 군대를 중요시하는 ‘군사화된 근대성’, 유교를 주된 문화적 자원으로 두고 동아시아 유교 문명의 큰 틀 위에서 한국 근대를 바라보는 ‘유교적 근대성’ 등이 다. 그런데 이 이론들은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시간을 직접 겪어내고 살아낸 시민들의 삶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서글프고, 야비하고, 모질고, 집요해야만 했던 순간들 면면에 가닿지 않았다. 분명히 존재했던 순간들임에도 우리는 왜 이 순간들을 움켜쥐지 않았던가? 살아남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음에도 이야기되지 않느라 한국의 근대, ‘K-모더니티’의 문은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이 책이 제시하는 생존주의라는 열쇠를 통해 이제 우리는 문을 완전히 열고 20세기 한국사회를 비로소 완연히 이해하고 그다음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김홍중은 한국사회에서 20세기 생존주의에 세 차례의 큰 변곡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야기한 충격 속에 형성된 ‘만국공법(萬國公法) 생존주의’. 둘째,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냉전체제에서 형성된 ‘냉전 생존주의’. 셋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자유주의 생존주의’다. 이 책에서 특히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냉전 생존주의다. 김홍중은 박정희의 통치 사상을 생존주의적 통치성의 관점으로, 정주영이 꿈꾼 한국 자본주의 정신을 생존지향적 발전주의로 해석한다. 더불어 김홍중은 미술과 문학 텍스트에 형상화된 생존주의를 함께 짚어 낸다. 전후 폐허 속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생존해 나가는 한국 민중의 생명성을 그린 박수근과 박완서의 ‘나목(裸木)’ 이미지를 분석하고, 김기영 영화의 근원적 상상력을 ‘살아남는 것’에 대한 욕망의 표현으로 해독하기도 한다. 한편, 생존주의가 팽배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인간 삶에서 궁극적으로 옳고 바람직하며 타당한’ 가치는 어떻게 추구되는가? 추구될 수 있기야 한 걸까? 생존주의로 가득한 사회에서 이러한 사회적 가치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사회적인 것의 공동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김홍중은 안병무와 서남동의 민중신학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추구하며 타자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새로운 생존의 상상력을 소개한다. 이제 근대를 넘어 21세기로, 비로소 오늘로 내일로 한국 근대의 간판 사상은 ‘존재’도 ‘실존’도 아닌 ‘생존’이다. 생존은 근대 한국인의 삶을 규정한 가장 근본적 문제이자 강박관념이자 이념이다. 한국사회의 성취와 모순, 빛과 그림자, 가능성과 절망을 모두 끌어안은 근원적 사상이자 서글프면서도 야비하고 잔인한 질문이다. 즉, 우리의 근대는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을 시도한 이 책은 한국 근대에 대한 치열한 자기성찰이자, 한국사회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면서, 동시에 21세기의 새로운 한국사회의 가치와 욕망에 대한 실험적 탐색의 기록이다.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우리가 살아냈고 앞으로 살아낼 시간을 이해하는 것은 21세기 한국사회가 좇고 있는 가치와 욕망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이해하는 한편으로. 지금 우리가 향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디로 향할 것인지 성찰하고 가늠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