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金東仁, 금동琴童, 춘사春士
김동인의 다른 상품
|
풍운아 흥선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생애
……운현궁은 정치의 중심지며 따라서 이 나라의 중심지로 되었다. 이전에는 비루먹은 개 한 마리 찾지 않던 흥선 댁이나, 지금은 팔도 강산에서 매일 찾아드는 수없는 시민의 무리 때문에, 수십 명의 궁리도 그 응대를 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옛날 흥선이 관직을 내어던진 이래,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던 이 집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봄은 (오랫동안 쓸쓸하였던 만큼)또한 유달리 화려한 봄이었다. 「본문 중에서」 「일러두기」 ① ‘운현궁의 봄’은 1933. 4. 26~1934. 2. 17 ‘조선일보’에 197회에 걸쳐 연재된 소설이다. 단행본은 1938년 10월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처음 간행된 이래, 여러 차례 여러 판본이 간행되었다. 이 삽화본은 원본에 가장 가까운 한성도서주식회사 발행 1948년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저본으로 하고, 여러 판본을 대조, 교정하였으며, 표기는 현용 ‘한글맞춤법’을 따랐다. ② 옛말이나 방언이나 어려운 말 등은 주를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③ 삽화는 신문연재 당시의 그림을 실었으며, 다만 앞 부분의 사진은 당시의 것과 관련 있는 것으로, 현재의 선명한 것으로 바꾸어 넣었다. ‘삽화본 특선 명작 시리즈’를 내며 소설에는 ‘삽화’가 있는 것이 제격이다. 서양 소설에는 ‘키다리 아저씨’, ‘물의 나라 아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어린이 소설뿐만 아니라 어른들 소설에도 삽화가 들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우리 나라에도 신문연재소설에는 훌륭한 삽화가 매우 많다. “삽화라고 하면 흔히 소설의 설명도인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고 화가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으나 결코 설명도가 아니다. 소설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도리어 그림으로써 독자의 풍부한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소설로써 내용에 지시는 받지마는 이 지시를 받는 텍스트를 조형의 세계에 끌어올려서 독자의 세계로서 감상하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삽화의 정당한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적인 동시에 대중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illustrate나 illustration이란 것이 원래 밝힌다, 예시한다는 의미에서 온 것인 모양으로서 설명화라는 것은 아닌 성싶다. 보티첼리의 ‘신곡’의 삽화라든지 도레의 ‘실락원’의 삽화라든지 들라크루아의 ‘파우스트’의 삽화라든지 도미에의 작품이라든지 과거의 저명한 삽화는 모두가 예술적이고 대중적이요 결코 설명화가 아닌 한 개의 훌륭한 ‘작품’이다.”「정현웅」 이 ‘삽화본 특선 명작 시리즈’는 소설도 명작이요 삽화도 명작인 작품을 특선하여, 독자들이 명실공히 완성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입체적이요 조화롭게 엮어 이바지하는 시리즈다. 이 시리즈를 통하여 많은 독자들이 새롭고 참다운 문학예술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믿는 바이다. 정산미디어 드림 ‘운현궁의 봄’과 인물의 형상화 Ⅰ ‘운현궁의 봄’은 김동인이 발표한 11편의 장편소설 가운데 하나다. 그의 장편소설이 대부분 역사에서 취재한 것이고 대중소설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김동인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이광수의 문학에 대한 평가 못지않게 상당한 분량이 될 것이다. 그의 문학을 호평하든 비판하든, 그의 문학은 우리 문학사에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고, 또 오늘날에도 연구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그 연구의 경향은 대체로 단편소설이나 평론에 한정되어 있고 장편소설에 대한 연구는 무척 드문 것같이 보인다. 그것은 장편소설, 특히 역사소설은 본격소설이라기보다 예술적 향기가 부족한 대중소설이라는 데 그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창조성을 생명으로 하는 문학 활동에 비추어 역사소설은 역사의 재해석 내지 역사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볍게 생각될 가능성이 있다. 