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가격
9,900
10 8,910
YES포인트?
49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분야의 이벤트

삽화본 특선 명작 시리즈

책소개

목차

붉은 까마귀/ 말없는 강물/ 대무 칠일/ 남쪽에의 꿈/ 숨은 마음/ 바치는 마음/ 잉어와 노래/ 맹랑한 낙랑/ 왕자의 남순/ 외나무다리/ 모란 피는 동안/ 그 뒤의 소읍별/ 푸른새의 슬픔/ 마음의 자명고/ 늦게 핀 꽃/ 침묵의 승리자/

*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 김종무/ 소설 삽화의 고심 : 이승만/ 이태준 연보/ 이승만 약력/ ‘왕자호동’ 관계 학술논문/ ‘왕자호동’ 관계 서지

저자 소개 1

李泰俊,, 상허尙虛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가 그해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 1912년 모친마저 별세하자 철원의 친척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되어 1924년 퇴학하였다. 1924년 학교 신문 [휘문 2호]에 단편동화 「물고기 이야기」를 처음 발표했다. 1925년 문예지『조선문단』에 「오몽녀」가 입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신문·우유 배달 등을 하며 ‘공기만을 먹고사는’ 궁핍한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개벽』과 『조선중앙일보』의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가 그해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 1912년 모친마저 별세하자 철원의 친척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되어 1924년 퇴학하였다.

1924년 학교 신문 [휘문 2호]에 단편동화 「물고기 이야기」를 처음 발표했다. 1925년 문예지『조선문단』에 「오몽녀」가 입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신문·우유 배달 등을 하며 ‘공기만을 먹고사는’ 궁핍한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개벽』과 『조선중앙일보』의 기자, 『문장』지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박태원·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였다.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출간을 시작으로 『가마귀』, 『사상의 월야』, 장편소설 『해방전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30년대 전후에 아동잡지 [어린이]에 발표한 많은 동화들은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고 있다. 해방 후에는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등 조직에 참여하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구인회’ 활동 과거와 사상성을 이유로 임화, 김남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어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저서로 단편소설집 『달밤』 『가마귀』 『복덕방』 『해방 전후』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수필집 『무서록』, 문장론 『문장강화』 『상허 문학독본』 등이 있다.

이태준의 다른 상품

그림 : 이승만
화가, 삽화가. 호는 행인(杏仁), 향린(香隣). 서울 출생.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중 고희동(高羲東)을 알게 되어 그로부터 그림 지도를 받았다. 졸업 후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 내 고희동의 고려화회(高麗畵會) 소속 장발(張勃), 안석주(安碩柱), 구본웅(具本雄) 등과 같은 화우 문하생으로 수업을 하였다. 그 후 일본의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와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제4회부터 연속 4회나 특선의 영예를 누렸다. 또, 신극단 토월회(土月會)에 가입하여 무대 장치를 전담하였다. 1928년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한 뒤부터는 신문연재소설 삽화를 전담하여, ‘동아일보’의 이상범(李象範), ‘조선중앙일보’의 노수현(盧壽鉉)과 함께 광복 전 삽화계 3천왕(三天王)으로 알려질 만큼 신문 삽화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특히 1935년 박종화(朴鍾和) 지은 역사소설 ‘금삼(錦衫)의 피’의 삽화를 그리게 된 것을 계기로 광복 전후 작가와 연계를 가지면서 ‘임진왜란’(1954~1957), ‘세종대왕’(1969~
1975) 등 많은 연재소설에 풍속화풍의 삽화를 그려, 삽화계의 원로가 되었으며, 만년에는 삽화가협회 회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3월 20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26쪽 | 602g | 153*224*30mm
ISBN13
9788993117066

