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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머리말 서문 - 남쪽으로 옮겨가다 1장. 침몰시기의 최후의 선택 2장. 남쪽 땅의 온정과 생명의 침전 3장. 만년 인생에서 첫번째 생명력을 발산하다 4장. 북경을 향해 문을 걸어 잠그다 5장. 드디어 고난의 막이 오르다 6장. 1956년, 흔하지 않은 봄날 7장. 즐거움이 끝자락에 이르다 8장. 폭풍 속의 고독한 학자 9장. 지금 우리는 모두 되는대로 살고 있다 10장. 흐느끼는 1958년 11장. 환란의 여파 12장. 구차하게 살아남다 13장. 이 밤의 만남 14장. 중국 학자의 비가 15장. 한순간의 꿈과 같았던 시절 16장. 만년의 '다리 골절' 17장. 이 삶은 며칠 남지 않아 18장. 만가는 이미 아득히 들리고 19장. 기나긴 밤 20장. 진인각의 죽음 21장. 죽은 다음의 시비를 누가 상관하랴 22장. 마지막 목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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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가슴을 울린 명문장, 「왕국유 기념비문」
21년 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왕국유가 이화원에 있는 곤명호에 스스로 몸을 던졌을 때 진인각은 왕국유를 위해 기념비문을 지었다. 300자도 되지 않는 이 짧은 글에서 왕국유의 인생은 진인각의 붓끝에서 초월적 영생을 얻게 되었다. “선생은 죽음으로써 당신의 독립된 자유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어찌 일인과의 은혜와 원한, 일성의 흥망으로 (당신의 죽음을) 논할 수 있으리오?” ---p. 21~22 전반서화 논쟁? 1950년대의 중산대학에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진서경이 진인각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마침 기사가 후진을 해야만 돌아갈 수 있는 곳을 만났다. 진인각은 느닷없이 진서경에게 농담을 건넸다. “진 교장님, 승용차는 이처럼 빠른데도 가끔은 후진을 해야만 더 빨리 갈 수 있네요. 당신의 ‘전반서화全盤西化’도 아마 후진 좀 해야 할걸요.” 두 번째는, 어느 날 진서경과 진인각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진인각은 진서경이 늘 젓가락을 사용하는 습관을 알고 있었기에 “진 교장님의 ‘전반서화’는 가짜이고 제 ‘전반서화’야말로 진짜입니다”라고 했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진인각은 한평생 우유와 빵, 버터를 즐겨 먹었는데 여기에서 재치 있는 농담이 나온 것이다. ---p. 55 진인각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다 진인각은 날마다 대운동을 벌이는 용잠 부교장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한 회의에서 용잠은 이름을 들먹이며 진인각의 사상이 진부하고 부패하다고 비판했으며, 또한 학술계가 이 같은 사람을 높이 떠받든다고 비꼬았다. 마지막에 그는 꽤나 유머러스하게 “진인각의 저작을 보는 것은 『얼해화孼海花』(청나라 말의 문인사회를 풍자한 소설)를 보는 것만 못하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 용잠이 평소에 보여준 투지로 미루어보아, 중산대학에서 가장 특별한 이 ‘낡은 골동품’(즉 진인각)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나마 ‘부드러운 바람, 보슬비’처럼 온건했다. 그가 습관적으로 내뱉던 ‘총살’, ‘목을 베다’ 등의 관용어와 비교한다면 이런 ‘유머러스한 풍자’는 그의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던 용잠도 진인각의 문제만큼은 신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음을 보여준다. ---p. 215~216 “진인각을 뛰어넘어라!” 가장 우스꽝스런 일로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다. 단시간 동안 자료의 점유면에서 진인각을 뛰어넘으려고 전국 대학에서는 각자 책 한 권 더 읽기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비롯되었다. 진인각 같은 학자들이 80여 권의 자료를 마스터했다면 100여 명의 사람들이 각각 한 권의 자료를 마스터하여 이를 모두 합치면 자연히 진인각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단순한 이론이다. 이처럼 간단한 초등학생 식의 계산법으로 이 거대한 정치적 난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정치에 광분했던 상황이 빚어낸 무지와 우매함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p. 388~389 역사의 아이러니 역사는 바로 이렇듯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문자를 남겼다. 마르크스·레닌 경전 저작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마르크스·레닌의 깃발을 흔들고, 마르크스·레닌의 몇 마디 토막말로 삼장법사의 주문처럼 사람을 속박하는 도구로 삼아 정치 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40여 년 전 이미 유럽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서를 읽었던 진인각은 확실히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은 동시에 중국 역사의 가련함이기도 했다. ---p. 423 인생과 학문의 영원한 반려자, 당운 만약 이 여성이 없었다면 진인각의 후반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진인각 만년의 인생에 비춰본다면, 당운이 없었으면 진인각도 없었다.