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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본 특선 명작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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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상편
하편
해설_ 다시 보는 ‘재생’ : 강현구
‘재생’ 관계 학술 논문
‘재생’ 주요 서지

저자 소개 1

李光洙, 춘원春園

호는 춘원(春園). 한국 현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가장 중요한 작가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사상과 문학에 눈뜨고 이를 한국적 사상 및 문학 전통에 접맥시켜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어나갔으며, 한국전쟁 와중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놀라운 창작적 삶을 이어간 작가였다. 14세 때 일진회 유학생으로 도일하여, 메이지 중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소년]지를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호는 춘원(春園). 한국 현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가장 중요한 작가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사상과 문학에 눈뜨고 이를 한국적 사상 및 문학 전통에 접맥시켜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어나갔으며, 한국전쟁 와중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놀라운 창작적 삶을 이어간 작가였다. 14세 때 일진회 유학생으로 도일하여, 메이지 중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소년]지를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신문학 사상 최초의 장편인 『무정』을 연재했다.

1919년 도쿄 유학생의 2 ·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했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보석된 뒤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 8 ·15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

34년 동안 작가로 활동하면서 『개척자』, 『선도자』, 『재생』, 『마의태자』,『단종애사』, 『군상』, 『흙』,『유정』, 『이순신』, 『그 여자의 일생』, 『이차돈의 사』, 『그의 자서전』, 『사랑』, 『원효대사』 등 60여 편의 소설과 시가, 수필, 논문, 평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몽주의 문학을 통하여 브나로드 운동 등 사회개혁 활동을 북돋우기도 하였다. 일제 시대 그의 친일 행각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가 자강도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학은 50년이라는 지속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소설 외에도 시가·평론·수필 등 전영역에 걸친 방대한 규모를 드러냈다. 그러나 주류는 역시 소설이며 더불어 문학사적 가치를 1차적으로 결정해주는 것은 1910년대 계몽주의 소설들이다. 이 시기의 장편 『무정』(1917)은 우선 시제의 정확한 구별과 새롭고 의욕적인 문체 등으로 형식 면에서 근대소설로서의 획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전의 신소설과 달리 당대인들의 삶과 성격을 실감나게 그렸고, 사회현실에 대응하는 젊은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근대성을 획득하고 있다. 또한 시대적 이념이라 할 수 있는 부르주아 계몽주의 입장에서 자유결혼 및 근대적 자아각성의 문제 제기를 통해 전통적 인습·윤리를 반대하고, 신교육·신문명을 통한 자강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나타난 추상적 계몽주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인식의 결여는 『무정』을 진정한 의미의 근대소설로의 평가를 유보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정』과 같은 계몽소설의 연장에 놓이는 『흙』은 농촌계몽소설로서, 브나로드 운동 등의 민족적 교화운동의 일환에서 나온 작품이다. 이광수의 농촌현실에 대한 관심은 이보다 앞선 1916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농촌계발』이라는 논문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이 글에서 우리 농촌의 결점 중의 하나로 '교육이 없음'을 지적하며 선각자적 지식인이 농촌계발에 앞장서야 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정신에서 나온 『흙』은 농민과의 정신적 연대성이 고조되던 당대의 상황을 반영하며 주인공 '허숭'은 자신의 신분(변호사)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가는 이상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한편 이광수의 작품 중 상당수가 남녀의 애정을 다루고 있는데 『유정』(1933)·『그 여자의 일생』(1934~35)·『사랑』(1938) 등에 나타난 남녀간의 애정은 통속적인 애정소설과는 달리 정신적인 이상주의를 지향하는 특유한 성격을 지닌다.

이광수는 『단종애사』(1928~29)를 포함한 다수의 역사소설을 발표해 역사소설가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발휘했다. 그가 역사소설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 후반이며,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항이 어려워지자 현실적인 소재보다 역사소설의 비유적 기능을 빌려 현실을 비판하고 이에 항의하려는 역사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대표작인 『이순신』(1931~32)·『이차돈의 사』(1935~36)·『공민왕』(1937) 등은 옛 것을 재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역사를 대중화한 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복고주의에 흘러 당대 현실에 대응한 실현적 관심을 제기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광수의 대표적 평론은 초기의 『문학의 가치』(1910)· 『문학이란 하(何)오』(1916)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 평론이라 할 수 있으나 명확한 문학관에 입각하여 하나의 문학적 주의를 이론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서구 문학의 여러 주의를 체계 없이 나열한 한계를 드러낸다. 초기의 잡다한 주의들은 그후 톨스토이 예술론의 영향 아래 공리주의 내지 계몽주의에 뿌리를 내렸고 이후의 문학론들은 대개가 '인생을 위한 예술' 및 '도덕과 예술의 일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래서 그의 논설은 항상 주목이 되었고 당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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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4월 01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430쪽 | 738g | 153*224*30mm
ISBN13
9788993117134