역사라는 것은 대체로 교육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그것을 소설로 쓴다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선입견도 있고, 작가의 상상의 범위에 어떤 제한과 구속이 따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전제하면서 이 글은 출발한다. 비록 역사의 인물을 내세워 이를 소설화한 것이라 하더라도 작가는 역사상의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형상화해 놓았는가. 한 시대를 이끌어 간 지도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의 고민과 방황, 지략과 술수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은 역사의 기록에 잘 드러나지 않는 작가의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중략] Ⅳ 이 소설에서 보여 주는 소설의 방법은 그의 단편소설에서 볼 수 있는 몇 가 지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첫째, 파노라마의 애용이다. 이 소설은 철종 11년(1860년)부터 고종 원년(1864년)까지 약 4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나 사건 진행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 이전의 사건을 끌어다 배경 설명을 한다. 사건의 촛점을 짧은 기간에 맞추어 이를 자세하게 묘사 또는 서술했다기보다 여러 해에 걸쳐 일어난 사건을 요약하고 있다. 왕족과 종친들의 비참한 삶을 서술하기 위해 그렇게 된 요인을 당쟁 등 이조의 정치 양상에서 찾고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이조의 정치사와 당쟁사를 요약하는 부분도 있다. 이 소설은 장면전환, 또는 시점의 전환을 25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데, 2장에 해당하는 부분은 명종 때부터 철종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요약하고 있다. 300년간의 이야기를 불과 200자 원고지 60매 내외로 압축한 것은 사건의 진행을 상당히 요약한, 파노라마의 애용이 두드러진 예가 될 것이다. 그는 단편소설에 있어서도 어느 한 장면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거나 서술하는 장면중심적인 수법이 적은 대신 파노라마를 즐겨 애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이 소설에도 드러난다. 둘째, 인물묘사에 있어서 작가의 주관적인 판단을 그대로 제시하거나 직접적 표현방법에 주로 의존하고 있는 점이다. 후일에 조선 팔도 삼백 주를 호령하던 대원군―당시의 한 가난한 종친에 지나지 못하는 흥선군 이하응은 취한 걸음을 비틀비틀 옮겼다. 향하는 곳은 경운동 자기의 집이었다. 왕족의 한 사람으로 흥선도 자라서는 봉군(封君)이 되어 ‘군’이라는 명칭은 붙어서 흥선군이라는 명색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세력 없고 그 위에 당시의 권문(權門)인 김씨 일족이며 그 밖 권도가들에게 멸시를 받고, 거리의 무뢰한들과 짝하여 술이나 먹고 투전이나 하러 다니는 그는 어디로 보든지 한 개의 표랑객이지, 왕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때때로 뜻없이 호령을 할 때나, 혹은 무슨 마음에 맞지 않는 일 때문에 휙 돌아서고 말 때에 그의 무서운 위압력이 걸핏 보여서 범인(凡人)이 아닌 그림자가 눈 밝은 사람에게는 보이는 뿐이었다. 가난한 종친, 권세 없는 왕족―이 주정뱅이 공자는 어두운 밤 바람 찬 거리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기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雲峴宮의 봄’, 한성도서주식회사, 1948, 5면」 이 인용문에서 보듯 성격제시 또는 인물의 묘사가 작가의 주관적 판단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독자가 상상을 통해서 이 인물의 모습이나 성격을 재구해 볼 수 있는 영역이 없다. 독자는 작가의 판단에 무조건 따르라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자세가 엿보인다. 이 점은 그의 단편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사건의 진행이 있어서 약간의 입체감을 보여 주고 있다. 사건의 진행은 대체로 현실적 시간의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으나 현재를 서술하다가 과거로 올라가고, 그것이 장면전환과 함께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등 약간의 입체감을 주고 있다. 이 소설의 직접적 배경은 물론 철종 11년부터 고종 원년까지이지만 한 걸음 더 확대시킨다면 철종 말부터 대원군이 사망할 때까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두인 1장에 1896년 무술년 2월 대원군의 죽음과 그에 따른 부대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장면전환과 함께 1860년, 그의 죽음으로부터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낙척시대의 흥선군 이하응의 비참한 삶과 왕족들의 처지, 권세가들의 작태를 서술한다. 