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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
타인의 위치 사랑받은 사람 이사 우리 사이 은수와 현정 작가의 말 해설 | 타자를 여행하는 방법들 _ 권영빈(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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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검정고시 준비는 난이도 높은 던전을 공략하는 것과 비슷했다. 자본과 스펙, 기본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더 힘들었다. 매뉴얼을 충실하게 지키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 수업 첫날이 기억난다. 그날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유 의지를 갖고 노트 필기를 했던 날이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는 단어를 공부했다. 300만 년 전에 살았던 인류의 조상. 직립 보행을 하고 간단한 도구를 사용했단다. 작은 무리를 지어 살았고 성 역할을 분담했다. 그날 필기를 하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기를 낳아 기른 최초의 여자 인류였다. 등과 앞가슴에 아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구부정하게 걷는 여자 조상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여자가 느린 동작으로 눈앞에 어른거리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해수」중에서 카페 출입구가 시끄러워진다. 송진아가 아이들을 데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녀의 아이가 큰 소리로 아랍어를 외치며 달려온다. “아나 아흐부카.”(사랑해.) 아이는 부쩍 웃음이 많아지고 표정이 밝아지고 있다. 그녀는 양팔을 벌려 품속으로 달려드는 아이의 자그마한 몸통을 껴안는다. 흘깃 돌아다본 벽 거울 속에 무함마드가 서 있다. 그는 냉랭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의 포옹을 지켜보고 있다. 갑자기 그녀는 알 수 없는 비감에 휩싸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쩐지 오늘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타인의 위치」중에서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2차선 도로를 건너 주차장으로 향했다. 시간이 꽤 지나 버렸다. 지금쯤 딸아이가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며 불평하고 있을 것이다. 휴게소와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가 모친, 이었다. 그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을 터였다. 그는 계단참에서 멈춰 섰다. 그가 멈추자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잡은 손을 떨치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사랑받은 사람」중에서 공동 연구실 안에서는 소음과 실내 온도를 둘러싸고 신경전과 말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누군가에겐 아무렇지 않은 문 여닫는 소리가 다른 누군가에겐 견디기 힘든 소음이었고, 누군가에게 싸늘한 실내 온도가 다른 이에겐 적당하게 여겨졌다. ---「우리 사이」중에서 “왜 그러는 건데?” “뭐가?” “아픈데… 왜 편하게 있질 않냐고.” 현정은 대답 대신 소파에 앉은 친구의 눈을 바라보았다. 현정은 자신의 행동에 패턴이 있다는 것도, 그 이유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은수 역시 딱히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꼿꼿이 앉아 있는 현정이 몹시 불편해 보였고, 몸도 편치 않은데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나한텐 이게 편해.” “그렇구나!” ---「은수와 현정」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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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덕의 『우리 사이』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관계를 이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작가는 책 끝에서 묻는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 걸까요?” 이해하려는 노력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다르다는 작가의 말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들을 읽는 길잡이가 된다. 소설은 그 차이를 성급하게 좁히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에게 다가가거나 거리를 다시 정하는 순간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인물의 처지는 그가 사용하는 말에서 드러난다. 「해수」의 화자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아이를 낳은 십 대 미혼모다. 그녀는 시설 생활과 검정고시 준비를 온라인 게임의 어휘로 이야기한다. 시험 공부를 “난이도 높은 던전”을 공략하는 일에 빗대는 말에는 어린 화자의 생활 감각과 공부의 어려움이 함께 담긴다. 익숙한 게임의 언어로 낯선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해수의 목소리가 생생해진다. 검정고시 첫 수업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배우고 아기를 매단 여자 조상을 상상하는 장면은, 배운 내용이 자기 삶과 겹쳐지는 순간을 보여 준다. 「타인의 위치」의 무함마드는 “나는 녹음기예요.”라고 말한다. 김 선생의 지시에 따라 단어와 문장을 반복하는 원어민 강사의 처지가 이 한마디로 전해진다. 박 선생과 그는 영어와 번역 앱을 이용해 대화한다. 서로의 말뜻을 확인하고 웃기도 하지만, 감정까지 같은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박 선생과 무함마드가 서툰 대화로 가까워지는 과정과 그 안에 남는 어긋남을 함께 보여 준다. “아나 아흐부카”라는 말의 반복은 특히 인상적이다. 무함마드가 중얼거릴 때에는 번역이 없지만, 박 선생의 아이가 외칠 때에는 “(사랑해.)”라는 풀이가 붙는다. 아이를 안은 박 선생은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무함마드를 보고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같은 말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으면서, 소설은 인물의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도 두 사람 사이의 변화를 전한다. 「사랑받은 사람」에서는 아내의 오디오북 낭독이 남편의 시선과 나란히 놓인다. 