책 속으로

1
청년회에 열린 추기 음악회가 아직 다 파하기도 전에 부인석에 앉았던 순영은 슬며시 일어나서 소곳하고 사뿐사뿐 걸어 밖으로 나온다. 그의 회색 삼팔치마는 흐느적흐느적 물결이 지는 대로 삭삭하고 연한 소리를 내며 걸음발마다 향수 냄새가 좌우편 구경꾼의 코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잠깐 무대에서 눈을 돌려 순영을 바라보고는 픽픽 웃기도 하고 수군수군하기도 하였다.
“순영이다.”
“저게 김순영이다.”
하는 속삭임이 학생들 중에서 들린다. 과연 순영은 이날 밤에는 더욱 예뻤다. 호리호리한 키와 날씬한 몸맵시, 얌전하게 튼 윤이 흐르는 머리 모양, 오늘따라 순영은 더욱 예뻤다. 바탕도 예쁜 얼굴이지만, 학교 안에서 소문이 나도록 순영은 화장에 힘을 쓰고, 또 화장하는 솜씨가 있으며 옷감 고르는 것이라든지 옷고름 매는 것까지 모두 남보다는 모양있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갓스물이라는 한창 필 대로 다 핀 꽃이다. 다만 흠을 잡자면 그의 얼굴에 살이 좀 부족해서 풍부한 맛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흠 없는 옥이 어디 있나, 이만하면 서울 여학생 중에 이름난 미인으로 청년들의 사모하는 꽃이 되기에는 넉넉할 것이다. 게다가 재주도 있고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잘한다. 진실로 서울 장안에 젊은 사람치고 김순영의 이름을 모를 사람은 없다.
순영은 가만히 문을 열고 나왔다. 문 밖에는 한 삼십분이나 전부터 어떤 네모난 모자 쓴 학생 하나가 맘을 진정치 못하는 듯이 지키고 서서는 가끔 사람 안 보는 틈을 타서는 문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순영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는 얼른 모자를 벗었고, 순영은 잠깐 멈칫하더니 얼른 그 학생의 곁으로 뛰어가서 손이라도 잡을 듯이 반가운 모양을 보이며,
“아이, 벌써부터 나와서 기다리세요?” 하고 방끗 웃는다. 앞니에 씌운 금니가 비상히 강하게 번쩍한다.
“나온 지 한 삼십분 됐어요! 벌써 아홉시 반입니다.” 하고 학생은 순영이가 늦게 나온 것을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순영을 노려본다.
“아이 어느새 그렇게 늦었어요? 그래도 시간은 넉넉하지요?”
순영도 무슨 일을 그르친 듯 근심하는 표정을 한다. 그 짱긋하고 양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사람을 미혹하는 힘을 가졌다.
“어서 나가야 돼요! 그놈의 청량리 전차를 믿을 수가 있나, 어떤 때에는 이십분씩이나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걸! 댁에 갔다 오실 새는 없습니다. 바로 나가야지.” 하고 학생은 순영이야 따라오거나 말거나 급히 가야 된다는 듯이 한 걸음 앞서 층층대를 향하고 나온다.
순영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이, 또는 좀 성을 내는 듯이 한 번 더 양미간을 짱긋하고는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다시 상끗 웃고 빠른 걸음으로 학생의 뒤를 따라 층층대 중간에서 그를 앞서려는 듯이 몸을 스치며 그의 손을 더듬어 한 번 꼭 쥐고,
“그럼 바로 나가요, 우리 자동차 불러 타고 나가요! 시간 안 늦게.”
하고 고개를 돌려 학생을 본다.
학생도 하릴없는 듯이 빙끗 웃고는 둘이서 청년회관 문을 나섰다.
“자동차!”
자동차란 말에 너무 으리으리해서 놀라기도 하였으나 전차를 타고 가다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돈을 좀 들이더라도 자동차로 가는 것이 좋겠다. 더욱이 순영이와 단둘이 자동차를 달려가는 것을 상상할 때에 학생은 자릿자릿한 기쁨을 깨달았다.
“마침내 순영은 내 것이다!” 하는 승리의 강렬한 기쁨을 깨달았다. 음악회장에서는 손뼉 치는 소리가 어디 딴 세상에서 오는 소리같이 들린다.

2
순영을 동아부인상회로 들어가 기다리게 하고 신봉구라는 그 학생은 자동차를 구하러 돌아다녔다. 오늘이 마침 음력 팔월 중순이라 장안 인사들이 한강 철교로 청량리로, 혹은 술친구를 싣고 혹은 기생들을 싣고 달구경 다니느라고 자동차들은 모두 다 나가고 말았다. 봉구는 종로로 구리개로 마라톤 경주하는 사람 모양으로 돌아다니며 자동차를 찾았으나 하나도 얻어만나지 못하였는데, 그의 왼쪽 팔목에 맨 니켈 시계의 가느다란 바늘은 벌써 열시하고도 반을 가리킨다. 인제 삼십분이다. 열한시까지는 청량리역에를 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인제는 전차로도 안 되고 인력거로도 안 된다. 만일 자동차를 얻지 못하면 오늘 기회는 지나가 버리고 만다. 이주일 동안이나 그렇게 무진 애를 쓰고 밤잠도 편히 못 자고 학교도 결석을 하여 가면서 지어 놓은 이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기회를 한 번 놓치면 다시 안 돌아올는지를 누가 아나. 여자의 맘은 바람개비와 같다. 금방 동쪽을 향하였다가도 어느덧 서쪽을 향한다. 한 번 서쪽으로 향한 여자의 생각을 동쪽으로 다시 끌기는 하늘에 오르기와 같은 일이다. 여자의 맘은 결코 두 번도 한 번 가던 길을 다시 가기를 원치 않고 그는 항상 새길을 찾는다.
“그렇게 어려우시거든 그만두세요, 다른 데도 구하려면 구할 데가 있으니까요.” 하던 순영의 말에 전신이 찌르르하게 아팠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까짓 돈 삼백원! 순영이 같은 계집애 뒤에는 삼백원커녕 삼천원, 삼만원의 수표는 아무 때나 떼어 드리리다 하고 수정 도장 한 손에 들고 따라다니는 어중이떠중이가 여간 둘셋만이 아니다. 봉구에게는 그 삼백원 돈은 자기의 일생의 밑천인 학비인 동시에 육십이 넘은 늙은 어머니의 양식이다. 그러나 순영에게야 그것이 무엇이 끔찍하랴.
오늘은 꼭 순영이를 데리고 가야만 된다. 순영의 내게 향한 맘이 바람개비 모양으로 팽 돌아서기 전에 순영을 내 것을 만들어야 된다. 그리하려면 원산 가는 오늘 밤차를 꼭 잡아타야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봉구의 맘은 견딜 수 없이 조급해진다.
“순영을 잃어버리고도 내가 살 수가 있을까?”
조급한 중에도 조선호텔을 향하고 예전 소공동 골목으로 뛰어들어가는 봉구는 혼자 생각하였다.
“못 해! 못 살아! 꼭 못 살 것을 어찌하나?”
순영이가 없으면 봉구는 꼭 못 살 것만 같았다.
조선호텔에는 마침 들어오는 자동차 한 대가 있었다. 지배인은 호텔 손님이 쓰실 터이니 못 빌려 주겠다고 하는 것을 마침 어느 아는 사람의 조력으로 얻기는 얻었다. 그러나 시간은 열시 사십오분, 열한시까지에는 겨우 십오분이 남았다. 그러나 열한시 오분에만 정거장에 가면 차는 탄다. 봉구는 푸근푸근한 자동차 쿠션에 앉아서 몸을 흔들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자동차가 동아부인상회 앞에 서서 뚜뚜하고 두어 번 소리를 지를 때에 순영은 문을 열고 무엇을 한아름 안고 나온다. 안으로서는,
“안녕히 가십시오.” 하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닫힌 뒤에도 창으로 내다보는 여자 점원의 흰 얼굴과 깨득깨득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봉구는 무슨 큰 모욕이나 당하는 듯이 불쾌하였다. 그래서 자동차 문장 그늘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행길 쪽으로 돌렸다. 순영이가 곁에 앉는구나 하면서도 일부러 외면하고 있을 때에 웬 인버네스 입은 얼굴 흰 자가 고개를 기웃하고 자기네를 들여다보고 지나간다. 봉구는 더욱 불쾌하여서 자동차가 떠난 뒤에도 순영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도 아니하였다.
순영은 봉구의 눈치도 못 차린 듯이 동아부인상회에서 들고 나오던 뭉텅이를 쳐들어 봉구의 눈 앞에 내밀면서,
“이것 보구! 이게 뭔데요?”
하고 몸을 봉구에게로 싣는다. 「중략」