다시 장면전환과 함께 2장에 이르면 이하응 개인의 이야기에서 떠나 이조의 역사 특히 정치사를 요약하고, 3장에 들어서면서 해가 바뀐 신유년의 일들을 기술하고 있다. 대체로 현실적 시간의 순서대로 사건을 진행하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등 시간의 처리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것이 입체감을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점도 그의 단편소설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Ⅴ 역사에 나타난 인물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역사가의 그것과 문학가의 그것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인물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역사가는 대체로 그 인물이 이루어 놓은 치적과 그것이 역사에 어떤 의미와 영향을 갖고 있는가에 촛점을 모으게 될 것이다. 그가 얼마나 탁월한 인물인가, 그가 지니고 있는 경륜과 능력을 나라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한 삶에 어떻게 발휘했는가를 탐색할 것이다. 문학적 관점에서 한 인물에 대한 접근은 역사가의 그것처럼그가 지니고 있는 자질, 능력, 경륜, 그리고 그가 이루어 놓은 업적에 유의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그가 지니고 있는 인간성, 양심, 도덕적 삶에 대한 지향, 이웃과 더불어 인간다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열망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목적이나 결과가 아무리 훌륭해도 수단 방법이나 과정이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것이라면 긍정적인 인물로 형상화하는 것은 문학정신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아주 평범한 삶을 살다가 죽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가 얼마나 인간을 뜨겁게 사랑했는가, 그가 얼마나 이웃과 함께 산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는가, 그가 얼마나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기에 노력했는가, 무의식중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회한과 마음의 갈등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보여 주는 그런 인물이 긍정되어야 할 것이다. 한 시대를 손아귀에 쥐고 역사의 물줄기를 그의 의지대로 움직인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 하더라도 비도덕적인 삶을 살다가 갔다면 긍정적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 작품 속에 ‘대원군’을 긍정적인 인물로 형상화해 놓았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한다면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있다. 그것은 1930년대 초 이 나라가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있었다. 우리 민족(당시의 독자들)은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그럴 때 우리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나올 수 있고, 우리의 역사가 소망스러운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면 그 이유를 생각할 것이다. 확실히 이조의 역사에는 실질보다 형식, 능력보다 도덕을 소중하게 여긴 일면이 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나라를 약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여기에 대한 반성이 도덕이나 윤리보다 능력을 앞세우려는 반작용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대원군을 긍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한 번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일 수 있다. 김동인은 그의 단편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도덕적, 윤리적인 삶을 산 인간보다 초인적 능력을 지녔거나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인물을 강하게 긍정한 작가다. 그것이 그의 인간관의 한 모습이다. 