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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서문 제1장 향연에의 초대 제2장 숭고 제3장 공포와 자유 제4장 순교와 자살 테러 제5장 죽음을 사는 자 제6장 희생양 옮긴이의 글 찾아보기 |
Terry Eagle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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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야만 사이의 긴밀한 동맹관계, 그 양가성에 관하여
이글턴은 테러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신과 자유, 또는 숭고와 같은 서구 문명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었던 개념들을 하나하나 살펴 나간다. 언뜻 보면 테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이들 개념 속에는 일종의 ‘양가성’이 숨어 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얼굴 뒤에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이면이 처음부터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문명과 야만은 실로 오랜 적대자이면서 동시에 가까운 이웃이었으며, 인류가 문명 진화와 함께 야만을 휘두를 더욱 세련된 기술들을 발전시켜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양가성의 첫 예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와 테세우스 간의 대립을 꼽고 있다. 광적 주신제에 도취된 디오니소스와 그의 신도들을 이성의 이름 아래 폭력적인 방식으로 억압했던 테베의 왕 테세우스는 결국 그 스스로 파멸의 길로 치닫는다. 테세우스의 예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양가성을 적절히 다루었던 그리스인들의 대처 방식과는 사뭇 다른 것일 터이다. 이성(테세우스)과 비이성(디오니소스)의 대립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 부딪침이 양산한 것은 결국 파멸에 다름 아니었음을 이글턴은 넌지시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이글턴은 중세의 신과 근대의 법 개념에도 모두 자비로운 동시에 위협적인 두 얼굴이 들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법을 단순히 억압적인 거부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순진하고 극단적인 좌파들도 비판한다. 단순하게 법을 경멸하는 이들은 합리적인 법 내부에 비이성이 숨 쉴 수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 약자를 보호하는 따뜻함도 있다는 사실, 즉 법의 양가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글턴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이성과 비이성, 혹은 문명과 야만, 그 어느 한 편도 들 수 없되 그 모두의 면모를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다. 즉 문명 내부에 이미 테러가 도출될 만한 뇌관이 장착되어 있으므로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 프로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문명 안에서 그것을 ‘승화’시키는 것이 과제로서 도출되는 것이다. 근대문학의 패러독스, 양가성을 지닌 짝패들 이글턴의 주 전공이었던 문학이 양가성의 예로 등장하면서, 그의 논의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역사상 가장 오랜 부르주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문학들이 범죄자와 자본가 사이의 비밀스러운 공모관계에 반복해서 집착하는 지점들을 설파하기 때문이다. 그는 근대문학 속의 이러한 짝패 인물들―괴테의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멜빌의 에이해브와 모비딕, 토스토옙스키의 알료사와 까라마조프 등―속에 나타나는 관계의 특이성을 통해 성자인 동시에 음모가인 근대 문학 속 인물들의 변주를 보여준다. 또한 ‘무구한 범법자’로 표현될 법한 희생양이 화두로 제시되면서 하마르티아(hamartia)에 대처해가는 인류의 역사가 제시된다. 죄에 물든 인간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예수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희생양은 분명 사회 전체의 악을 대신해 소멸시켜주는 기능을 하는 존재이다. 이글턴은 근대의 희생양으로 ‘무구한 범법자’들을 그 예로 든다. 그들은 개인적 잘못이 아니라 구조에 의해 각인된 죄인들이다. 희생양은 그들이 짊어진 죄와 깊이 연루되어 있지만, 그 책임을 전적으로 그들에게 돌릴 순 없다. 단적으로 디킨스 작품 속의 아이들은 순진하고 무구한 이들이지만, 더 커다란 착취구조의 악취가 그들에게 선명하게 배여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글턴은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희생양들이 아이들, 여성, 무산자 등 소수자의 형태를 띠며 사회 곳곳에 출현하고 있다고 본다. 그가 최종적으로 세밀하게 분석한 새뮤얼 리처드슨의 『클라리사Clarissa』에 등장하는 클라리사는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난봉꾼 귀족 노벨리스에게 강간당한 클라리사는 분명 예수처럼 올곧은 신념으로 자기 스스로 희생을 자처한 인물이 아니다. 그녀 역시 많은 결함과 도착적이며 가학적인 자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구석에서 조용히 죽어가는 대신 자신의 죽음을 대중들 앞에 공공연히 현시함으로써 위반당한 자신의 육체를 정치적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분명 그녀의 죽음을 목도하는 이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사회가 발 딛고 있는 죄를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명백한 희생자이자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현자이다. 우리 안에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준엄한 비판 이글턴의 분석 속에서 우리는 동시대의 비극이 자기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괴물적 결여 혹은 결함을 두려워하는 문명이 그것을 자신의 문밖으로 내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결부시켜 9·11을 비롯한 현재의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은 매섭고도 준엄하다. 이글턴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미국이 탈식민이라는 기치 덕분에 더욱 큰 공감을 얻으며 혁명기를 거쳐 갈 수 있었고, 혁명에 반드시 수반될 수밖에 없는 피의 얼룩도 이를 통해 잊혀져갔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국시로 제시되었던 반란과 전복의 가치가 기업적 성장과 개혁이라는 형식으로 포장된 점도 지적된다. 자본주의적 확장을 거듭하며 가장 물질주의적인 사회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이 그토록 ‘꿈(dream)’과 ‘신(god)’을 사랑하는 형이상학적인 사회이기도 한 것도 기실 자신의 결여를 숨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글턴의 이러한 분석을 통해 미국 자체에 내재된 모순과 결여를 되돌아볼 것을 준엄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글턴의 미국에 대한 입장이 이슬람이나 탈레반에 대한 옹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관심은 한 편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테러를 방지할 수 있느냐에 있다. 시소게임 같은 양자의 대립 속에서, 테러가 빈번하게 발발하는 현 상황에서, 우리가 돌이켜봐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폭력성이라는 점이다.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의 사상들을 횡단하며 외부의 폭력을 불러오는 것이 바로 패권을 잡은 자 내부에 자리 잡은 폭력이라는 메시지를 이끌어내는 이글턴의 글은 도발적이면서도 우리 시대의 테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들을 제공한다. 특히 이글턴은 이번 출간을 기념한 ‘한국어판 서문’에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며 폭력과 테러를 그 누구보다 절실히 경험했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성스러운 테러』를 통해 테러의 기원에서부터 동시대적 의미까지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지적 윤리를 다시 한 번 고찰해볼 수 있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