209
순영이가 다시 살아만 나오면 봉구는 그를 자기의 품에 안고 영원히 놓지 않으리라고 맹세를 하건만 한 번 죽은 순영은 다시 살아날 리는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서 울고 엎더져 물 속으로 흘러들어가려 하는 봉구부터 끌어내고 순영의 시체를 물 밖으로 끌어내어 너럭바위 위에 놓은 때에는 봉구는 정신없이 순영의 찬 가슴에 얼굴을 대고 울었다. 자는 사람을 깨우는 듯이 몸을 흔들기도 하였다.
얼마나 사랑하던 사람인가―그런데 그 사람은 소리 없는 시체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한 마디만 말을 하였으면 한이 없겠다. 봉구 자기가 지금까지 변함없이 순영을 사랑하여 왔다는 것과 순영의 지나간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겠다는 말만 들려 준 뒤에 순영이가 죽었더라도 한이 없을 것 같았다.
금곡 왔을 때에 봉구가 한 마디만 부드러운 말을 하여 주었더라도 순영이가 죽지는 않았을 것을―순영을 사랑하노라고 한 마디만 하여 주었던들 순영은 자기의 사랑의 품 속에서 남은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을―세상에서 다시 지접할 곳이 없어 자기를 찾아온 순영을 자기마저 냉대하여 죽음의 나라로 보낸 것을 생각할 때에 봉구의 가슴은 칼로 우비는 듯이 아팠다.
피가 똑똑 흐르는 단풍 가지에 덮인 두 시체를 앞세우고 구룡연의 깊은 골짜기를 내려올 때에 봉구는 그 지접할 곳 없는 두 영혼이 공중에 떠서 자기를 따라오면서,
“무정한 사람! 무정한 사람!” 하고 원망의 눈물을 흘리는 듯하였다.
과연 나는 무정한 사람이다. 내 품을 의탁하고 들어온 두 생명을 건져 주지를 않았다. 마치 물에 빠져 살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두 생명을 내 손으로 떠밀어 낸 것과 같다. 아아, 무정한 봉구야, 너는 이천만 조선 불쌍한 생령을 건지기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네 품으로 들어오려는 순영과 그의 불쌍한 소경 딸을 건지지 못하였구나! 봉구는 이렇게 스스로 애통하였다.
봉구는 이틀 동안 밤을 새워 순영의 시체를 지키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둘째 날 밤 거적자리로 만든 엇가게 속에서 봉구가 혼자 시체를 지키고 있을 때에 자정도 넘고 음력 팔월 스무사흗날 하현 달이 동석동 육육봉 위에 걸렸을 때에 어떤 사람의 발자취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등잔불 빛에 비췬 순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았던 봉구는 고개를 돌려 어떤 장삼 입은 중의 모양을 보았다. 그 중은 고개를 숙이어 엇가게 속으로 들어오며,
“봉구! 그만 순영이가 죽었네?려.” 하고 봉구의 손을 힘껏 쥐고 운다.
“이게 웬일인가?” 하고 봉구도 앉았다 일어나며 놀랐다. 그 중은 순흥이다.
“자네를 안 보리라 하고 여기까지 왔다가는 가고 왔다가는 갔네. 그렇지만 아무리 하여도 자네를 안 볼 수가 없고 또 죽은 누이의 얼굴도 한 번 안 볼 수가 없어서 왔네……. 그만 순영이가 죽었네그려, 죽었어!” 하고 순흥은 순영의 시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운다.
“내가 죽인 걸세, 용서하게.” 하는 봉구의 말을 막으며,
“저도 만족하겠지. 비록 이렇게 섬거적에 싸였을망정 자네 손에 묻히는 것을 젠들 기쁘게 알지 않겠나. 고마워, 자네도 이애의 허물을 용서해 주게. 내가 제 맘을 알거니와 비록 맘이 약하여 여러 가지 유혹에 넘어갔다 하더라도 제가 사랑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하고는 순흥은 작별을 하자는 듯이 봉구에게 손을 내민다. 봉구는 청하는 대로 손을 주면서,
“가려나?” 하고 순흥의 바투 깎은 머리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본다.
“응, 가네. 세상을 버린 내가 아닌가. 어디를 가든지 자네와 조선을 위하여 기도함세.” 하고는 저편 송림 속으로 스러지고 만다.
이튿날 신계사 동구 밖 길 왼쪽에는 새 무덤 둘이 가지런히 생기고 그 중 한 무덤에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순영의 무덤’ 이라는 목패가 섰고 그 목패 뒤 옆에는,
‘무정한 봉구는 울고 세우노라.’ 하고 좀 작은 글자로 씌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새로 엮은 우리 명작
미국의 잡지학자 프랭크 루더 모트는 베스트셀러의 요인을, ‘종교적 호소, 선정주의, 자기 개량의 동기, 단신의 모험, 선명성?발랄성, 적시성, 유머와 눈물, 환상, 성적 흥미, 이국정취’ 등이라고 하였다.
이 ‘재생’은 위에 말한 베스트셀러의 요인에 거의 전적으로 들어맞는 특유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춘원의 작품을 흔히 비판적으로 평가한 김동인님도, “‘재생’이 ‘동아일보’상에 연재될 때에 얼마나 많은 학생(그 중에서도 여학생)이 신문 배달부를 마치 정인이나 기다리듯 기다렸으며, 서로 소설의 전개를 토론하며 슬퍼하고 기뻐하였던가.”라고 그 선풍적 인기를 말하고, 또 “춘원의 전작품을 통하여 이 ‘재생’ 상편만치 기교에 있어서 완전한 자가 없다.”고 그 문장 표현의 극치를 상찬하였다.
춘원은 소설은 “진선미와 그리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재생’은 주제성이 뜻깊으며, 우리말 어휘가 풍부하고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다. 춘원의 소설 가운데 이 ‘재생’만큼 흥미진진한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와 같이 주제성도 의미깊고 게다가 아름답고 재미있으니 가히 명작 소설이요, 예술품으로도 일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철저하게 신문 ‘동아일보’에 연재된 ‘재생’을 텍스트로 삼았다. ‘재생’은 몇 차례 단행본으로 간행된 바 있으나 그 텍스트들에서 탈락과 오류가 적잖이 발견되어서, 신문 연재 ‘재생’을 오랜 시간을 들여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단행본 ‘재생’도 혹시 출간 당시 작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나 아닌가 하여 재삼 면밀히 검토하고 참고하였다.
한편, 지난번 우리 정산미디어의 전신인 문화산업연구소에서 발행한 ‘재생’은 신문 연재 당시의 안석주·단곡 그림 삽화를 실었으나 선명하지 않아서, 이번에 새로 엮은 ‘애장판 재생’은 강대진 감독의 영화 ‘재생’(1969년)의 여러 장면을 삽화로 실어 더욱 예술적 향기를 높이고 선명하며 현실감이 나도록 하였다. 많은 독자들이 이 보기 드문 대표적 춘원 명작을 뜻깊고 재미있게 읽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시 보는 ‘재생’
강 현 구「호서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1. 다시 새겨야 할 ‘재생’의 가치
‘재생’은 1924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당시 춘원은 상해임정에서 손을 떼고 귀국하여 변절자란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개벽’지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으로 호된 시련을 겪었다. 이런 이유로 ‘재생’은 세인의 지대한 관심 속에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재생에 대한 평가는 주로 애정소설로만 취급하거나 혹은 기독교적 영향을 지엽적으로 설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우기 동인이 ‘재생’에 나타난 '성격의 불통일성'을 논한 이래, 부정적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재생은 당대인들의 열렬한 관심에 걸맞게 1920년대의 시대상과 인물에 대한 세밀하고 실감나는 묘사를 통해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자인 이광수의 인생 역정이 진솔하고도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3·1운동 후의 혼돈스런 시대상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 그리고 기독교의 수용 같은 문제들이 1920년대의 시대상과 인물들의 실제 삶 속에 오롯이 녹아들고 있다.
