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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龍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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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어렴풋한 위화감을 풍기는 그 책장 앞에 가서 섰다. 저절로 흠칫했다. 줄줄이 꽂힌 책의 제목에 ‘살인’, ‘잔혹’, ‘지옥’, ‘엽기’, ‘고문’, ‘학살’ 같은 오싹한 단어가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느낌표가 유난히 많고 폰트도 일일이 피투성이를 모방한 것처럼 과장스럽다.
“이런 거 좋아해?” 도쿠야마는 등 뒤에 누워 있는 하쓰미에게 물었다. 하쓰미는 고개를 들어 팔베개를 하고 “이런 거라니, 뭔데요?”라고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코에 걸린 목소리를 냈다. “저기 ‘살인의 뭐뭐’라든가 ‘학살의 뭐뭐’라든가 ‘고문 백과전서’라든가, 어쩐지 악몽을 꿀 것 같은 책들이잖아.” “아, 그거요?” 하쓰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요.”라고 침대 위에서 큰대자로 우우우 기지개를 켜고 나서 말했다. “거기에 인간의 악의를 모두 다 진열하고 싶어요.” --- p.65 “역시 괴짜구나, 너. 아주 상당히 괴짜야.” “네, 근데 그만두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그만둘게요. 내다버리라고 하면 내일이라도 전부 다 버릴 거예요. 어차피 물건일 뿐이니까.” “나는.” 하쓰미가 말을 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달라, 그런 말은 안 해요. 절대로 안 할 거예요.” “아니, 자, 잠깐만.” “안 돼요?” “안 되다니,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 그보다 너는 지금 그대로가 좋아. 지금 그대로 괜찮다고. 아니, 그보다 우리, 서로 안 지도 얼마 안 됐고, 개성적인 면도 뭐랄까, 좀 괴짜라서 좋아, 재밌어. 그야 약간 멈칫한 건 사실이지. 여자 방에서 〈흠뻑 젖은 욕정〉이라는 포르노 비디오를 발견하면, 그야 그렇잖아?” --- p.67~68 “이 잡지.” 하쓰미는 책장 아랫단에서 대형 사이즈의 경제 잡지를 꺼냈다. “여기 특집호에 이 시대를 주도하는 경영인, 성공인 들의 반생이니 인터뷰니 하는 게 실려 있는데, 이것도 진짜 지독해요. 지독하고, 대단해요. 그럴싸한 거짓말만 한가득. 또는 참 잘도 이런 말을 지껄이는구나, 감탄이 터지는 폭언들. 하긴 블랙기업이니 격차사회라는 게 주목받기 전이니까 이런 말도 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 끔찍해요. 옛날 『여공애사』의 경영자들과 기본적으로 달라진 게 전혀 없어요. 부정(不正)은 방편일 뿐이고 법률은 족쇄로 써먹고, 아무튼 자신들이 하는 일은 국가를 위한 것이니까 찍소리하지 마라, 우울증도 과로사도 노동자의 자기 책임이다, 마음대로 앉지 마라, 마음대로 쉬지 마라, 마음대로 밥 먹지 마라, 마음대로 살지 마라, 마음대로 죽지 마라, 그런 식이에요. 놀고 있죠. 놀고 있고, 진짜 저질이고 천박해요.” 이런 이야기를 아주 즐겁게 하는구나, 하고 도쿠야마는 느꼈다. ‘끔찍하다’든가 ‘진짜 저질’이라는 말을 할 때, 하쓰미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심지어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 p.71~72 똑같은 놀이에 한없이 열중하는 아이처럼 하쓰미는 간단히 덫에 빠져들었다. 둘이서 알몸으로 침대 시트를 둘둘 말고 누워 있을 때 시력 좋은 도쿠야마는 책장의 책등을 보며 적당한 책을 골라냈다. 이를테면 “『중국의 3대 악녀』는 어때?”라고 운을 떼면 하쓰미는 열의를 담아 그 상세한 내용을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도쿠야마는 시트 속으로 기어들어가 하쓰미의 곳곳을 더듬었다. ‘불경(不敬)’이라는 말이 수없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뭐가 어찌 됐건 즐거움이 더 컸다. 이야기를 끝내고 마침내 장난꾸러기를 찾아냈다는 듯이 하쓰미가 시트 속에 기어들어간 도쿠야마의 어깨를 와악 하고 깨물면 그 길로 덮쳐들어 한 덩어리로 시트를 휘감으며 드잡이를 하는 장난에 뛰어들고, 그러다가 점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평범하게 섹스를 시작하는 것보다 한층 각별하게 쾌락이 깊었다. 이런 도입부가 두 사람의 습관이 되었다.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타고난 것인지, 하쓰미는 매번 할 때마다 똑같은 패턴에 널름 걸려들었다. 학습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그런 점이 또한 도쿠야마에게는 너무도 재미있게 느껴져서, 인륜에 어긋난 이 놀이를 그만둘 수 없었다. --- p.90~91 “아무튼 행복은 꿈에 지나지 않고 고통이야말로 현실이에요.” 