출판사 리뷰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김 종 무

호동왕자는 고구려 제3대 왕 대무신왕의 아드님이시다. 안용이 미려하고 부왕의 총애가 대단하고 따라서 호동이라고 불렀다는 것부터 벌써 로맨틱한 것이거니와 낙랑공주와의 Love Story에 있어서는 실로 백 퍼센트의 흥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국제간의 혼인 특히 그것이 정책결혼인 경우라도, 천편일률적인 경우도 적지 않지만, 호동왕자의 사랑은 그것이 풍운이 잔뜩 풍긴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사랑과 모략의 이중주인 점에서 어쩐지 모르게 트로이의 전쟁을 상기케 하는 것이 있다.
당시 고구려는 건국이 일천한만큼 실로 다사다난하였다. 동명성왕이 졸본부여에 일어난 이래로 고구려는 압록강 골짜기 좌우의 땅을 가지기에 여념이 없어서 유리왕 대에는 유명한 국내성에 도읍을 정하고 대무신왕대에 이르러서도 선대의 유업을 그대로 계승하여 북쪽으로는 부여를 쳐서 맹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남쪽으로는 낙랑을 공격하여 대승리를 얻게 되니 사상에 낙랑이 일시 멸망한 것같이 적혀 있는 것은 저간의 소식을 말함이다. 북부여와의 맹렬한 싸움 백병전 끝에 적왕의 수급까지 베었건만 적의 완강한 항전에 도리어 궁지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던 것도 ‘삼국사기’의 전체를 통하여 간결한, 오히려 소루한 사필 가운데서 이채 있게 상세한 필치로 그려 놓은 것으로 유명하거니와 호동왕자의 기사에 이르러서는 도학자인 김부식의 탈선을 엿볼 수 있으리만큼 현란하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정서 전면한 Love Story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대무신왕의 15년 여름 4월에 호동왕자가 옥저, 현 함경도 지방을 여행하더니 낙랑왕 최리가 마침 행차하다가 왕자를 보고 말하기를 군의 안색을 보니 보통 인간이 아니다, 미상불 북국 신왕의 아들인가 보다 하고 드디어 같이 낙랑으로 돌아가서 사위를 삼았었다. 그런데 그 뒤에 호동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몰래 사람을 보내어 최씨 딸 낙랑공주에게 전갈하기를 “네가 만일 너의 나라 무고에 들어가 북과 나팔을 부숴 버릴 것 같으면 내가 예를 갖추어서 맞아들일 것이요 만일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파혼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먼저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어서 적병이 나타날 때에는 저절로 소리를 내어 알려 왔던 것이므로 이것을 부숴 버리도록 한 것이다. 이때에 사랑의 포로가 된 낙랑공주는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무고 가운데 들어가 북과 나팔 주둥이를 깨뜨리고 호동에게 보고한대 호동이 부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게 되었는데, 낙랑왕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아무 준비 없이 있다가 고구려의 군대가 성하에 쇄도하게 된 후에야 고각이 다 깨어진 줄을 알고 자기의 딸을 죽이고 나서 나와 항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뿐만 아니라 일설에는 대무신왕은 낙랑을 쳐 멸할 생각으로 청혼하여 낙랑왕의 딸을 자부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본국에 돌려보내어 그 병기를 깨뜨려 버리게 한 것이라고 주기되어 있다.
하여튼 이 얼마나 무서운 모략이냐. 잔약한 여자의 심리를 이용하여 미모와 사랑으로 이것을 농락한 후 자기 본국을 망치게 하는 첨병으로 사용하다니. 그러나 이 모략이라는 것은 대무신왕이나 호동의 모략적인 성격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국제간의 대립, 그보다도 고구려의 남하 의욕이 그만큼 치열하여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을 만큼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도대체 이야기 전부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꾸며진 한 조각 소설일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많은 소설적 윤식이 첨가된 것만은 사실이다.
허울 좋고 풍신 좋은 왕자와 사랑의 포로가 된 왕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이상의 로맨스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낙랑공주의 성격은 충분히 묘사되어 있으나 호동왕자는 전모가 잘 그려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전혀 부왕의 정책의 연장으로 이용되어 바지 저고리 허수아비 노릇에 지나지 못하는 느낌이 있다. 더구나 후자의 주기의 내용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그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는 그 뒤 불과 7개월 만에 ‘왕자호동이 자살하였다.’는 기사를 게재하여 소설적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실로 그 제목 자체가 뉴스 밸류 백 퍼센트이었다. [후략]