대가의 풍모에 걸맞게 시대를 꿰뚫어보는 시각의 심도와 폭이 돋보이며 그것을 인물들의 구체적 삶 속에서 실감나고 재미있게 형상화해 내는 장인적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재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할 이유이다. 시대상의 반영, 야누스적 인간, 기독교의 수용이란 시각을 두고 ‘재생’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2. 시대상의 반영
이광수의 소설이 전대 소설에 비해 갖는 특징 중의 하나는 시대의 전형을 잘 반영하고 있는 점이다. 창작 당시의 시대상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작품의 현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정’은 급진개화주의와 점진개화주의의 대립상을, ‘흙’은 1930년대 농촌계몽운동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점은 1930년대에 김태준에 의해 ‘당시 형세의 반영’이란 지적을 받았으며, 그 후의 논의도 대체로 긍정하고 있다.
‘재생’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작품이 발표된 1924년 당시의 시대상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3·1운동 후의 시대적 분위기가 그려지며, 특히 중심인물 순영을 통해 동시대 신여성의 삶이 재현되고 있다.
그럼, 작자는 당시의 사회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첫째로,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조선에는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사고가 팽배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핍박받는 조선인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시도한 3·1운동이 실패하자 조선인은 좌절감 끝에 개인의 안락만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이 지나가고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식어서 나라나 백성을 위하여 인생을 바친다는 생각이 적어지고 저마다 저 한몸 편안히 살아갈 도리만 하게 된 바람은 깊은 듯한 W여학교 기숙사에도 불어 왔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는 각 인물들의 사고와 행위를 강력히 규제한다. 먼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신세대들이 심한 좌절감을 겪게 된다. 특히 3·1만세 시위와 관련되어 2년 8개월의 영어생활 끝에 출옥한 봉구는 배신감까지 느낀다.
“감옥에 있는 동안 봉구의 생각에는 아직도 사람들은 이구석 저구석 수군수군거리고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 가면 모두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들도 잘 아니하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 본즉 사람들은 모두 쾌활하고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사람들같이 보였다. 세상에 어리석은 것은 오직 자기뿐인가 하고 양미간을 찌푸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신세대가 독립운동으로 표상되는 자기희생적 삶으로부터 이기주의적 삶으로 변조될 가능성은 다분했던 것이다. 아울러 백윤희로 대표되는 배금주의적 인물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러한 전제적 사실 위에, 순영을 중심인물로 내세워 당대 신여성이 처한 삶의 조건을 형상화하고 있다. 순영은 미션계인 W학교에 재학중이다. 뛰어난 미모로 세인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절실한 기독교인인 P부인의 영향으로 고결한 성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순영은 배금주의적인 세태 풍조에 접하게 되고, 또 여러 신여성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면서 크게 변하게 된다.
순영은 많은 신여성들이 자유연애를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조선 신문화 초기의 신여성들이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생활 끌에 대단히 비참한 말로를 겪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 결과 순수한 애정 추구라는 관념적 사실보다는 부유한 생활의 영위라는 실리적 사실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 그러므로 상대 남성을 평가하는 척도는 인간적 매력보다는 재산의 다과이다. 가장 성공한 결혼은 부자의 첩으로 가는 것이라는 극단론까지 나오게 된다. 당대 신여성에 있어 ‘연애와 돈’ 이상 가는 그 어떤 목표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바로 이것이 춘원이 본 당대 신여성의 전락상이다. 아울러 세부적으로는 독립운동사건, 주식 및 미두 거래 등을 기술하고 있어, 당대 사회의 여러 실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3. 야누스적 인간
순영에게는 두 가지 사고체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미션계 W학교에서 혹은 그 학교 사감인 P부인에게서 배운 종교적, 도덕적 인생관이며, 하나는 사회와의 접촉을 통해 얻은 이기적, 배금주의적 인생관이 그것이다. ‘재생’은 두 사고체계의 대립이 순영의 인생을 어떻게 규정짓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순영은 이 두 사고체계 중 어떤 것을 택하는가에 따라 심한 인생의 변전을 보이게 된다.
본래 순영은 3·1운동에 참여하는 등 자기희생이라는 종교적 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봉구와 순수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3·1운동 후의 타락한 사회를 접하게 되면서 심한 갈등을 느낀다. 특히 백윤희를 만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직접 체험하게 되면서 그 갈등은 극에 달한다.
이제까지의 관념이 송두리째 뽑히는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재생’ 상편은 봉구와의 여행과 백윤희와의 여행이라는 극히 단순한 구조로 짜여져 있는데, 그 여행은 바로 두 상이한 삶에 대한 탐색과 같은 것이다. 봉구와의 여행이 둘 사이의 애틋한 감정에 촛점이 맞추어진 반면, 윤희와의 여행은 호사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 양자 사이의 갈등에서 순영은 윤희로 표상되는 쾌락의 생활로 침잠한다. 이미 순영의 사고가 실리적인 방향으로 크게 기울었을 뿐만 아니라, B형 인물이 매우 적극적으로 순영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A의 사고와 인물이 보다 더 관념적 체계 속에서만 머물고 있는 데 반해, B의 사고와 인물은 실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럼, 이를 순영의 사고의 변이를 통해 추적해 보자. 순영은 처음에 백윤희에 대해 좋지 못한 선입견을 갖고 있다. A의 입장에 섰던 순영으로서는 백윤희는 돈 많은 바람둥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백의 집을 방문하면서 B의 위력 앞에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웅장한 집의 규모, 호사스런 세간 앞에 경이를 느끼며, 화려한 상류생활을 동경하게 된다. 그녀는 연신 어리둥절해하며 큰 충격에 휩싸인다.
“어찌하면 집이 이렇게 굉장하고도 화려할까, 조선집은 도저히 서양집만 못하게만 알았더니 이런 집은 도리어 서양집보다도 아늑하고 화려하다.”
백의 안내에 따라 호사스런 집안 구조를 살피는 과정은, 곧 바로 A에서 B로의 전이와 다를 바 없다. 이제 순영에게 있어 백은 더 이상 바람기 있는 파렴치한이 아니라 능력을 갖춘 세련된 인물로 보인다.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게 되며, 이는 곧 그에 대한 호의의 감정으로 표변한다.
“처음 만날 때 순영은 ‘저것은 백윤희’ 하고선 놼입견으로 백을 무서운 악인같이 보았으나, 이 집에 들어와 오륙 시간을 있는 동안에 백에게 대한 생각이 변하였다. 첫째 백은 점잖고 공손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젠틀해 보이고 델리킷해 보일까.”