(609) … 만약 인생이 진인각에게 너무 잔혹했다면, 운명은 당운에게 너무 불공평했다고 할 수 있다. 1955년에 그가 처음 비판을 받았을 때부터 시작해 그의 고통은 바로 당운의 고통이기도 했다. 그의 분노는 또한 당운의 분노였다. 20년 동안 그는 ‘성명서’, ‘항의서’나 검토나 해명서 등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각종 자료를 남겨놓았지만, 이것은 모두 당운의 손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몇몇 편지는 피눈물을 포함한 의분을 담고 있었으며, 어투가 몹시 격렬하기도 했다. 아내로서의 당운이 그의 구술을 글로 옮길 때 그녀의 가슴속에 솟구쳐 오르던 것은 어떤 감정의 파도였을까? ---p. 623~624 이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는 없다 진인각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문화대혁명 중 흉행을 돕는 물건의 하나였던 고음의 스피커 소리였다. … 2년여 동안 진인각은 밤낮으로 사면팔방에서 들려오는 고음의 스피커 소리에 포위되어 그야말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 조반파는 그가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듣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진인각은 1945년 실명했다) 일부러 계책을 짜내어 청각을 파괴하는 수단을 발명했다. 따라서 매번 비판투쟁 대회를 열 때마다 몇 대의 스피커를 직접 그의 집 앞뒤에 설치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작은 스피커를 그의 침상 앞에 걸어두기도 했다. 그 명분은 ‘반동적 학술의 권위자에게 혁명 군중의 분노에 찬 고발을 듣게 하자’는 것이었다. ---p. 684~685 진인각의 최후 이 생명 최후의 200여일 가운데 진인각은 이미 꼴이 말이 아닐 정도로 말랐고, 극소수의 벗들이 몰래 방문하여 찾았을 때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며, 단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 자국이 눈가에 보였다는 점이다. 1969년 10월 7일 새벽 5시 무렵, 진인각은 79년에 이르는 인생 역정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심력이 쇠진한 데다가 장이 경색되어 마비를 일으켜 한을 머금은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진인각은 아주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탁월한 한 지식인이 이렇게 죽어가는 일은 어느 시대에서나 아주 흔한 일이었다. 몇 년이나 이어진 고난이 하루아침에 끝났으니 진인각으로서는 일종의 해탈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담담한 죽음은 단지 후세 사람들에게 비장함을 남겨줄 뿐이었다. ---p. 691~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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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롱집단설
역사학자 진인각의 대표적인 학설로, 고도한 선진문화와 개방성·국제성을 특징으로 하는 수당세계제국을 창설하고 통치한 정치집단의 원류와 성격을 규명했다. 진인각은 수당이라는 세계제국이 통치자의 열린 사고 없이는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전제하에, 이런 열린 사고의 연원을 통치집단의 원류로부터 찾았다. 열린 사고란 자기 것에만 집착하거나 고집하지 않는 자세를 말하는데, 당시 가장 대립적인 호족(胡族)과 한족(漢族)이라는 종족적 경계와 유목과 농경이라는 대립적인 문화를 초월한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관롱집단은 바로 이런 열린 사고를 견지한 정치집단이었다. 관롱은 관중(현재의 섬서성)과 농서(감숙성) 일대를 일컫는데, 관롱집단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서위-북주 그리고 수와 당 왕조를 창설하는 주체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관롱집단은 종족적으로 호와 한, 능력면에서는 무력과 재지(才智)가 혼합되어 하나로 융합된 정치집단이었다. 북위 말 과도한 한화(漢化)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인 ‘육진(六鎭)의 난’ 이후 선비족의 한 세력이 남쪽 중원지역으로 유동하면서 마지막으로 관롱지역에 정착한다. 당시 여러 정치세력 가운데 세력적 열세를 면하지 못하던 선비군사집단은 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곳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한족들과 합작하여 새로운 호한 융합의 정치세력을 만들어냈다. 이들 관롱집단에 의해 통치된 수당세계제국은 종족을 초월하고 능력에 기반한 개방성을 띠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 하듯이 7세기에서 10세기까지 세계의 모든 길은 수당제국의 도읍인 장안으로 통하고 있었다. 당시 장안은 단지 한 나라의 수도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와서 살고자 하는 선망의 장소였다. 장안은 세계 각처에서 몰려 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원류를 가진 문화가 합일되어 새로운 문화로 재생산되는 문명의 중심이었다. 장안에 중심을 둔 수당세계제국을 통치한 정치집단이 바로 열린사고를 가진 관롱집단이었다. 