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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 ‘철학’을 한다는 것
제1부 철학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와 그 선대 철학자들 1. 철학 이전의 철학 2. ‘철학하다’라는 개념의 등장 3. 소크라테스라는 존재 4. 플라톤의 《향연》에 나타난 철학자의 정의 제2부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 1. 플라톤과 아카데메이아 2.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학파 3. 헬레니즘학파 4. 제국시대의 철학적 학파들 5. 철학과 철학적 담론들 제3부 단절과 연속: 중세와 현대 1. 계시철학으로서의 그리스도교 2. 고대의 철학 개념의 실종과 재출현 3. 질문과 전망 옮긴이의 말 | 철학자는 철학적 삶과 이어져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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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강단 위에서 가르침을 늘어놓거나 텍스트를 바탕으로 강의를 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상생활에서 부단히 실천되는 철학으로, 그 실천 방식은 그 철학 자체와 동일하다. (……) 소크라테스는 연단에 올라가 청중들에게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의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토론 시간이나 제자들과의 산책 시간들을 정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제자들과 농담을 하면서 철학을 했다. 술을 마시면서, 전쟁터에서, 아고라에서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나아가 감옥에 끌려가고 독배를 들이키면서도 그는 철학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시공간에서든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일상의 삶이 철학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다. _ 플루타르코스---p.56~57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실천적인 삶이 필연적으로 타인들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써 발생하는 결과들을 노리는 생각들만이 ‘실천적인’ 것은 아니다. 정신적 활동과 자기 내에 목적을 지니며 그 자체의 관점으로 개진되는 성찰들이 그보다 훨씬 더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p.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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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아무것도 안 했네.”
“뭐? 자네는 그럼 살아 있지도 않았단 말인가? 자네의 소임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일 뿐 아니라 가장 빛나는 것은 삶 그 자체라네. 우리의 위대하고 영예로운 걸작, 그것은 적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세. 자기 존재를 충실하게 향유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신과 같은 절대적 완전함이라네.” _ 몽테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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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철학적인 일은 평온하고 단순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고대철학이 철학 담론과 삶의 형태를 그토록 긴밀하게 연관 지었던 데 반해, 어째서 오늘날의 철학 교육에서는 철학이 무엇보다도 담론으로서 제시되고 있을까? 그것도 이론적·체계적 담론 혹은 비판적 담론, 어쨌든 철학자의 삶의 방식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담론으로서 말이다. 피에르 아도에 따르면, 철학적 담론은 생의 선택, 실존적 선택권으로부터 기원하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선택이나 결정은 결코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집단이나 공동체, 한마디로 철학적 ‘학파’로부터 벗어나 있는 철학이나 철학자는 있을 수 없다. 철학적 학파는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특정 선택과 부합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삶의 전면적 변화를, 전 존재의 전향을, 그리고 결국은 어떤 특정한 양식으로 살며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요구하는 어떤 실존적 선택권과 부합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철학은 그 무엇보다도 생활양식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은 철학적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생활양식이다. 피에르 아도는 철학적 담론이 생활양식의 한 부분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철학자가 생에 대해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의 담론이 결정된다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철학적 담론들을 그 자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실재들처럼 생각하여 그것들을 개진한 철학자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그 구조를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담론을 그의 삶이나 죽음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겠는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삶 혹은 삶의 철학 소크라테스는 세상 안에 거하는 동시에 세상 밖에 거했다. 그는 도덕적 요구 및 그것이 함축하는 참여를 통해 인간과 사물을 초월하되, 그것들과 한데 더불어 살았다. 왜냐하면 진정한 철학은 오직 일상 속에서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를 통틀어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철학자의 귀감으로 남게 된다. 플라톤의 《향연》은 고대의 철학적 삶에 결정적인 특색을 부여한다. 철학은 생활공동체,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는 대화 등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플라톤이 철학 교육을 위해 설립한 학술기관인 아카데메이아는 그 구성원들의 우수성이나 완벽한 조직 체계 때문에 당대에는 물론 후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애당초 플라톤의 의도는 정치적이기도 했다. 그는 도시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철학적으로 교육함으로써 정치적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이 보기에 철학적 삶에 대한 선택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었다. 플라톤은 이 같은 삶의 양식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살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서 이 길, 곧 ‘경이로운 길’을 따르기로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 삶은 “쾌락보다 미덕을 더욱 존중하고” 감각적 쾌락을 포기하며 일종의 식이요법을 준수하고 “매일매일 가능한 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삶과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서 ‘진정으로 철학하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철학하지 않는’ 사람들이 갈라진다, 플라톤의 ‘철학자로서의 사명’은 행동하는 데 있었다. 그가 시라쿠사에서 정치적 인물이 되고자 시도했던 것도 행동은 하지 않고 ‘번드르르한 말만 늘어놓는’ 자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철학은 ‘정리적定理的’ 생활양식에 있었다. ‘정리적’이라는 말은, ‘이론적’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앎을 위한 앎만을 추구하며 그 자신 외적인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지식의 양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같은 지식의 양태에 생애를 온전히 바치는 생활양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정리적인’은 결코 ‘실천적인’과 대립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정리적인’은 실천되고 체험되며 활동적인 철학, 행복을 가져오는 철학에 적용될 수 있는 어휘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이를 명시적으로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희망을 정치인들에게 걸었다. 하지만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직접 이러한 과업을 실현할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철학자들에게 제안한 삶의 선택과 그 양성과정은 정관적이기도 하지만 행동하는─앎과 덕은 상호 함축적이기 때문에─인간의 그것이기도 했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가 도시에서 해야 할 일은 정치가들의 올바른 판단을 양성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마다 입법을 통해 시민들의 윤리적 덕성을 보장하는 것은 정치가들 쪽에서 할 일이다. 철학자 쪽에서는 무사무욕의 탐구, 연구, 정관에 헌신하는 생애를 선택할 노릇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관심과 독립적인 삶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철학은 생활양식이자 담론의 양식인 것이다. 살아 움직이며 선택하는 고대의 ‘철학자’ 개념의 재발견 위에서 대표적인 고대철학자들의 철학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의 철학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철학자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철학을 실천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어떤 철학적 전통에서 자기 삶의 규칙들을 받아들였다. 비록 그 규칙들은 힘겨운 노력을 요하는 것이었으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임무 자체는 좀더 쉬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급부상 이후, 고대의 주요한 철학 담론들은 신학적 논쟁에 사용될 수 있는 단순한 개념적 자료들의 차원으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신학의 시녀가 되어버린 ‘철학’은 더 이상 이론적인 담론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철학 학교도 없고 그 학교만의 교의 같은 것도 없다. 현대의 ‘철학자’는 혼자인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의 철학자는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그는 몽테뉴 혹은 괴테, 니체 등의 선배 철학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들 역시 혼자였다. 그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심원한 욕구에 따라서 고대철학의 삶의 양식들을 모델로 선택했다. 철학자는 의식 없는 두 상태─배금주의가 낳은 상태와 수억 명의 인류들이 겪는 비참과 고통에서 기인한 상태─사이에 분열된 세계에서 고독과 자신의 무능력을 통감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철학자는 현자의 절대적인 평정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함은 이 같은 고립과 무능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되리라. 그러나 고대철학은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지혜의 관념이라는 규준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친다. 무슨 일이 닥치든지, 설령 우리의 행위가 지극히 한정된 것으로 여겨질지라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