여기에 더해 선주의 계속된 설교―배금주의 연설―는 이러한 경사를 한층 가속화 한다. 결국 순영은 백과의 여행 도중에 관계를 갖게 되며, 육과 돈의 세계에 한껏 탐닉하게 된다. 50여 일 동안의 여행으로 순영은 이제 완전히 백의 정부로 변하며, 다만 남은 것은 봉구에 대한 한 가닥 미안함뿐이다. 그러므로 순영이 백의 첩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국 상편은 순영을 통해, 종교적, 도덕적 생활에서 실리적, 배금주의적 삶으로의 전락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록 순영이 봉구에 대한 미련을 보이고 또 자기희생적인 종교적 생활에 대한 갈망을 보이긴 하나, 이미 이기적 탐욕적 생활로의 경사는 너무도 명확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편에 가면 그 대립의 양상이 달라진다. 이것은 순영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로부터 B에 대한 환멸과 A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백윤희가 외도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가혹행위를 하자, 순영은 그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다.
풍족한 생활 속에 가리어졌던 결점들이 드러나면서, 백과의 생활을 후회하게 된다. 또 이에 반해 봉구에 대한 애정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하고 괴로워한다.

여기에 대해 순영은 결정적인 사건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신생아의 친부 문제와 법정에서의 진술이다. 우리는 상편이 순영의 두 번의 여행, 즉 봉구와 윤희와의 여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두 번의 여행에서 순영은 둘 모두와 관계를 갖게 된다. 윤희와의 관계 후 쾌락의 생활에 탐닉한 순영이 봉구와도 꺼리낌 없이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런데 결혼 후 태어난 아기는 외모상 봉구의 소생임이 분명하였다. 바로 여기서 윤희는 순영을 의심하게 되고, 또 가혹행위를 하게 된다. 이로 인해 부부생활은 한층 더 험악해지며, 자연 순영은 아이의 친부인 봉구에게로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그러므로 B에 전도되었던 순영의 의식이 점점 A를 회복하게 된다.

또 봉구가 살인범으로 애매하게 몰렸을 때에도 순영은 법정에서 증언을 하게 되는데 이 역시 B에서 A로의 전이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봉구는 그가 근무하던 미두점의 주인을 살해한 것으로 오인받게 된다. 주인의 아들인 경훈이 봉구가 살인범임을 거짓 증언하고 있고, 또 봉구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음으로 해서 사형판결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순영은 자신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봉구의 알리바이를 증언한다. 즉 살인이 일어난 그 시각에 봉구와 함께 여관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게 된다. 이 일은 A계열에 속하는 인물―봉구, 인순, P부인, 순흥―에겐 감동과 희망을 주는 일로 평가되지만, B계열 인물―윤희, 선주―에겐 음탕하고 우매한 것으로 비난받는다. 결국 윤희와는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지만, 반면 봉구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확인하게 된다. 순수한 사랑과 자기희생적 삶을 실천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이를 작자는 ‘재생’이라 불렀으며, 작품의 제목으로 택한 것이다. 상편이 전락의 과정이라면, 하편은 회복의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이 하나 있다. 우리는 상편이 A에서 B로의 전락의 과정임을, 하편이 B에서 A로의 회복의 과정임을 보았지만, 그것이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즉 상편에서 호사스런 생활에 접한 순영이 점점 실리적, 배금주의적 생활로 침잠해 가면 갈수록, 역으로 종교적, 도덕적 생활에 대한 미련 역시 상승한다. 작품에 보이는 순영의 고통스런 갈등은 이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A와 B는 끝없이 서로 길항작용을 하게 되며, 작품을 부분적으로 토막쳐 보면 A와 B는 대등한 모습으로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러한 점은 하편에 가면 더욱 가열되어 나타난다. B로의 전이는 한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B로의 전이를 촉발시킬 사건이나 의식이 대두될 때면 으례히 A와 관계된 의식이 망령처럼 나타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먼저 상편에서 순영은 백과 관계를 가진 후 탐욕적 생활과 의식에 몰입하게 되는데, 여기에서도 도덕적 생활에 대한 미련이 돌연 나타난다. 육욕의 생활에 침잠하였다는 자책과 함께 도덕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삶으로의 동경이 나타난다. 그 결과 여행에서 돌아온 후 P부인 앞에서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즉 전도사업과 교육진흥에 힘쓰겠다는 서약이다.
“P선생님, 저는 일생에 혼인을 아니하고 선생님을 따라서 교회 일과 교육에 종사하기로 결심하였읍니다. 죄 많은 저를 버리지 아니하시어 인제부터 일생을 선생님 곁에 있게 해 주십시요.”
그러나 이러한 자책감 속에서도, 세인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게 되고 또 백의 애절한 편지를 접하게 되면서 다시 향락적이고 배금주의적인 의식으로 변이하게 된다. 결국 작자는 한 개인 속에 내재된 두 가지 상이한 의식이 동시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승인한 셈이다.

