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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섹스의 황도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 포르노-스테레오 유혹/생산 제2장 표면적인 심연 가상의 신성한 영역 정밀한 묘사화 혹은 매혹적인 모사 나는 너의 거울이 될거야 사마르칸드에서의 죽음 비밀과 도전 유혹하는 여자의 초상 유혹자의 아이러니컬한 전략 유혹당하는 두려움 제3장 유혹의 정치적 운명 규칙에 대한 정열 결투, 극, 그리고 디지털 유희와 차가운 유혹 유혹은 운명이다 해제 : 보드리야르의 페미니즘과 유혹 부록 : 보드리야르의 저작 및 연구 자료 |
Jean Baudrill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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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복제는 생식 기관을 가진 존재를, 성적 특질이 부여되기 이전의 생식의 형태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충동이 아닐까? …… 그리고 그것은 동일성의 영속화, 즉 생식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유전적 기록의 투명성만을 지향하기 위해, 동시에 생식 기관을 가진 존재로 하여금 타자성 전체를 부정하도록 하는 죽음의 충동이 아닐까? 죽음의 충동을 버리자. …… 인간 복제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없애버리고, 그들의 복잡한 유전자, 그들의 복잡한 차이, 특히 생식이라는 결투적인 행위까지도 없애버린다. …… 마찬가지로 더 이상 주체도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복제는 자신의 분할을 끝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렇게 해서 총체성은 종말을 고한다. 만약 모든 정보가 각 부분 속에서 발견된다면, 총체성은 자신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육체의 종말, 즉 육체라 불리는 이 특이성의 종말이다.
--- pp. 210 ~ 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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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은 생산보다 더 강하다. 그리고 유혹은 성욕보다 더 강하다. 성욕과 유혹은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성욕에 비하여 유혹이 경시되고 있지만, 유혹은 성욕의 내적인 과정이 아니다. 유혹은 도전, 격화, 죽음으로 이루어진 순환적이고 가역적인 과정이다. 이와 반대로 유혹이 욕망이라는 에너지의 항목으로 축소되고 제한된 형태가 성적인 것이다. …… 어디에서나 늘 생산은 유혹을 쫓아내어 힘의 관계라는 유일한 구조 위에 자리잡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그리고 어디에서나 성과 성의 생산은 유혹을 쫓아내어 욕망의 관계라는 유일한 구조 위에 자리잡으려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분석해야 한다.
--- p. 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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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이의를 제기할 때 남근 지배적인 구조에 대해 무엇을 반론으로 내세우는가? 그것은 자율성, 차이, 욕망과 쾌락의 특성, 육체의 다른 용도, 말과 글쓰기이지 결코 유혹이 아니다. 여자들은 자신의 육체를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것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예속과 매음의 운명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유혹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한다. 권력이 현실 세계의 지배만을 나타내는 반면, 유혹은 상징적인 세계의 지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유혹이 지니는 절대적인 힘은 정치적인 권력이나 성적인 힘의 소유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 p.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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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인간 복제는 신체의 모사의 최종 단계, 즉 추상적인 유전식으로 된 개체가 연속적인 확대에 따르게 되는 단계이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 작품을 기교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시기에 이르면 예술 작품에 의한 감동의 여운, 현재의 특이성, 예술 작품의 미적 형태가 상실된다고 말했다. 즉 예술 작품은 유혹의 운명에서 재현의 운명으로 옮겨가고, 이 새로운 운명 속에서 정치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는 것이다. 근원적인 것은 사라졌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동경만이 그것을 '진정한 것'으로 재생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의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현대의 대중 매체이다. 현대의 대중 매체에서는, 근원적인 것이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거기서 사태는 자체의 무한한 재현에 따라 단숨에 파악된다. ……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인간 복제와 더불어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신체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 그것은 정보와 메시지의 저장으로서만, 그리고 정보 처리의 소프트웨어로서만 파악된다. …… 테크놀러지의 범람이 바로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지배한다. 사실 테크놀러지에 대해, 벤야민은 이미 그것을 완벽한 매체로 묘사한 바 있다. 물론 이 때 완벽한 매체는 어떤 것으로도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동일한 상품과 동일한 영상의 세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보철(補綴)이다. …… 우리는 소프트 테크놀러지의 시대에, 즉 유전적이고 정신적인 소프트웨어의 시대에 있다. 