‘삽화본 특선 명작 시리즈’를 내며

소설에는 ‘삽화’가 있는 것이 제격이다.
서양 소설에는 ‘키다리 아저씨’, ‘물의 나라 아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어린이 소설뿐만 아니라 어른들 소설에도 삽화가 들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우리 나라에도 신문연재소설에는 훌륭한 삽화가 매우 많다.
“삽화라고 하면 흔히 소설의 설명도인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고 화가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슴 것 같으나 결코 설명도가 아니다. 소설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도리어 그림으로써 독자의 풍부한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소설로써 내용에 지시는 받지마는 이 지시를 받는 텍스트를 조형의 세계에 끌어올려서 독자의 세계로서 감상하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삽화의 정당한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적인 동시에 대중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illustrate 나 illustration이란 것이 원래 밝힌다, 예시한다는 의미에서 온 것인 모양으로서 설명화라는 것은 아닌 성싶다. 보티첼리의 ‘신곡’의 삽화라든지 도레의 ‘실락원’의 삽화라든지 들라크루아의 ‘파우스트’의 삽화라든지 도미에의 작품이라든지 과거의 저명한 삽화는 모두가 예술적이고 대중적이요 결코 설명화가 아닌 한 개의 훌륭한 ‘작품’이다.”「정현웅」
이 ‘삽화본 특선 명작 시리즈’는 소설도 명작이요 삽화도 명작인 작품을 특선하여, 독자들이 명실공히 완성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입체적이요 조화롭게 엮어 이바지하는 시리즈다.
이 시리즈를 통하여 많은 독자들이 새롭고 참다운 문학예술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믿는 바이다.
정산미디어 드림

소설 삽화의 고심
이 승 만(李承萬)