또 하편에서는 우리는 순영의 자기희생적인 증언을 보았다. 이 일을 계기로 순영은 과거에 꿈꾸었던 자기희생적 삶으로의 경사를 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이와 상반되는 의식이 꿈틀거리게 된다. 즉 이후에 남편과 세인이 자신을 비난할 것이 두렵고, 이에 따라 지금 누리고 있는 풍족한 생활을 잃을 것을 염려한다. 그 결과 순영은 다시 검사를 찾아가 자신의 진술을 번복한다. 비록 봉구에 미안한 일이지만, 증언의 댓가로 치러야 할 희생이 극히 두려웠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A와 B의 의식은 서로 그 우열이 드러나지 않을 만큼 동시적으로 치열하게 순영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동인의 매서운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즉 작자는 인물의 성격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편리한 대로 인물의 성격을 개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자는 ‘이 인물들이면 이러케 전개되리라’는 필연적 코스를 취하지 않고, 신파 비극식의 코스를 만들어 놓은 뒤에 인물들을 억지로 그리로 몰아너엇다. 그런지라 하편에 있어서는 등장인물들은 제 성격에 맞지 안은 코스를 가노라고 그야말로 작자의 채쪽에 몰려서 허덕허덕 쫓겨다닌다.”
동인이 보기에 이광수의 인물들은 도대체 성격이 너무 들쑥날쑥하다는 것이다. 어떤 필연적 이유 없이 성격이 급전되며, 이는 곧 이야기의 전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동인의 눈에는 인물 성격의 변전이 작자의 변덕으로만 비쳐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지엽적으로는 타당성을 갖는다. 즉 그 초점을 이광수의 과도한 설명 부분에만 맞추면 옳은 지적이다. 흔히 춘원이 범하고 있는 잘못 중의 하나가 ‘설교의 과잉’으로 대표되는 작자의 ‘과도한 설명’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인물에 대한 혹은 사건에 대한 작자의 의견이 너무 독단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순진하고 정숙한 여학생으로 그려지던 순영을 백과의 여행 동안에 난잡한 여성의 대명사처럼 단정해 버린다.
“그리고 순영은 차차 백과 동무되기 위하여 술 한잔을 마시기와 담배 한모금 빨기까지도 가장 쉽게 배워 버렸다. 바다로 향한 루마루 위에 비스듬히 누워 독하고 단 서양술에 얼큰히 취하여 향기로운 청지연을 피우고 있는 순영의 모양은 여학생 시대의 얌전보다도 무섭게 사내를 홀리는 힘이 있었다.”
또 그 기술이 너무 과장되고 극단적이다. 한마디로 어떤 성격을 부각시킬 때면 항상 그 극단까지 밀고 가 형상화한다. 특히 인물에 대해 선인이냐 악인이냐를 단정적으로 기술해 버리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재생’은 저열한 작품이다. 즉 중심인물인 순영이 때로는 선인으로 때로는 악인으로 시시때때 변하고 있어, 인물의 성격조차 통일시키지 못한 통속소설류로 비판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인물의 의식이나 행위로 구성되는 작품의 근간적 줄거리에 맞춰 보면 전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동인과 춘원은 전혀 그 인간관이 상이하여 비판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동인의 인간관은 극히 단선적이다. 물론 동인도 인물의 성격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예를 들어 ‘감자’에서는 복녀가 매음녀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동인은 한 인물 내에 상반된 두 의식이 동시에 길항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즉 복녀처럼 한 번 전락하면, 오직 그 모습에 오직 충실할 뿐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춘원은 그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즉 한 인물 내에 상반된 두 의식이 동시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물의 끝없는 갈등이 고통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순영이 바로 그 예이다. (만일 동인이 순영을 그렸다면, 전락 후 한껏 향락적 생활을 누리다가 비참한 결말을 맞는 것으로 구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춘원이 그린 순영이, 훨씬 현실적 설득력을 갖고 있다. 즉 인간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상이한 두 가지 의식체계가 야누스의 얼굴처럼 불쑥불쑥 그 모습을 드러내며 고뇌하는 모습이야말로 훨씬 진솔하게 보이는 것이다.
도대체 한 가지 의식만으로 매진하는 저돌형 인간이란 우리 주위에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광수의 소설을 읽을 때, 작자의 과도한 설명 부분을 조금만 가지치기하면서 읽는다면 훨씬 풍족한 감동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순영은 의지형, 신념형 인물이 아니라, 주위의 유혹에 곧잘 휩쓸리곤 하는 나약한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 독립운동, 종교 전도 등과 같은 고결한 이상을 꿈꾸면서도 현실의 풍족한 생활을 크게 동경하는 전형적인 소시민상이다. 그러므로 순영이 보이는 혼란스런 의식 및 행위는 오히려 훨씬 진솔하게 보인?.

이런 이유로 이광수의 소설은 과정에 충실한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즉 결국 얼마만큼 변했는가 하는 결말보다는 고뇌하고 갈등하는 의식 및 행위의 변전 전체에 촛첨이 맞춰진다. 그러므로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긴장감 있는 재미를 갖출 수 있다. 이에 반해 동인의 소설은 결말에 충실한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단선적 구성으로 인해 중간의 변천보다는 결국 결말에 얼마만큼 변했는가 하는 데에 보다 더 관심이 쏠린다. 예를 들어 ‘감자’의 복녀는 어디까지 전락했는가 하는 관심이 그것이다.
결국 ‘재생’을 대할 때 그 관심의 초점을 순영이 결말에 ‘재생했는가 못 했는가’ 하는 데만 맞추면, 결코 작품의 실체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관심을 작품 전체를 통해 영과 육의 갈등, 그리고 종교적, 도덕적 이상과 실리적, 배금주의적 현실 사이의 대립이 순영의 의식과 생활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점 전체에 두어야 한다. 바로 그 과정 자체가 작품이 주는 감동인 것이다.