진인각, 최후의 20년에 이르기까지, 1890~1948 1890년 호남성 장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경학·사학·철학을 공부한 그는 1907년 상해 복단공학에 입학했다. 1910년부터 구미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만주어·몽골어·티베트어·산스크리트어 등 아시아권 언어를 두루 섭렵하고,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고문자를 연구했다. 1925년 양계초, 왕국유 등과 함께 북경 청화학교 국학연구원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8년 서남연합대학으로 옮겨갔다. 1939년 50세의 나이에 영국 왕립학회 연구원으로 초빙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영국에 가지 못했다. 1945년 망막각리로 실명했다. 1949년 그는 대만행을 거부하고 대륙에 남아 영남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이 책은 이 시점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진인각, 대만행을 거부하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대륙 장악이 임박해오자, 국민당의 장개석은 두 가지 중대한 작전을 전개한다. 그 하나는 대만으로 대륙의 문물을 대거 운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륙의 학자를 이송하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소형 비행기가 남경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 비행기에서 중국 학계의 ‘거물’ 호적이 내렸다. 호적의 위력은 대단했다. 당시 국민당 문화를 주관하던 고급 관원들이 친히 비행장으로 나와 그를 영접했다. 그런데 이 비행기에는 청화대학 역사학과 교수 진인각도 동승하고 있었다. 남경에 도착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호적)은 대만행을 택했고, 다른 한 사람(진인각)은 대륙에 남아 광주로 향했다. 진서경을 만나다 대륙에 남은 진인각은 영남대학 교장 진서경과 인연을 맺는다. 1950년대 초반, 진서경은 ‘한 손으로는 교수들을 붙잡는’ 프로젝트를 펼쳐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영남대학으로 초빙했다. 이 중에는 중국 방사선학계의 권위자 사지광, 중국 현대 수학의 창시자 강립부, 그리고 중국 중세사 분야의 최고 권위자 진인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인각이 영남대학에 도착한 다음 날인 1월 20일, 영남대학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진인각 선생은 10여 개 나라의 문자에 능통하다. 서양의 한학자들도 진 선생에게 중국사를 배웠다. 그는 194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정교수로 초빙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대단한 영예였다.…” “학문을 물을 뿐 정치는 묻지 않는다” 1953년 10월, 역사연구위원회는 곽말약을 상고사연구소 소장으로, 진인각을 중고사연구소 소장으로, 그리고 범문란을 근대사연구소 소장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진인각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역사연구위원회는 진인각의 제자였던 왕전을 ‘사자’로 파견하여 진인각을 설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진인각은 왕전에게 자신이 중고사연구소 소장을 맡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연구소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정치학습을 하지 않는 것을 허락한다. 둘째, 모공(毛公)과 유공(劉公)이 허락증명서를 내주어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진인각은 이처럼 실현 가능성이 없는 조건을 내세움으로써 “단지 학문을 물을 뿐 정치는 묻지 않는다(只問學問 不問政治)”는 원칙을 견지하고자 했다. “우파로 몰려 공격을 받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이 전개되면서, 진인각은 우파로 몰려 핍박받게 된다. “진인각은 학과 내외에서 부르주아 전문가 측의 대표로서 대백기(大白旗, 우파의 우두머리)입니다. 학과의 당 총지부에서는 진인각의 영향력을 반드시 쓸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주먹으로 늙은 고집불통을 때리고 발로 가짜 권위자를 걷어차자”는 문구가 유행할 정도였다. 이후 진인각은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크나큰 고초를 겪는다. 물론 ‘원로 학자로서 대우를 받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지만, 진인각은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입었으며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던 많은 동료 지식인들을 잃는 아픔을 죽을 때까지 겪게 된다. 중국 역사학계의 대가, 진인각 진인각은 1969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실명과 다리 골절 등 신체적 고통과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자유사상과 독립정신을 끝내 잃지 않고 죽을 때까지 역사 연구에 매진했다. 진인각은 중국 중세사 분야의 대가로서, 『수당제도 연원약론고』와 『당대 정치사술론고』 등을 저술했으며, 특히 『논재생연』, 『유여시별전』 등 그가 중국 문학 분야에서 남긴 탁월한 업적은 바로 ‘최후의 20년’에 집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제창한 ‘관롱집단설’은 현재까지도 역사학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중국의 역사학자 엄경망嚴耕望은 진인각을 전목錢穆, 진원陳垣, 여사면呂思勉과 함께 현대 중국의 4대 역사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