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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여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같은 나이의 두 사람 중 더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은 누구일까.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닐까. 기억이 사라진 사람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억에 없는 여행이, 거기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첩을 덮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가봤지만 기억나지 않는 장소들을 떠올린다. 만났지만 희미해져버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기록되지 않아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 p.40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묘한 부조화를 깨달았다. 그의 말투에만 귀를 기울이면, 안에 담겨 있는 좌절과 오기와 결단과 고난이 절대로 그에 합당한 무게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맥주가 떨어져서 근처 마트로 차를 몰고 갔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의 말투는 시종 차분하고 담담했다. 이야기가 불러오는 기억과,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에 대해 나라면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을까. 자랑하고 싶은 부분과 강조하고 싶은 부분, 감추고 싶은 부분이 분명 있을 텐데, 그런 기복 없이 지난 일을 그렇게 툭툭 던져놓는 것이 가능했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랄프를 이해할 수 있다. 본디 그런 것이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어떤 것을 한다는 것은. 그 길을 지나온 사람들의 말투는 대체로 나직하고, 담담하다. 자신이 이룬 말도 안 되는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무덤덤하다.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겐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고 필연적인 귀결이었기 때문에. --- p.22 니키타스는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에 대해 도통 흥미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삶을 최대한 밀고 나가는 중이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할 집을 가지고 싶다. 돈은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온다. 그렇다면? 집을 느리게 지으면 된다. 철저하게 자기가 설정한, 자기만의 속도에 맞춰서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자기의 주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나를 위해 얼마큼의 시간을 어떤 속도로 쓸 것인지 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집을 짓고 있었던 20년 동안, 그는 미다스 왕이 부럽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새벽 바다에 나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그물을 드리우는 시간이 그러했듯이. --- p.51 사람들은 도약을 꿈꾼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더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올라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래를 향한 도약이다. 놓을 수 있는가. 아래를 보지 않을 수 있는가. 한 걸음 앞으로, 허공을 향해 내디딜 수 있는가. --- p.154 어차피 비는 멈추지 않을 거잖아. 어차피 길은 변하지 않을 거잖아. 오늘 저녁, 온 힘을 다해 한 잔의 무스탕 커피를 마시는 게 왜 간사해. 온 힘을 다해 즐거운 생각을 하는 게 어디야. 온 힘을 다해 지금 이 순간, 내 안의 행복을 끌어 모으는 게 뭐가 어때. 뜨겁고, 진하고, 달콤한, 한 잔의 행복을 마시는 게 뭐가 어디가 어때서 그래. 비 따위, 돌멩이 따위, 엉겅퀴 따위. 거머리 따위. 어차피 없어지지도 않을 거면서 --- p.129 이 바퀴 두 개 달린 탈것은 나에게 지혜를 가르쳐준 동시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들을 선사해주었다. 강화도의 굽이치는 산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 몸이 되어 달린 장소였고, 지리산 오도재의 가파른 코너 길은 겸손과 용기를 배우는 도량이었다. 제주 중산간의 1100도로에서 나는, 바람에도 맛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해남 우수영으로 향하는 새벽의 18번 국도 위에서, 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나는 혼자 소리를 질렀다. 모든 세포는 깨어나 바람을 맞고 있었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이렇게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하면,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멋졌다. 바로 다음 코너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가 코앞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 기쁨을 알게 된 이후로는, 삶의 복잡도가 증가할 때마다 안장 위에 오르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기 점점 더 어려워졌다. 아니, 올라야 했다. --- p.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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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발적 여행자, 탁재형 PD의 에세이스트로서의 첫 책!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여행에 지친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완벽하지 않은 가운데 우연히 찾아낸 새로운 희망에 대하여. “기쁨과 행복은 의외로 적고, 외로움과 우울함의 비율이 의외로 높다는 여행의 본성을 이해할 때,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세계테마기행] PD이자 오지 전문 여행자,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로 잘 알려진 탁재형의 세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이번 신간은 그의 전작인 세계 술 예찬서 ≪스피릿 로드≫, 여행 충동을 강력하게 부추긴 ≪탁PD의 여행수다≫와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사유는 더 깊어졌고, 글은 더 진해졌다. 본격 에세이스트로서의 그의 새로운 면면이 드러난다. 탁재형은 15년간 50개의 나라를 여행했지만, 대부분 스스로가 원한 길 위에 있었던 것이 아닌 비자발적 여행자였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풍경을 앞에 두고 카메라 앵글에 신경 써야 하는 다큐멘터리 PD라는 과업 탓이다. 그간 타인에게 일상 밖으로 탈출할 것을 권유하는 일상을 살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디에 있든 일상의 무게를 모두 짊어진 채였다. 