4. 두 가지 변명
이광수 소설의 중심인물은 흔히 작가를 연상시키곤 한다. 신분이나 성격 등에서 극히 유사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재생’의 봉구 및 여타 인물 또한 이런 예이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재생’이 탄생될 무렵의 작자를 살펴보자. 이에 대한 구인환의 진술을 옮겨 본다.
“영숙은 다시 상해에 가서 3년 만에, 그리운 이광수를 만났으나, 영숙이 일경이 보낸 밀정이란 혐의를 받고 먼저 고국에 돌아왔다. 이광수는 말없이 사라진 영숙을 찾아 나섰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되었다. 이광수가 국내로 돌아오자 변절자라는 비난이 분분했다. 이광수는 그리운 사람의 품에 안겨 조용히 그 비난을 듣고 있었다. 본부인과 합의이혼을 하고 영숙과 혼인을 하였다. 색정가,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아 온 실로 16년 만에 결혼의 문제가 해결되고, 영숙과 정식 부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922년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이광수에 대한 비난과 오해가 미움으로 변하여 온 잡지, 신문에 반박문이 실리고 동경에서는 이광수 매장회가 열리고 급기야는 어느 날 자정에 청년 5,6명이 이광수가 묵고 있는 집에 찾아와 영숙을 보고 이광수의 첩이니, 이광수는 반역자라는 등 갖은 말을 다하고는 개벽사를 찾아가서 부수고, 이광수가 다니던 총학원장 최린의 집까지 습격하는 소동을 벌였다. 여기서 이광수는 굴하지 않고 ‘가실’, ‘선도자’와 같은 작품을 쓰고 1923년 송진우의 권유로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다음해에 ‘재생’을 발표하였다.”

위 글을 통해 보면 이광수는 두 가지 비판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즉 변절자와 색정가라는 비난이 그것이다. 세인의 비난이 극심했고 또 이광수의 유약한 성격을 감안해 보면, 그의 고민은 심각했을 것이다. 더우기 그가 대중과 끊임없이 접촉해야 하는 문필가였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어떤 형태로든지 반응을 보여야 했을 것이다. ‘재생’에는 바로 그러한 비난에 대한 변명이 보이고 있다. 주로 봉구을 통해 그리고 부분적으로 독립운동 관계의 인물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먼저 ‘색정가’라는 비난을 어떻게 벗어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봉구는 순영과의 사랑에 생애의 전의미를 걸고 있다. 심지어 그가 독립운동에 관계하는 것도 민족적 과제의 실천이라는 측면보다는 주로 애정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한다. 즉 순영을 낳아 준 조선이니까, 또 순영이 기뻐해 주니까 애국해야겠다는 식이다. 여기에 이르면 애정은 애국이라는 명제를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며, 달리 말하면 애국도 애정과 연관될 때만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점 때문에 논자들은 춘원이 사회적 윤리와 개인적 윤리를 혼돈하였다고 비판한다.)

또 봉구는 2년 8개월 동안의 옥고를 순영에 대한 일념으로 버텨 낸다. 그러나 출옥한 봉구룰 맞은 것은 순영의 배신이었다. 이로 인해 봉구는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며,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특히 하편에 가면 봉구는 복수의 일념으로 미두점에 취직하여 거부가 될 것을 결심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오심 속에서도 더욱 뚜렷한 빛을 발하는 것은 순영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다. 비록 애증의 형태로 나타나긴 하지만, 역시 그 근간은 사랑이다. 그가 복수심을 보이면 보일수록 역설적으로 그 속에 숨은 애정이 두드러진다.
“봉구는 잊어버리기를 힘썼으나 잊어버리지를 아니하였다. 순영을 잊어버리는 것! 순영의 영혼이 여지없이 썩어져 버린 것으로 여기고 잊어버리는 것은 마치 인류의 영혼이 모두 썩어지어 버렸다 하여 잊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더우기 자신에게 헌신적 사랑을 베푸는 경주의 존재를 인식하면서도,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한 여성을 끝까지 그려워한다. 결국 봉구를 통해 순수한 사랑의 전형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흔히 중심인물을 자신처럼 여겨 그리곤 하는 이광수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변명감은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 변절자라는 비판에 대한 반응이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임시정부에 관여하여 조국 독립을 소리 높여 외쳤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인기 있는 문인이란 점 때문에 특히 주목을 받았다. 이런 그가 애정을 이유로 돌연 귀국하자, 빗발치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기에서도 그 비판을 벗어나고픈 작자의 잠재적 충동이 곧바로 ‘재생’의 문면에 나타난다. 즉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에 대한 진지한 언급이다.

우선 ‘재생’에 등장하는 모든 신청년, 신여성은 독립운동과 관계를 맺고 있다. 마치 조선의 신세대는 당연히 조국 독립을 외쳐야 한다는 식이다. 중심인물인 순영, 봉구 모두 3·1독립만세 시위와 관련되었다. 실제로 봉구는 2년 8개월의 징역형을 살기까지 한다. 또 순영의 오빠인 순흥은 5년의 징역형까지 언도받는다. (5년이면 소위 극악범에 해당되는 형기이다.)
이 외에도 여러 인물이 독립운동과 관계된 것으로 묘사된다. 특히 이광수는 독립운동을 신세대의 당연한 의무처럼 여기기까지 하고 있다. 신여성을 묘사한 대목을 보자.
“또 혹은 그들의 가정의 영향으로 혹은 당시의 시대정신의 영향으로 그들은 거의 다 애국자였다. 만세통에 숨어 다니며 태극기도 만들고 비밀 통신도 하고 비밀 출판도 하다가 혹 경찰서 유치장에도 가고 그 중에 몇 사람은 징역까지 치르고 나왔다.”