남편은 “인간 종에 대한 혐오.”라는 문장을 듣고 소름이 돋는다. 그는 아내가 시가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를 이야기할 때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고 말해 온 사람이다. 아내가 읽는 글과 부부의 지난 생활을 함께 읽으면서, 독자는 남편이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아내의 처지를 돌아보게 된다. 낭독하는 목소리를 통해 인물의 관계를 비추는 구성이 돋보인다. 「우리 사이」의 공동 연구실에서는 문 여닫는 소리와 실내 온도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진다. “누군가에겐 아무렇지 않은 문 여닫는 소리가 다른 누군가에겐 견디기 힘든 소음”이다. 함께 쓰는 공간의 작은 불편을 통해 사람마다 다른 감각과 생활 방식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황은덕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법한 소리와 몸짓을 관계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옮겨 놓는다. 「이사」에서 미숙은 소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진경은 목구멍의 이물감으로 고통받는다. 소설은 두 사람의 생활과 기억을 따라가며 그들이 겪는 불안을 드러낸다. 「은수와 현정」에서는 관절 통증 때문에 병뚜껑을 열거나 몸을 움직이는 일이 어려워진다. 이러한 신체의 감각은 인물의 일상을 실감 나게 전하고, 주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보여 준다. 공간을 다루는 방식도 구체적이다. 「해수」에서 택시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 「타인의 위치」에서 어학원과 사원으로 이어지는 길, 「사랑받은 사람」에서 휴게소와 강변을 가르는 도로는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 선명해진다. 특히 「사랑받은 사람」에서 남편은 도로 건너에 선 아내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돌아온다. 그러나 모친의 전화에 그가 계단참에서 멈추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맞잡은 손을 떨치고” 내려간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짧은 동작 안에 응축되는 장면이다. 「우리 사이」의 김에게도 움직임의 변화가 있다. 지도 교수의 ‘바로’라는 말을 곱씹고, ‘지체 없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던 그는 그날 밤 호출에 응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짐짓 쿵쾅거리며” 들어간다. 조심스럽던 몸짓이 달라지는 모습을 통해, 소설은 관계를 대하는 김의 태도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는 걸 전한다. 인물의 마음을 보여 주는 시점의 구성은 소설집의 중요한 장점이다. 「타인의 위치」는 박 선생과 무함마드의 내면을 오가고, 「이사」는 딸 수현에게서 어머니 진경으로 이야기의 중심을 옮긴다. 독자는 각자의 사정을 읽으면서 한쪽의 시선만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관계를 살피게 된다. 「사랑받은 사람」은 남편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생각과 아내의 행동을 함께 읽도록 한다. 작품마다 다른 서술 방식이 인물을 이해하는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은수와 현정」에서 현정은 병원에 같이 가겠다는 은수의 말을 반가워하지만, 대답은 밋밋하게 한다. 그러고는 신맛 나는 과일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자두와 살구와 복숭아를 주문한다. 은수는 냉장고에서 그 과일을 꺼내 씻고 접시에 담는다. 소설은 현정의 마음을 먼저 보여 준 뒤 두 사람이 과일을 나누는 장면을 놓는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배려가 일상의 사물과 행동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서로 다른 생활을 해 온 두 친구는 상대의 취향과 습관을 기억한다. 에릭 클랩튼의 노래를 들으며 예전의 번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오랜 교류가 느껴진다. 두 사람의 우정은 큰 고백이나 극적인 사건보다, 함께 듣는 음악과 주고받는 말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문학평론가 권영빈은 해설에서 “‘곁에 있음(besideness)’으로 그의 자존을 지켜 주는 것”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작품의 아침 주방은 그 말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 준다. 현정이 생수병과 밀폐 용기를 내밀며 “이거 좀 열어 봐.”라고 하면 은수는 뚜껑을 열어 준다. 은수는 현정이 일러 주는 대로 떡 비닐을 찢고 콩고물을 묻힌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아침 식사를 함께 마련한다. 전날 밤, 은수는 아픈데도 꼿꼿이 앉아 있는 현정에게 왜 편하게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현정은 “음… 나한텐 이게 편해.”라고 대답하고, 은수는 “그렇구나!” 하고 수긍한다. 짧은 문답 안에서 상대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드러난다. 은수가 집을 떠날 때 현관문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은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쉰다. 소설은 그 한숨의 뜻을 하나로 정하지 않는다. 독자는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과 서로 다른 생활을 떠올리며 그 장면에 머물게 된다. 황은덕 작가의 소설 『우리 사이』는 관계를 설명하는 말뿐 아니라 병뚜껑을 열어 주고, 과일을 씻고, 상대의 대답에 수긍하는 행동을 오래 바라본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작가의 물음은, 이러한 작은 몸짓을 통해 독자의 일상 가까이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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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록지 않은 현실에 치여 애초에 깊은 갈등도, 화해도 있을 수 없는 무심한 관계가 상수가 되어 버린 오늘, 우리는 어떤 형태로 서로를 돌볼 수 있을까? 그것은 누군가가 타자성/화의 회로에 홀로 갇히지 않도록, ‘곁에 있음(besideness)’으로 그의 자존을 지켜 주는 것으로도 가능할 수 있다. ‘우리’-‘사이’를 지탱하는 하이픈이 그렇게 하나의 윤리학을 창출해 나가는 과정을 황은덕 소설은 아마도 쉬지 않고 탐색할 것이다. 문학이 타자를 여행하는 방법이 되어 말이다. - 권영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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