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가격
9,900
10 8,910
YES포인트?
49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분야의 이벤트

삽화본 특선 명작 시리즈

책소개

저자 소개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관심작가 알림신청
 

Johann Wolfgang von Goethe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다른 상품

河泰鏞

본명 하태용河泰鏞. 1904년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반대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향리의 삼봉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순흥 안씨 안정옥과 혼인하였다. 졸업 후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의하여 귀향하여야만 하였다.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나 가산이 파산돼 1931년 귀국하였으며, 그 뒤 조선일보 등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소년지 [새소리]에 「글방이 깨어져」가 2등으로 당선되었으며, 1925
본명 하태용河泰鏞. 1904년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반대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향리의 삼봉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순흥 안씨 안정옥과 혼인하였다. 졸업 후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의하여 귀향하여야만 하였다.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나 가산이 파산돼 1931년 귀국하였으며, 그 뒤 조선일보 등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소년지 [새소리]에 「글방이 깨어져」가 2등으로 당선되었으며, 1925년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가 [생장]의 현상문예에 당선되었다. 1927년 [조선문단]에 소설 「최서방」이 당선된 이후, [조선지광]에 「인두지주」를, [조선문단]에 「백치아다다」를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 정비석과 함께 [조선]을 창간하였으며, 「병풍에 그린 닭이」, 「백치 아다다」, 「별을 헨다」 등과 수상집 「상아탑」 등을 남겼다. 그의 초기 작품경향은 현실주의적, 경향파적인 작품세계를 보이기도 했으나, 1935년 「백치 아다다」를 발표한 이후, 예술의 미적 창조 및 자율성을 강조하는 예술지상주의적 작품을 썼다.

계용묵의 다른 상품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12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210쪽 | 340g | 153*224*20mm
ISBN13
9788993117325

출판사 리뷰

파우스트’에 대하여

이 ‘파우스트’는 세계 최대의 문학자인 독일의 괴테가 57년이라는 긴 세월을 허비하여서 쓴 세계 최고의 걸작입니다.,
이 작품은 독일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서 취재한 작품으로, 재미는 있으면서도 너무나 깊은 사상을 담아 놓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누구나 손에 책을 들었다가는 끝까지 읽지를 못하고 놓고 마는 예가 많았습니다. 그렇던 것을 누구나 소학생까지라도 이해할 수 있게 재미나게 번안을 한 것이 바로 이 ‘파우스트’입니다.
원체 이 작품은, 그 예술적인 완성미에 있어서나 사상의 깊이에 있어서, 이 이상을 넘는 작품이 없다고 하는 최고 걸작이니만큼, 번안자는 이 번안으로서나마, 소학생이나 중고등 학생에 한한 독자만을 상대로 하고 싶지 아니하고 대학생은 물론, 일반 사회 인사층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독자층을 상대로 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이 ‘파우스트’의 작자 괴테는 174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장(市長)의 아들로 태어나서 스트라스부르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뿐만이 아니라, 정치, 과학의 부문에 있어서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침과 동시에 세계문학사상에 찬연한 업적을 남긴 대천재입니다.
그가 1832년 83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문학사상에 남긴 유명한 작품으로는, 이 ‘파우스트’를 비롯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양 시대’, ‘에그몬트’, ‘친화력’, ‘이탈리아 기행’ 등입니다.

‘파우스트’의 이모저모

‘파우스트’(Faust)는 독일의 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대표작인 장편의 희곡으로, 전편이 운문으로 되어 있다. ‘파우스트’는 2부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1808년, 제2부는 괴테의 죽음 이듬해인 1833년에 발표되었다.
‘파우스트’는 15세기부터 16세기경의 독일에 실제로 있었다고 하는 독토르 파우스투스의 전설을 바탕으로 하여, 괴테가 거의 그 일생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다. 이 파우스트 박사는 연금술과 점성술을 쓰는 검은 마술사라는 소문에 휩싸여, 악마와 계약하고 마지막에는 영혼을 빼앗기어 몸이찢겼다는 기괴한 전설,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괴테는 어렸을 때 유랑극단의 인형극 파우스트 박사를 보았다고 하며, 젊을 때부터 이 전승에 남다른 흥미를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갖가지 파우스트 전설에서 취재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장대한 희곡을 만들어 내었다.

‘파우스트’에서 연유하는 음악은 여러 가지가 있다.
샤를 구노의 것으로는 제1부를 기초로 한 같은 이름의 오페라 ‘파우스트’가 있는데 상연 회수도 많다.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어 번역을 읽고 감격하여 ‘파우스트의 여덟 가지 정경’을 작곡, 뒤에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극적 이야기 ‘파우스트의 겁벌’로 개작하였다.
프란츠 슈베르트를 비롯한 독일 로만파 작곡가는 본작품에서 텍스트를 골라 가곡을 작곡하였다. 슈베르트의 것으로는 ‘실을 잣는 그레트헨’과 ‘툴레의 왕’이 유명하다.
로베르트 슈만의 ‘파우스트로부터의 정경‘은 연주의 기회는 적지만 오라토리오 형식의 장려한 곡이다.
앗리고 보이트의 오페라 ‘메피스토펠레’는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이탈리아 오페라의 걸작이다.
리햐르트 바그너는 20대 무렵에 ‘파우스트’를 기초로 한 대규모의 교향곡을 구상하였다. 이것은 완성되지 않았으나 제1악장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독립된 작품 ‘파우스트 서곡’으로서 완성되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권유로 ‘파우스트’를 읽고 ‘파우스트 교향곡’의 악상을 얻었다. ‘메피스토 월츠 제1번’도 유명한데, 이것은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시에 이끌린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8번은 ‘파우스트’의 제2부 최종막에서 텍스트를 채택한 것이다.
캐밀롯의 ‘에피카’, ‘더 블랙 헤이로’는 본작을 바탕으로 한 2부작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특히 후자는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온 세계에서 받았다.
술집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노래한 노미의 노래가 몇 사람의 작곡가에 의하여 가곡으로 만들어졌는데, 무소르크스키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한편, ‘파우스트’는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되었다.
‘파우스트’(1926년/독일): F. W. 무르나우 감독.
‘악마의 아름다움’(1949년/프랑스): 르네 클레르 감독.
‘파우스트’(1994년/체코) : 얀 슈방크마예르 감독.
‘나쁜 짓 합시다!’(2000년/미국) : 해럴드 라이미스 감독.
‘파우스트’(2011년/러시아) :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감독.

리뷰/한줄평0

리뷰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