여기에 더해 동시대 인물들이 벌인 치열한 독립투쟁 사건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비록 작자의 설명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매우 치열한 것이다. 경찰서와 총독부가 폭파되고 그 구성원인 경관과 검사가 피격되며, 경성 내의 거부들이 독립단원으로부터 군자금을 강취당한다. 또 상해의 독립단원이 국내에 들어와 암약하는 것이 그려진다. 그리고 문면 곳곳에 독립운동이 항상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가 검열이 극심했던 일제 치하이고, 또 발표지가 당시의 유수지인 동아일보인 점을 감안해 보면, 춘원의 의지와 용기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초기에서부터 친일의 싹이 내재해 있다는 일부 평자의 논의는 반드시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 실제로 1920년대 작품을 통틀어 보더라도(몇몇 좌익계열 작품은 제외) 독립운동이 이처럼 구체적으로 표출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의외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독립운동이 표출되고 있다. 즉 독립운동에의 참여가 전혀 개인적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경훈과 순흥 처의 독립운동 역시 치열하다. 미두점 주인의 아들인 경훈은 비록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긴 했지만 국외자 취급을 받는다. 경훈은 이런한 소외감에 대한 반발로 집안의 재산까지 훔쳐내 가담하여, 상해와 조선에서 한 독립운동 집단의 책임자로 활약한다. 또 순흥의 아내는 남편이 경찰서와 총독부 폭파 거사일을 택한 것을 알고, 그 거사일에 자신이 대신 감옥 앞에서 자폭해 버린다. 물론 그 원인이 남편을 구하겠다는 개인적 이유에서 발로된 것이지만 매우 숭고한 거사라 하겠다. 물론 순흥 처의 거사는 전혀 어떠한 예고 없이 결행된 극히 돌연한 것이어서, 일면 부자연스러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이야말로 작자가 얼마나 독립운동을 절실하게 형상화하고 싶어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5. 기독교의 수용
춘원문학에 기독교가 개입될 소지는 충분하다. 백철에 의해 지적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대적 배경으로 기독교가 성황하는 개화기에 등장하였다는 점과, 둘째 영향을 준 인물이 이승훈, 안창호 등 기독교 지도자였다는 점과 셋째로 그가 미션계인 명치학원에서 공부하였고, 특히 친구 산기준부 야마자키 토시오)의 권유로 톨스토이 문학에 심취하고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
실제 작품상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중심인물인 순영과 봉구 모두 기독교인이며, 이 외에 P부인, 인순, 봉구 모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구창환의 지적처럼, 춘원의 관심은 종교적 측면보다는 사회적 측면에 보다 더 치중되어 있다. 즉 종교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준 영향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럼, 춘원이 보기에 당시 조선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떠한 가르침인가? 이를 순영이 정신적 지도자상으로 존경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 P부인의 말을 통해 확인해 보자.
“내가 보니 조선 젊은 사람들 셀피쉬한 성질 많소. 저를 희생하는 정신 셀프세크리화이스 정신 심히 부족하오. 저를 세크리화이스해서 하나님께 써브(섬기기)하는 생각이 심히 부족하오.”
특히 3·1운동 후 이기주의적 사고가 팽배한 조선 사회에 필요한 것은 ‘자기희생’ 정신이라는 것이다. 자기희생은 달리 말하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사랑과도 연관된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에선 기독교=자기희생이라는 등식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곧 모든 젊은 세대의 이념적 목표이자 그들이 부패해지지 않도록 하는 소금의 역할을 한다.
봉구와 순영 등 신세대는 기독교의 ‘자기희생’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해야 할 절실한 시대적 요구라 생각한다. 독립운동, 순결한 사랑 등이 타인 나아가서는 조국을 위한 자기희생이라 간주된다. 또 역으로 자신이 타락한 길을 갈 때면 으례 ‘자기희생’의 기독교적 교리는 질타의 목소리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춘원이 죄의 사상을 독자에게 심었다는 윤홍로의 지적은 타당성을 갖는다.)
봉구는 순영에 대한 미움이 생길 때마다 혹은 금전에 대한 유혹이 있을 때마다 ‘자기희생’이라는 이념 때문에 괴로워한다. 곧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숭고한 희생정신을 떠올리며, 자신을 재삼 추스르곤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모양으로 나도 한 번만! 한 번이라도 천하 만민을 사랑의 품에 안아 보고 싶다.”
또 예수가 유대 백성을 구했듯이 자신도 조선 백성을 구해야겠다는 식이다. 순영 역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기희생은 하나의 정신적 지주이다. 그녀가 물질의 위압 속에서도 일방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약한 성격으로 인해 자기희생의 이념을 독자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욕망의 중개자인 P부인을 통해 이루고 있다.

그녀는 현실의 유혹이 거세져 괴로울 때면, 으례 P부인을 찾아 정신적 신념을 얻으려 노력한다. 항상 P부인의 충고를 되새기며 자신의 이념적 지표로 삼는다. 순영의 P부인에 대한 의뢰심은 종교적만큼이나 열정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개자 인물의 설정은 순영의 의식 및 행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비록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이 많은 결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재생’을 해석할 경우에는 중개자의 역할을 유심히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순영은 중개자인 P부인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이념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점검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자기희생의 구체적 방법이 P부인의 예를 따라 ‘조선여성교육’으로 쉽게 낙착되며, 또 자신의 생활에 대한 가치판단도 중개자를 통해 발빠르게 내려질 수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순영의 이념 추구는 중개자의 존재로 인해 덜 절실하거나 애매한 것이 되기 쉽다. 그 구체적 예를 보자. 순영은 백윤희와의 온천 여행 후, 육욕적 생활에 대한 반성으로 크게 고통스러워하며 자기희생적 삶을 다시 갈구하게 된다. 이에 순영은 P부인을 찾아 눈물로써 참회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순영은 P부인이 자신을 용서하자, 고통으로부터 일시에 방기된다. P부인의 자애심에서 나온 용서를 마치 자신의 이념(자기희생적 삶)으로부터의 완전한 사면처럼 여기는 것이다. 즉 P부인이 용서했으니 이젠 자신의 목표로부터 완전히 홀가분해질 수 있다는 식이다.
또 편지 사건으로 엄격한 P부인이 자신을 멀리하자, 순영은 모든 의욕 특히 자신의 이념까지도 쉽게 포기한다. 그 변화의 신속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결국 순영의 P부인에 대한 맹목적 신뢰 때문에, 그 이념(자기희생적 삶)은 독자적으로 추구되지 못하고 P부인과의 관계에 따라 크나큰 위상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삽화본 특선 명작 시리즈’를 내며
소설에는 ‘삽화’가 있는 것이 제격이다.
서양 소설에는 ‘키다리 아저씨’, ‘물의 나라 아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어린이 소설뿐만 아니라 어른들 소설에도 삽화가 들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우리 나라에도 신문연재소설에는 훌륭한 삽화가 매우 많았고, 오늘날에는 단행본 소설에도 삽화가 많이 들어 있다.

“삽화라고 하면 흔히 소설의 설명도인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고 화가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으나 결코 설명도가 아니다. 소설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도리어 그림으로써 독자의 풍부한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소설로써 내용에 지시는 받지마는 이 지시를 받는 텍스트를 조형의 세계에 끌어올려서 독자의 세계로서 감상하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삽화의 정당한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적인 동시에 대중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illustrate나 illustration이란 것이 원래 밝힌다, 예시한다는 의미에서 온 것인 모양으로서 설명화라는 것은 아닌 성싶다. 보티첼리의 ‘신곡’의 삽화라든지 도레의 ‘실락원’의 삽화라든지 들라크르와의 ‘파우스트’의 삽화라든지 도미에의 작품이라든지 과거의 저명한 삽화는 모두가 예술적이고 대중적이요 결코 설명화가 아닌 한 개의 훌륭한 ‘작품’이다.”「정현웅」

이 ‘삽화본 특선 명작 시리즈’는 소설도 명작이요 삽화도 명작인 작품을 특선하여, 독자들이 명실공히 완성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입체적이요 조화롭게 엮어 이바지하는 시리즈다.
이 시리즈를 통하여 많은 독자들쳀 새롭고 참다운 문학예술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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