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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들어가는 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일생: 1564~1642년 지금 만나러 갑니다 검열의 악마 가장의 책임 와인과 여자 이야기 교직 생활 부업 별점 움직이는 지구 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기를 신성한 교회? 위대한 과학자의 착각 혹사병의 공포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과학자 새로운 과학 리필해드릴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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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에게 커피를 한 잔 사면, 그는 자신만큼 총명하게 빛나는 별들을 보여줄 것이다."
갈릴레이는 말했다. "모든 진리는 한번 발견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발견하는 일이다"라고.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갈릴레이가 발견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주장을 철회시키기 위해 그를 모욕적인 재판정에 세우고, 거짓을 강요하고, 자유를 박탈한다. 그는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주장했던 진리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보지 못했고, 집 밖으로 한 발짝 걸어나올 자유조차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중세의 무지(無智) 위에 근대 이성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을 때, 역사는 그를 가장 위대한 과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당대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자의 지혜와 용기, 희망과 절망, 외로움과 번민에 대해 들어보자. 갈릴레이 _ 인류의 눈앞으로 별을 끌어당긴 남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의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지만 자신이 수학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중퇴한 후 수학과 과학 공부에 매진했다. 이 무렵 습작으로 쓴 논문을 인정받아 대학교수 자리를 얻었고, 학생들에게 유클리드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등을 가르쳤다. 1609년 그는 망원경을 손수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달의 실제 모양, 목성의 위성 등 여러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점차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지동설에 대한 확신을 제자들과 몇몇 사람들에게 표현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로마교황청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천동설의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우회적으로 지동설에 대한 확신을 피력했다. 1632년, 『두 가지 주요 세계 체제에 대한 대화』가 출간되자 교황청은 곧 이를 금서로 지정하고, 갈릴레이를 로마로 소환했다. 몇 차례의 심문 끝에 그는 부득이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다시는 이단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옛집으로 돌아온 그는 시력을 잃은 가운데서도 필생의 대작 『두 개의 새로운 과학』을 집필했다. 국경을 넘어 신교국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이 책은 후일 현대 물리학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아이작 뉴턴의 발견에 디딤돌이 되었다. 1642년 갈릴레이는 '이단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중세의 세계관을 폐기처분하고 근대 과학의 르네상스를 여는 데 기여한 그의 공로는 길이 기억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