그런 그가 이 책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더 편한 곳, 더 멋진 곳을 찾는 보통의 여행자와 달리, 더 불편한 곳, 더 소외된 곳을 찾아다녔던 그의 여행은 대부분 고되었고, 호시탐탐 즐거웠다. 그런 그가 모두에게 ‘여행할 것’을 권하거나, 여행을 하면 행복해진다거나 류의 이야기를 할 리 만무하다. 그는 여행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쁨과 행복은 의외로 적고, 외로움과 우울함의 비율이 의외로 높다는 여행의 본성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의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그리고 진짜 여행이 시작되면,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한껏 즐기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여행은 예쁘지 않았다. 자주 비가 몰아쳤고, 원치 않게 자주 멈춰야 했다. 그래도 그 불편함과 실망 사이로 가끔 얼굴을 내밀어주는 여유와 우연한 즐거움 덕에, 그는 간혹 슬며시 달떴다. 이 책은, 마냥 낭만적일 것만 같았던 여행의 허상을 마주하고 지친 여행자에게 건네는 그만의 위로이기도 하다. 좋은 것만 보려 하지 말 것, 그러다 우연히 만나는 작은 행복을 온 마음을 다해 반기고 기뻐할 것. 혹시라도 마음에 드는 대상을 발견한다면 기꺼이 용기를 내볼 것. 어쩌면 그의 세상의 전부였던 이야기들을, 그가 15년간 길 위에서 배운 것들과 여행의 의미들을, 종전의 장난기와 웃음기를 이번에는 조금 덜고 더욱 깊고 진하게 풀어놓았다. 그의 다음 책이 어서 출간되기를 바랐던 전작 독자들의 리뷰가 왜 그토록 줄줄이 이어졌는지, 이 책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여행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써온 그의 글은, 이번 신간에서 아득하고 아련한 여행의 서정과 농도 짙은 사유가 더해져 정점을 찍는다. 여행을 채우는 달뜬 마음과 이야기들. 당신의 기억에 흐르는 그 수많은 여행 성분들에 대하여. 피로, 외로움, 비, 땀, 눈물, 이별, 모험, 꿈, 만남, 사랑, 휴식…. 이 책에서 저자 탁재형은 그의 여행을 마디마디 채운 성분들에 대해 가감 없이 써내려갔다. 아수라가 벌어진 현장에서 혼자 유유히 들이켠 맥주의 진한 맛, 베네수엘라의 골목골목에서 마주한 이방인을 향한 비웃음과 그로 인한 설움, 앞을 향해 집중해서 달리기만 하면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 오토바이의 진정한 자유. 그의 기억에, 가슴에 차곡차곡 들어찬 그 수많은 성분들은 분명, 아프지만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당신의 여행은 무엇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무렇지 않은 듯 잘 살아가다가, 지난 여행의 성분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며 자아내는 그리움과 설렘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길 위에 오른다. 그리고 또 다시 가슴 한켠에 쌓이는 성분들을 지지대 삼아 우리는 또 일상을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분명 흥미롭다. 만약 그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탁재형이라면? 꽤 오랜 기간 여러 방법을 통해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해왔음에도, 정작 풀어내지 못한 마음 속 울림 깊은 이야기들이 이 한 권에 담겼다. 여행이라는 그물에서 무엇을 낚을 것인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여행이라는 것은 결국, 그물을 드리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거기엔 반드시, 무엇이든 걸려 있기 마련이다. 그물을 쳐놓은 걸 잊어버려도 상관없다. 그러나 한 번씩 그 그물 친 곳으로 가서 뭐가 걸렸는지 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래야 다음엔 어디에 그물을 쳐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에필로그 중에서) 우리는 일상과 다른 그 무엇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만, 그리고 그 여행에서만큼은 지친 마음을 치유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우리의 계획, 그리고 바람과 딱 들어맞지 않는다. 이상하리만치 여행은 우리에게 비우호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여행조차도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남긴다. 탁재형, 그의 여행 역시 그랬다. 도무지 현지 정보를 얻을 수 없을 만큼 가파른 땅 말라위에서 만난,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잃은 여행자 랄프에게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묵묵히 가는 자의 초연함을 본다. 크레타 섬에서 만난 어부 니키타스에게서는 타인의 행복을 부러워 않고 자신의 시간을 당당하게 주인으로 살아가는 조르바의 환영을 본다. 들이쉰 숨이 그대로 고체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극심한 공포감을 선사한 뉴질랜드 계곡에서의 번지점프를 통해, 위를 향한 도약이 아닌 아래를 향하는 도약의 숭고함을 배운다. 생경한 곳을 여행하는 순간이 마냥 행복하지 않은 것은, 낯섦이 주는 공포와 더불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행자의 관점. 여행이라는 그물을 드리우러 나가는데 제발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비 오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마음으로 그물을 치러 나갈 수 있기를, 그래서 당신이 다음 여행에선 좀 더 초연해질 수 있기를 저자 탁재형은 바라고 또 바란다.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보다는, 비가 와도 괜찮은 여행이면 좋겠어. 생각해보면 비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비를 어딘가에서 오도카니 피할 시간도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신나게 맞고 신발을 철벅이며 깔깔거릴 마음의 여유도 가지기 힘들었던 시간이 싫었던 것이다. 여행 도중에,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비를 맞아도 괜찮은 여행이면 좋겠다.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당신과 만나는 여행이었으면 좋겠다. (프롤로그 중에서) 여행자는 바란다. 이번 여행에는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내일만큼은 비가 오지 않기를. 방수 재킷을 끊임없이 때리는 비와, 거머리와의 지긋지긋한 술래잡기 놀이로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던 랑탕 트레일. 외부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은둔의 땅 무스탕 계곡의 한 롯지에서 저자는, 커피에 야크 버터와 설탕, 네팔식 소주 ‘럭시’를 탄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받는다. 열흘 넘게 반복될 것이 뻔한 앞날에 절망한 여행자는, 이 비밀의 차 한 잔에 불현듯 내일 걸을 일이 꽤나 할 만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행복해진다. 예상치 못했던, 희망의 반격이다. 비는 멈추지도 않고, 길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마주한 희망에 다시 일어날 힘을 얻기도 한다. 비 따위, 거머리 따위, 어차피 없어지지 않을 거라면, 온 힘을 다해 내 안의 행복을 끌어 모으고, 온 힘을 다해 즐거운 생각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