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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_개성에서 고려인을 만나다
프롤로그_고려 500년의 도읍지 1장_모든 길은 개경으로 개경 풍수, 그 오해와 진실 작고 좁은 물줄기 모든 도로의 출발점 국제무역항, 벽란도 2장_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안으로는 황제, 밖으로는 국왕 고려의 관료들 속세를 거닐던 승려 외국어로 출세한 역관들 금권유착의 시장질서 문화충돌 속의 외국인들 출세한 노비들 조선시대 개성 출신의 문장가들 3장_당찬 여성들의 삶 맹렬 여성들 요즘 못지않은 어머니들의 교육열 개방적인 성의식과 혼인 풍습 여인 임경애 기녀들의 사랑과 애환 4장_개경의 일상 풍경 주거지 선택에도 실속을 따지다 집안으로 끌어들인 자연 고려시대에도 부동산 투기가 있었을까 변화하고 활기 넘치는 시장 풍경 오과와 백과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 채소 물이 부족한 도시 사나운 질병, 열악한 의술 5장_여가와 풍속 개경에도 팔경이 있었다는데 죽림고회에서 해동기로회까지 고려시대의 스포츠 개경의 설날 풍경 고려 최고의 길몽, 오줌 꿈의 진실 6장_불교와 민간 신앙 민가보다 많은 절 민관동락의 축제 팔관회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임금님 도읍지의 수호신 송악신령 개경의 북망산 에필로그_개성답사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
The Organization of Korean Historians,韓國歷史硏究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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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적극적으로 추진된 남북교류, 특히 경의선 연결과 개성공단 건설로 개성은 아무나 갈 수 없는 땅에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 물론 아직 미국과 북한 혹은 남과 북 사이에서 대립과 타협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제 동북아시아의 평화정착이라는 시대적 과제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보인다.
개성은 고려왕조의 수도였다. 특히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수도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명실상부한 통일 왕국으로서 전국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개경은 고려의 모든 사람이 모여들고, 고려의 모든 이야기가 흘러드는 곳이었다. 우리는 이곳 개경 사람들의 삶을 통해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 머리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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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은 지방문화가 모이고 외국문화를 받아들이는 열린 도시였다. 개경에는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였으므로, 자연히 여러 지방의 문화가 함께 뒤섞이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개경은 문화의 융합 공간이었다. 지방문화뿐 아니라 외국, 특히 송나라와 원나라 등의 문화가 수입되는 창구도 역시 개경이었다. 개경은 지방문화를 융합하고 외래문화를 수입하여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고 수준을 높여가는 중심지였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개경의 문화는 지방으로 다시 확산되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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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왕조의 도읍지, 개경의 생활사
개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 시험운행에 성공한 남북열차의 북쪽 종착역은 개성역이다. 개성공단, 개성관광에 이어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천태종과 조선불교도연맹이 주도하는 개성 영통사 성지순례도 조만간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난 19일 남북 공동발굴단이 만월대를 중심으로 고려의 500년 도읍지에 남겨진 고려문화의 정수를 찾기 시작했다. 오랜 단절에 대한 아쉬움을 채우기에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최근 남북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개성이 있다. 천년 전 통일왕조의 수도 개경에 다시금 통일의 기운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생활사란 정치사를 중심으로 한 왕조사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이다. 당대인들의 실제 삶을 탐색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사람들이 당대의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갔고 받아들였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는 1차 사료의 발굴에 더불어 역사학적 상상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개별적 상상력의 오류를 피하고자 매주 한 차례의 연구모임을 통해 자료를 검토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또한 실제 개경답사를 통해 체험으로서의 역사적 이미지를 더했다. 본문에 있는 개경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상은 이들의 새롭고 다양한 접근법과 경험들이 녹아들어 구성된 것이다. 죽어서도 개경 근처에 묻히고 싶어 했던 고려 사람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개발기의 한국에서 서울은 전 국민이 동경하던 꿈과 희망, 성공의 도시였다. 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치, 경제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한반도의 중심에 있었던 개경은 모든 길의 출발점이었고 도착점이었다. 자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개경으로 모여들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색과 소리는 고려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다채로웠다. 원나라와의 관계로 인해 고려로 들어온 몽골인들, 조선과는 달리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인정받았던 상인들, 권력층의 주변에서 수족 노릇을 하다 권력의 상층부까지 올라간 노비들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본문에 소개된 여러 계층,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왜 고려 사람들이 죽어서도 개경 근처에 묻히고 싶어 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개경은 모든 사람과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개경을 삶의 전환점이자 도약점으로 삼았다. 이들이 많은 폐단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에서는 이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서 주선해주는 역할을 해줄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인후는 그러한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충렬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갈 때면 늘 따라가서 원나라 황제에게 여러 가지 사안을 아뢸 때마다 그를 통하였다고 한다. 