도쿠야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쓰미는 말했다. “아예 죽는 건 어때요?” “참내, 뭔 소리야.” 도쿠야마는 웃었다. 강가의 다른 커플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들은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 “아니, 진짜예요. 오래 살아봤자 좋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점점 나빠지기만 하지. 죽을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젊어서 아직 상처가 적은 동안이 좋아요.” “얘가 진짜, 뭔 소릴 하는 거야.” “죽읍시다. 동반자살, 그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 방법이에요. 유일한 방법,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의지와 목적과 결과가 일치하고 게다가 성공의 순간이 그대로 영원이 되는 유일한 아이디어. 동반자살하자고요. 응? 응?” --- p.164 “도쿠야마, 웬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를 해?” 가타오카는 말했다. “소문에 듣던 대로 역시 좋지 않은 여자 친구인 모양이구나.” 이건 또 뭔가, 소문이라니? 도쿠야마는 내심 씁쓸했다. “어떻게 할 거야, 그 여자 친구하고?” “어떻게 하기는, 뭘요? 그냥 평범하게 결혼하고 살겠죠, 하쓰미하고.” 전에 후지쿠라에게 들은 말을 이번에는 자신의 주장처럼 대답했다. 가타오카가 이번에는 도쿠야마의 어깨에 손을 척 얹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또 우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침울해진 얼굴이 어슴푸레한 가운데 떠올랐다. “아무튼 죽어도 괜찮다는 그 얘기, 좋지 않아.” 가타오카가 말했다. “도쿠야마에게 좋지 않아. 아니, 그보다 도쿠야마답지 않아. 너답지 않다고, 그런 건. 역시나 악녀였네.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악녀라니…….” 반사적으로 도쿠야마는 마녀사냥으로 화형에 처해지는 하쓰미의 모습을 연상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하쓰미였다. “죽는다느니, 그런 소리 못하게 할 거야. 절대로 내가 못하게 하겠어. 진심이건 농담이건, 내가 절대로 그런 건 허락 못해.” --- p.188~189 아르바이트를 막 시작했을 무렵, 도쿠야마는 히우라를 동경하고 우치바에게 의지했다. 양쪽 다 실수였다고 도쿠야마는 이제 마음을 비웠다. 우정을 나누려 했던 것조차 잊고 싶은 과거였다. “비겁한 놈이야, 넌.” 도쿠야마는 말을 이었다. 하쓰미의 빙의가 느껴졌다. “너 같은 놈이 유대인 싣고 아우슈비츠로 달리는 열차를 태연히 손 흔들며 배웅할 놈이지. 후투족으로 태어나면 투치족을 죽이고 투치족으로 태어나면 후투족을 죽이고, 민족 정화라는 명목의 성폭행 수용소에 동료들과 몰려가 킬킬거리면서 그 짓거리를 할 놈이야. 그러고는 ‘어쩔 수 없잖냐, 인간의 본성이니까’라는 걸로 뭉개버리지. 시대가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져도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까 딱히 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라는 걸로 뭉개버려. 그런 놈이야, 너란 놈은.” 세 사람이 일제히 입을 헤벌리고 멍해져버린 것을 도쿠야마는 피부로 느꼈다. --- p.21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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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엽기, 고문, 학살…… 세계의 잔혹사와 함께하는 기묘한 섹스
사신 같은 여자에게 빠져든 한 남자의 파멸 본능 이자카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류 대학을 목표로 공부 중인 삼수생 도쿠야마는 이자카야 동료들을 따라 찾은 단란주점에서 그곳의 넘버원인 열아홉 살의 하쓰미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넘버원에 걸맞은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는 도쿠야마를 보자마자 어찌 된 일인지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그 기묘한 태도에 화가 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도쿠야마였지만 그녀가 몰래 건넨 명함을 펴보지도 않고 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힘들거나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주세요. 언제든지.’ 이상한 메시지에 기겁하여 하쓰미를 냉대하는 도쿠야마의 태도는 아랑곳없이 그의 생활 깊숙이 파고드는 하쓰미. 도쿠야마는 하쓰미가 엄청난 지식과 기억력으로 황홀하게 그려내는 ‘세계의 잔혹사’를 들으며 기묘한 섹스에 탐닉한다. 