공업 시대의 보철 기구인 기계는 여전히 신체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 신체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것은 상상 속에서 변환되고, 이러한 신진 대사는 신체의 모습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사로 되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그리고 보철이 신체의 알려지지 않은 미분자의 중심에 파고들어 모태처럼 신체에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면, 상징적인 모든 순환을 통과하는 모든 신체는 변함 없이 지속되는 자기 반복에 불과한 것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신체의 종말과 신체에 관한 이야기의 종말을 이룬다. --- pp. 213 ~ 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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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6년에 번역 소개된 {유혹에 대하여}의 개정판이다. 한 권의 책을 여러 개의 판본으로 출간하는 유럽의 출판계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다양한 판형을 시도하거나 내용을 보충해서 새로운 판본의 책을 만들어내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1996년에 출간되었던 책에 나타났던 번역상의 오류와 부적절한 표현을 가다듬고, 새롭게 판형을 꾸며 다시 출간한 것이다. 책의 편집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번역의 정확성. 1996년 판본에 대한 독자들의 논평과 의견을 수렴하여 옮긴이가 부적절한 표현을 가다듬었고, 다시 편집자는 브라이언 싱어(Brian Singer)가 옮긴 영어판본(Seduction, St. Martin Press, 1990)을 대조하면서 문장의 길이와 호흡을 재조정하거나 몇몇 중요한 개념적 표현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대표적으로는 '유목(적)', '재현(적)', '영원 회귀' 등). 동시에 보다 폭넓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전하기 위해 원문에 등장하는 생소한 인물(주로 프랑스 사상가)이나 용어(주로 정신분석학·철학 용어나 신화상의 등장 인물)에 대해 가능한 수준까지 옮긴이의 주를 달았다.
책 내용과 관련하여 여전히 어려운 점은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 유혹이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원리인가, 현대 페미니즘 조류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항의'를 표현하는 개념인가를 정확하게 판별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옮긴이와 편집자는 아직까지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옮긴이 배영달 선생이 이 책을 주로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를 대표로 하는 현대의 급진적 페미니즘 논의에 대한 비판 ― 따라서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방향 제안으로 이 책을 독해하였다면(해제 [보드리야르의 페미니즘과 유혹] 참조), 편집자는 저자의 유혹 개념을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과 제안을 넘어서서 조금 더 포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 것은 가장 근본적으로는 보드리야르의 유혹 개념이 지극히 불명료할 뿐만 아니라 상이한 문맥에서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데 그 일차적 원인이 있다(이것은 이 책이 일종의 과도기적 저작이라는 점에서 연원한 문제일 수도 있고, 보드리야르 특유의 글쓰기 양식 때문에 비롯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불어판과 영어판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라는 문제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는 비단 이 책의 한국어판 옮긴이와 편집자간의 사소한 이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 대한 국제적인 저널의 논평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가령 책의 뒷표지에서 편집자가 인용한 바 있는 외국 저널의 서평 또한 유심히 살펴보면 보드리야르의 유혹 개념을 방금 전 언급한 두 가지의 상이한 의미로 독해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특히 {퍼블리셔스 위클리}지가 이 책을 '남근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승격'시킨 것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이에 비해 {렉스프레스}지와 {리베라시옹}지는 보드리야르의 유혹 개념을 각각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자유의 형상'과 '급진적 담론 구성의 양식'으로 기술하고 있고, {크리틱}지는 중립적인 외양을 띠면서 이 책에 대한 평가를 추상적으로 얼버무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상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국의 다양한 연구자들과 독자들의 손에서 점점 더 풍부하게 해석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편집자는 이 책에 대한 기존의 서평을 참조해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예를 들어, 1997년 11월 26일자 {문화일보} [김형경의 독서 일기]; 1996년 10월 5일 {출판저널} 관련 서평 참조). 텍스트의 성격 자체가 단일하고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글쓰기 방식 자체도 영미권의 저자들처럼 분석적인 글쓰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바에야, 처음부터 독자들은 경계심을 풀고 보드리야르의 자유분방한 문체를 마음껏 음미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확실히 영미권의 저자들과는 달리 프랑스의 학자들은 그들 특유의 재기발랄하고 상징적인 글쓰기로 악명(?)높다. 이 점에서 보드리야르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이라는 하나의 개념(픽션)을 통해 유럽의 다양한 지적 전통(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 소쉬르, 들뢰즈/가따리, 푸꼬 등)을 일괄(一括)하고 현대 사회의 문화 변동 양상을 다채롭게 분석해내고 있는 이 사상가의 필력은 한국 사회의 독자들을 충분히 '유혹'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아무쪼록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 소개된 보드리야르의 주요 저작들과 함께 이 책이 국내의 보드리야르 연구자들에게 꾸준한 연구와 참조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