김방경에 대한 무고 사건으로 충렬왕이 처했던 난국을 해결했던 것이라든지, 몽골과의 긴 전쟁 중에 고려에 반기를 들고 몽골에 붙었던 평양 지역을 도로 찾아왔던 일 등은 인후의 공이기도 하였다. 당시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 여러 차례 정치적 긴장이 발생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인후의 이런 능력은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었다 하겠다. - 본문 중에서 무신정권의 붕괴 이후 원나라 간섭의 시기에도 노비 출신 인물의 중앙 관직 진출은 계속되었다. 『고려사 』 등 기록에 확인되는 인물만도 10여 명을 넘는다. 그 중에서 개경의 노비 출신으로 고관의 지위에 올라 권력을 휘둘렀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충선왕의 측근으로 활약했던 초노 출신의 박경량, 충숙왕을 섬겼던 감전노 출신의 강윤층, 왕족 신안공 왕전의 가노 출신이었던 강윤소 그리고 상서 주면의 가노 출신으로 원나라의 환관이 되어 원나라 황제를 모셨던 임바얀투구스 등을 들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신라 말기에 해상과 강을 이용하여 상업 활동을 하고 그것을 기반삼아 지방 세력으로 성장한 호족들이 많았으며,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 역시도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지방 세력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초기부터 국가가 보호하고 권장하는 방향으로 상업정책을 펴나갔던 것이다. '주즙지리(舟楫之利)'라 해서 해상무역의 이익을 강조하여 상업을 장려하였고, 수도인 개경의 남대가에 시전을 설치하여 도시상업을 활성화시키기도 하였다. - 본문 중에서 이렇듯 고려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다른 모습들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근접한 왕조인 조선에 대한 집중적 관심으로 인해 전근대 시대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가 조선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현실에서 본문에서 소개된 왕, 관료, 역관, 승려, 노비, 상인 등의 실제 생활 모습은 신선한 역사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틀지어진 생활에 지친 관료들의 모습이나 권력과 유착한 상인들의 모습, 집값을 올리려 부동산 투기에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오버랩 되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 이런 작은 역사를 읽는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당당했던 여성들의 삶 고려의 여성들은 전근대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는 달리 활기차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물론 고려시대 여인들의 이런 모습에 대한 논의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고 이제는 상식적인 이야기로 통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실제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3장 '당찬 여성들의 삶'에서는 처첩제에 반대하는 모습에서부터 적극적인 경제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여성의 모습까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고려 여인들의 모습을 문헌에 남겨진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고려를 대표하는 개방적인 문화는 어쩌면 이러한 여성들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경의 여성들은 부부관계에서도 상대적으로 당당했다. 여성의 재혼이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재가녀의 경우조차도 그다지 위축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명종 때 감찰어사를 지낸 이승장의 어머니는 재가녀라는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부부관계에서 아주 당당했다. 그녀는 재혼한 남편이 전 남편의 아들인 승장에게 가업을 돕도록 하자 남편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첩이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수절하지 못했는데, 유복자가 다행히 학문에 뜻을 두고 있으니 그 애를 공부시키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전 남편을 다시 보겠습니까?"라며 맞섰다. 아들을 데리고 재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차한 기색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사별한 전 남편 볼 면목이 없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여인의 모습은 현대적 기준으로 보아도 당차게 여겨질 정도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의사를 꺾고 아들을 최고 사학기관의 하나인 최충의 솔성재에 입학시켜 관직자로 출세시켰다. - 본문 중에서 미리 가본 개성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주말 나들이로 개성을 다녀오게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가보지 못한 북녘 땅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고려 500년 도읍지로서의 개성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체험하고자 하는 의미도 클 것이다. 저자들 몇몇은 지난 2005년 3박 4일 일정으로 개성답사를 다녀왔다. 십여 년간 개경이라는 도시를 함께 연구해 오던 이들만큼 개성답사가 절실한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문화유적인 선죽교와 왕건릉 등 개성에 남겨진 대부분의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돌아온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지금 개성의 모습을 상상해보고, 고려시대 개경의 모습을 되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개성의 유적 유물을 시큰둥하게 여기던 사람들도 공민왕릉을 보고는 모두 감탄했다. 공민왕릉의 규모와 돌조각 수법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병풍석과 난간석의 조간, 능 주변에 서있는 돌로 만든 양과 호랑이, 문인석과 무인석, 석등, 혼유석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 공민왕이 당대 최고의 기술과 노동력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왕릉제도가 이후 조선시대 왕릉제도의 기본 틀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공민왕릉은 중요하다. 이렇게 훌륭한 문화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여기에도 민중들의 땀과 고통이 서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사흘을 같이 지내서인지 첫날보다는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웠다. 여기저기서 술을 돌리고 박수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한참 분위기가 올라가는 듯하더니 이내 작별시간이 되었다. 현대공단 숙소에 돌아오니 역시 날씨는 쌀쌀했다. 개성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개성답사의 꿈을 이루었지만 미진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단의 현실을 더 가까이서 보아서인가?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