찐득하게 달라붙는 그녀의 염세적 세계관에 침식된 그는 결국 가족, 친구, 동료 등 외부와의 연결 고리를 하나씩 끊어간다. 몸도 마음도 샴쌍둥이처럼 붙어버린 두 사람은 기어이 한없이 투명해져만 가는 운명을 향해 몸을 던진다. 그 운명의 끝에서 그들이 맞닥뜨릴 삶의 비의란 과연 무엇일까. 『마농 레스코』를 뛰어넘는 희대의 로맨틱 ‘악녀 소설’ 역사상 가장 모던하고 세련된 ‘동반자살 스토리’ 탄생!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결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차라리 좀 더 깊고, 절실하고, 뼛속까지 엮인 두 사람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단순히 강렬하고 뜨거운 사랑이라고 정리하기에는 미진한 고통스러운 맺어짐과 지옥 속의 극락, 달콤한 꿀 속에 빠져 익사하는 것과도 같은 충격적 스토리가 펼쳐진다. 하쓰미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인간의 추악하고 교활하며 야비하고 쩨쩨한 면을 언제나 있는 그대로 비추고 있다. 허세로 가득 찬 인간, 우월감을 감추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인간, 약자를 무시하고 착취하면서도 겉으로는 위선을 떠는 인간 등을 거침없이 논파하고, 그들의 상처를 도려내 땅바닥에 내던져버린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추함을 손바닥 위에 놓고 데굴데굴 굴리는 하쓰미의 모습은 쾌감과 공포감을 동시에 선사하며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뛰어난 문학은 때로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분명 나 하나뿐일 거야’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작품의 등장인물을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나 자신의 내면을 대변한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하쓰미의 결벽함, 도쿠야마의 우유부단함, 가타오카의 비겁함, 히우라의 지질함을 우리는 저마다 지니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무시무시한 각성 효과를 나타낸다. 그저 소설을 읽고 있을 뿐인데 흙투성이 손이 들어와 내장을 휘젓는 듯한, 독자를 코너에 몰아넣고 이렇게 생겨먹은 자신의 인생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묻고 또 묻는 문학 본연의 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용덕 작가가 그려낸 절망적인 풍경에 한 줄기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은 절망을 철저히 지켜본 끝에 다다른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만큼이나 환멸과 타락에 빠진 끝에 찾아낸 ‘희망’은 세간에 흔히 떠도는 싸구려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소설의 가치, 문학의 가치는 이런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추천사 엄청난 역량이다. 지금까지의 일본 문학과는 이질적인 체력으로 서술되었고 나는 이 점에, 과장스럽게 말하자면, 압도되었다. - 호사카 가즈시(소설가) 이 소설의 덫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주술적인 언어의 힘에 의해 봉인이 풀려버린 ‘카운터 악의’의 공포와 쾌락. 하쓰미가 도쿠야마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모습은 세계를 멸망시키는 행위의 상징이다. 그 과정을 언어의 힘으로 보여주려는 도전은 그야말로 문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안이한 희망 의존증을 과감히 베어내는 힘이 이 소설에는, 있다. 참된 희망은 그 끝에 존재한다. 두말할 것 없는 수상작. 호시노 도모유키(소설가) 일단 이 세계에 말려들면 빠져나올 수 없다. 오사카 주소(十三)판 『실락원』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으스스한 이야기에 못 박혀버렸다. - 야마다 에이미(소설가) 이 무슨 독(毒)인가. 세계를 고문하는 듯한 이 허무와 저주. 박수! - 후지사와 슈(소설가) 폭발적인 질주와 그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하는 힘이 서로 다투는 가운데 태어난 작품. 주인공이 걸어가는 암흑의 여행길에 함께 빨려 들어가고, 그렇게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주위의 풍경이 평소와는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야말로 아득히 먼 곳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 《마이니치 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