삽화에도 여러 가지 분야가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으로 점령하고 있는 것은 신문소설의 삽화라 할 것이다.
소설 삽화에 대한 과거의 경험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다소 이 방면에 흥미를 가지고 일을 하여 보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은 몇 해 전만 하여도 삽화를 그린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일종 비속한 직업으로만 여기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순수 회화와는 별다른 의미로서 독특한 예술 부문으로 인정되었다는, 말하자면 시대사조의 변천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흥미를 가지게 한 것을 부인할 수 없으나, 내가 삽화를 만저거리면서 자극된 바의 야심이라고 할까, 회화의 대중적 가치, 인쇄술로 통한 현대적 신경지 등, 이것은 확실히 미래에 있어 우리들에게 좋은 사업 지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나의 순수 회화를 내어버릴 생각은 없다. 삽화를 만들 적마다 느낀 것은 순수 회화의 기초적 수련이 없이는 도저히 좋은 삽화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삽화를 회화의 간단한 부업으로 여긴다든지 소홀한 여기로 처리한다는 것은 인식 부족이다. 사실에 있어 상당한 교양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삽화란 그저 붓대를 몇 번만 쓱쓱하면 되는 것, 문제없이 쉬운 것으로―말하자면 값싼 것으로―만 아는 것을 종종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이것은 현재 조선의 신문 삽화가, 편집 시메기리(??마감) 15분 전에 가져오는 소설을 부랴부랴 대강 훑어보고는 눈깜짝할 동안에 그려 놓는 초고속도적에서 나온 전통 있는 관념이라 할까. 무슨 요술부리는 사람 모양으로 삽화가의 비범한 수완을 찬양한 데서 나아온 경탄할 악현상이라 할 것이다.
이런 공기 속에 있는 삽화가들의 고난은 여간 아니라 하겠다.
어떠한 때에 삽화가 잘 되는가, 삽화가로서 작가 혹 신문인, 독자들에게 대한 주문과 태도는 어떠할까를 다 늘어놓을 겨를은 지금 없으므로 삽화의 실제에 있어서 느낀 것 두어 가지를 적어 보려 한다.
삽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게 되는 경우를 말하자면, 그것은 소설의 내용이 나 자신의 마음에 조금 감흥을 주며 아울러 표현할 장면이 화면 구성에 적절할 때라 하겠다. 그러나 아무 흥취를 주지 못하는 소설 혹은 나의 취미와 반대되는 내용의 것, 또는 한 사람의 회화하는 장면이 며칠을 두고 계속되는 경우에는 실로 고심참담한 심경을 맛보게 된다. 어떻게 그림을 짜아 낼까, 변화를 붙일까에 머리가 아플 적이 있다.
더구나 어떤 때에는 앞에 말한 거와 같이 그나마 시메기리 15분 그것도 대일 수 없을 때에는 작가 자신으로부터 전화로, “오늘 삽화는 이러저러한 장면으로 그리시오.” 하고 마치 무슨 설명도나 그리는 듯이 넌지시 통지 줄 때에, 다행히 그 장면이라는 것이 그림으로 만들어서 부족하나마 효과를 이룬다면 별로히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그렇게 꼭 들어맞으란 법이 없다.
그러므로 화공 노릇 하기에도 참으로 딱하거니와 독자―일반 사회의 이해 있는 문화인에게는 미안 막심한 일이다.
외국 신문에서 보는 묘화―그것은 근대 회화의 기법, 말하자면 입체파 이후의 기묘한 수법을 이용한 것이고, 또는 정교하게 발달된 인쇄술을 거쳐 나온 정화된 것을 그대로 삽화가에게 주문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다.
또는 작가의 소설 자체가 고루하기 짝이 없으면서 삽화만은 최신식의 수법으로 주문하는 것을 보면 도리어 그 대담에 악연(愕然)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한 개의 소설이 그 중도에 있어, 어떠한 경우에는 사실주의로, 어떠한 대목에서는 백줴 딴판인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어떠한 때에는 기계주의, 어떠한 때에는 신비적 수법으로 삽사(揷寫)되는 때에, 말하자면 소설의 경향이 종잡을 수 없을 때에는 이것을 전혀 부인하고 내 주장대로만 그려 간다면 별문제 없겠지만, 그러하여도 그 주정꾼이 같은 푸념에 이루 대꾸를 하여 주고 밧자를 하여 주기에는 정신을 좀 상실하고 덤벼야 할 경우가 있는 것이다.
멋도 모르고 값싸다는 격이라 할까? 이것도 교양 있는 계급에서 볼 수 있는 모순된 몰상식이라 하겠다. 삽화는 물론 대중이 알아보아야 할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너무도 대중의 혹은 소인(素人)의 취미에 맞도록 노력한다면 그것은 몹시 속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격적 회화의 기초가 부족한 삽화가는 그 효과가 아무리 대중을 만족시킨다 하더라도 퍽 피상적이요 사속한 취기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대중의 순직한 속미에 영합하는 것은 예술의 정도가 아니요, 사회를 위하여도 결코 좋은 영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다. 대중을 고상한 취미로 끌어올리는 것이 삽화가 급 신문인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삽화에 만일 품격이 없다면 그것은 소설의 장면을 복사하여 놓는 번잡한 중복밖에 아니되는 것이다.
나는 최근 무슨 명확한 이유를 따질 수는 없으나 과거의 경험상 역사적 삽화(시대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미술품으로든지 또는 인쇄물로라도 역사적 유물, 더구나 과거의 우리 선조들의 생활을 알아보기에 어려운 환경이 있는 나로서, 시대물을 그리기 위하여 역사적 고증 급 참고물을 수집 혹 사색해 보는 동안에 의의 있는 사업이 눈앞에 가로놓인 것을 새삼스러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이러한 역사적 가치 있는 좋은 소설가의 작품이 있은 후에, 다시 말하면 작가와 손이 맞은 후의 일이라 하겠다. 나의 이러한 의욕에 동호자가 많이 생기기를 바라며 나의 하고자 하는 기도에 충실한 즐거운 일꾼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삽화만 하여도 대중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것인만큼 삽화가 자신의 부단한 수양도 있어야 하겠거니와 작가, 신문인의 이 방면에 대한 청신한 인식 급 인쇄술의 협력 등 손이 맞아야 발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소설과 삽화가, ‘삼천리’ 제6권 제8호.」

리뷰/한줄평0

리뷰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