그는 그런 입장에서 ‘대원군’을 긍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김동인의 인간관과 역사관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김영화 교수의 ‘‘운현궁의 봄’과 인물의 형상화‘ 중에서」 운현궁의 봄 - 김 동 인 ‘운현궁의 봄’을 쓰기 위하여, 재료를 취집하기 위하여 고로(古老)들을 찾는 가운데, 옛날 참판 이상의 고관으로 있던 몇 노인에게, “대체 상감은 중전마마를 부르실 때에 어떻게 불으십니까? 우리들같이 여보 마누라 하고 불으시지는 않겠고 어떤 특별한 명사가 있겠지요?” 하고 무르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내관(內官), 여관(女官)[그 가운데도 근시(近侍)하는 사람]이라야 이것을 알지, 고관들도 알지 못한다. 「중략」 종9품으로 정1품까지 합 18품의 계급의, 계급마다, 갓 끈이 다르고 인사하는 법이 다르고 타는 가마나 수레가 다르고, 관자가 다르고 의대(衣帶)가 다르고 부르는 명칭이 다른 당시의 일을 쓰기는 과연 골치쏜다. 전반에 긍하여 상세히 쓰기는 후의 기회를 기다린다. 「‘장편소설과 작자 심경’(‘삼천리’ 제5권 제9호, 1933. 9.)」 작자에게서 독자에게 - 김 동 인 이 가운데 쓴 용어를 할 수 있는 데까지 현대어로 사용케 하였습니다. 궁중 예의며 용어 등에 대하여 너무도 무지하므로 고로(古老)들을 찾아서 많은 재료를 구하여 놓았고, 넉넉히 이 소설을 쓸 만한 지식은 얻었지만, 그 너무도 까다로운 용어와 예식은 오히려 현대의 독자들에게 번잡한 감을 주겠고, 현대 독자로서는 이해키 어려운 것이 많이 있겠으므로, 이 소설의 본의에 의지하여 할 수 있는 대로 현대화하였습니다. 그런 줄 아시고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운현궁의 봄’ 연재 제33회에서」 작품과 제재의 문제 - 김 동 인 「전략」 근년에 흔히 역사소설을 쓴다. 이것은 전혀 공상의 인물로 하여금 연애하고 울고불고 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 있다. 진실성도 있다. 그러나 역사소설에 있어서도 ‘역사에 있는 사실’ 그대로를 단지 묘사 형식으로 늘어놓는 데 불과한 역사의 되풀이는 하기 싫다. 조선의 역사는 거지반이 곡필(曲筆)이 많다. 그것을 상고하여 곡필로 된 듯한 데를 다시 들추어 내어서 진실을 찾아보려는 데 비로소 흥미가 생기는 것이다. 태고사(太古事)는 찾을 바이 없지만 신라 초로 볼지라도 야사(野史)인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대조하면 신라 건국의 연대가 서로 다르다. 당사(唐史)로 보아도 고구려의 건국이 신라보다 먼저이다. 그런데 신라 라인(羅人)인 김부식은 신라 건국을 고구려보다 먼저 되게 하기 위하여 계림전설(鷄林傳說)로 신라 초년을 잡아 여(麗)보다 수년 앞서게 하였고, 백제 회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영웅 견훤(甄萱)을 (신라의 원수인 까닭으로) 간웅(奸雄)으로 만들었고, 고려 말년의 역사는 이조(李朝)에서 죄 다시 꾸몄으며 연산(燕山), 광해(光海) 등 폐왕의 사실(史實)은 폐왕한 신하들이 개조하였고 단종(端宗) 세조(世祖) 양조사는 남효온(南孝溫) 등이 개조하였고, 당쟁과 정쟁 등으로 왕이나 조정이 바뀌면 전사(前史)는 번복되고―. 좌우간 태조(太祖) 대부터 고종(高宗) 대까지 역사가 정실(正實)히 사책(史冊)에 오른 적은 한 대도 없었으나 상위되는 데를 적출(摘出)하여 소설화하는 것이 근년 역사소설에 위주하는 큰 원인의 하나이다. 사가(史家)의 권한은 정사(正史)에 적힌 이상은 못 나아가지만 소설가는 자기의 주관에 따라서 사상(史上)에 간웅으로 된 사람을 영웅화할 수도 있고 역사 도덕으로 비난을 받을 사람도 찬양할 수 있다. 사상(史上)의 영웅을 간물(奸物)로 취급하거나 사상(史上)의 충효를 낮추는 것은 법률로 금한 바니 못한다 할지라도 역사의 곡필로 억울한 욕을 본 사람의 원(怨)을 편다든가 하는 일은 행할 수도 있거니와 또한 근자에 그런 방면으로 취미가 돌아서 울고불고 하는 인조 비극보다 훨씬 더 소설화할 흥미가 있고 소설이 보여 주어야 할 인생의 일화(一?)도 이런 곳에 더 많이 숨어 있다. 흔히 독자에게서, “네가 쓰는 이야기는 역사에 없는 바가 아니냐?” 하며 혹은, “네가 쓰는 소리는 역사와 반대다. 역사를 잘못 읽던가 똑똑히 못 읽던가 한 모양이다. 정신 차려서 잘 참고하여 쓰는 것이 옳을 줄 안다.” 하는 충고를 받는 일도 있지만 이것을 알고 쓰는 바라 대답할 필요도 없거니와 어떤 분은, “너는 야담만을 쓰느냐?” 고 책망하는 이도 있다. 도대체 모든 것이 혼돈 천지인 조선에서는 옛날 이야기면 덮어놓고 야담으로 아는 분도 꽤 있는 모양이다. 역사소설과 야담이라는 것은 전연 성질이 다른 것인데 그 점을 구별치 않고 옛말을 쓰니 즉 야담을 쓰는 것이라 속단하는 폐풍이 있다. 타락했다고 꾸중하는 이도 있고, 막다르게 되었다고 타매하는 이도 있고, 궁했다고 비웃는 이도 있는 등 역사소설을 흔히 쓰는 데 대해서 가지각색의 편이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을 타락했다고 낙심도 안 하고 업 막혔다고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궁했다고 탄식도 안 하고 거저 나 갈 길을 갈 뿐이다. 내 심경이 언제 또 다시 변하면 울고부는 소설을 쓸 날이 또 올지도 그것은 예단할 수 없다. 「후략」 「‘매일신보’ 1941년 3월 23일~2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