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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장 우리는 왜 학교를 폐지하여야 하는가 제2장 학교의 현상학 제3장 진보의 의례화 제4장 제도적 스펙트럼 제5장 불합리한 일관성 제6장 학습망 제7장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의 재탄생 역자후기 |
Ivan Il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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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그 이후>
일리히는 선진국이나 후진국이 똑같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의무교육을 페지하고 진정한 교육목적을 추구하는 대안적인 공생적 제도를 설립하는 일을 제시했다. 국가는 아동들이 학교에 다니도록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을 고용주들이 입직조건으로써 개인의 학문적 경험, 즉 학점, 시험성적, 학위 등을 고료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내놓는 대안은 교육학에서 흔히 논의되는 바우처제도와 비슷한 교육증표의 유통이다. 의무적인 취학연한을 폐지하고 누구나 평생 학습이 가능한 형태의 교육증표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가 어느 곳에서 어느 나이에 배우던 그건 본인의 선택이다. 물론 이것을 더욱 가능하고 풍부하게 하는 것은 학습네트워크의 역할이다. 학습네트워크에 참여한 사람들은 학습연결망, 교육기능의 상호교환을 위한 증표의 활용, 컴퓨터를 이용한 상호연결 방법 등을 이용해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학습’하게 된다. 이 학습연결망은 상대방과 정보교환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전화국관리자-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이 그 전화를 아편 밀매에 이용하던 테러에 이용하던 통제하거나 강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의 지배를 받음이 없이 여러 가지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는 학습을 위한 공생적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 없는 사회 논쟁> 『학교 없는 사회』는 발간 직후 서구 사회에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이 논쟁은 국내에서도 탈학교론의 주장과 유사한 이한의 『학교를 넘어서』가 발행되고 나서 큰 논쟁에 휩싸인 바 있다) 신낭만주의교육론자들(존홀트, 코졸, 실버만, 칼 로저스, 매슬로우, 닐 포스트만 등)은 탈학교론자의 학교진단을 수용하면서도 학교 대신의 급진적인 대안보다는 ‘학교의 개혁’을 주장했다. 신낭만주의자들은 교사나 학교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교육제도 내부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교육의 성격 재규정, 교육과정의 내용 재구성 등에 진력하게 된다.(이러한 주장은 현재 한국사회 내에서 교육개혁을 주창하는 사람들 다수의 입장이기도 하다) 신낭만주의자들과 달리 네오막시스트교육론자들(대표적인 학자로 보울스, 진티스, 애플 등을 들 수 있다)은 일리히의 탈학교론이 현실성을 결여한 낭만적 대안이라는 비판을 한다. 기본적인 경제구조를 유지하면서 단지 ‘조작’을 중지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의 변혁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광범위하게 실시하고 있는 보통의무교육을 폐지하는 것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교육적 문제들을 해결한다기보다는 그러한 문제들로부터 탈피하려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기회를 공교육화한 의무교육을 폐지할 것이 아니라 무상화하고, 대중화하고, 동시에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교육적 실천이 더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반면 저드슨 제롬 같은 학자는 의무교육은 의무적 애정과 마찬가지로 모순이라며 일리히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인간은 의무가 있는 곳에서도 배울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읽는 방법과 쓰는 방법 및 산술보다는 ‘의무’에서 대해 배운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만약 학교(‘자유로운’ 학교이든, 전통적인 학교이든)가 존속하고자 한다면, 우선 누구나 원할 때는 언제라도―교실에서든 학교에서든―거기서 자유로이 떠날 수 있고, 안전하며 자극적이고, 권위 있고, 진실을 대표하는 장소로서 성취해야 할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에게 확인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된 연구를 통해 일리히가 주장한 ‘학교 없는 사회’ 이후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서구사회에서의 논쟁은 1996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현실적인 쟁점으로 등장했다. 1990년대 들어 사회민주화와 함께 권력의 민주화의 싹이 움트면서 교육의 민주적 조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본직적 성격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자 일군의 진보적 교육운동가들에 의해 대안교육에 대한 논의와 탈학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역자 심성보는 그 이전에는 ‘조직’을 지키는 것에 급급해 이러한 논의가 본격화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물론 아직 그 논의가 명확한 결과물로 나타났다고 하기에는 미진하다. 하지만 학교교육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고 계속 전진하는 한 이러한 논의는 그치지 않고 진행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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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적 관리를 뛰어 넘어 자율적 공생으로>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일리히의 모든 저작 속에는 ‘타율적 관리’가 아니라 ‘자율적 공생’이라고 하는 일관된 주장이 새겨져 있다. 이는 기존의 사회과학적 해석틀 중 하나인 좌(공산주의)와 우(자본주의)의 구분에 의한 사회 현상 해석과는 명확히 다른 것이다. 오히려 그는 ‘제도의 스펙트럼’이라는 분석틀을 통해 자율과 타율이라는 극과 극의 선 안에서 우리를 어느 위치에 고정시켜야 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일리히가 특히 일반적(?)으로 좌파로 분류되는 사람들과 충돌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심지어 『성gender』에서는 기존의 여성해방운동과 그 맥을 달리함으로서 보수반동이라는 지적까지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역전적 사고 방식은 21세기가 막 시작된 현재, 그리고 여전히 ‘자율적 공생’사회로 접근하고 있지 못한 한국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함의를 갖고 있다. 비록 그의 대부분 저작이 사제직을 떠난 1969년 이후부터 그가 암과 투병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까지에 몰려 있지만, 20-30년이 경과한 지금도 그가 제기한 의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학교’와 ‘병원’의 문제는 서구사회는 물론이고 한국사회에서도 제도적 강화와 예산의 전면적인 투입에 대한 반론을 함부로 내놓기 어려운 ‘불가침’의 영역이다. 그 불가침 영역에 대해 발본적 문제제기를 해내는 일리히의 책은 당연히 수많은 질타(비판 내지는 오독) 속에 던져질 것이지만 우리의 고정된 사고 방식에 결정적 균열을 야기하게 될 수도 있다. 그가 연구한 다양한 분야 중에서도 학교와 병원을 주제로 한 『학교 없는 사회』와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전집의 첫 번째 목록에 올려놓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학교 없는 사회? - 단 한번도 ‘반론’의 목록에 올려놓지 못했던 주제> 학교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가치 있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교사나 전문가에 의존해야 한다거나, 교육기회의 균등을 의무취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등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나 사회주의 사회가 공히 가지고 있는 전제이며, 대안학교를 주장하고 있는 신낭만주의학파나 ‘신인간형’ 창출을 주장하는 네오막시스트 역시 공히 가지고 있는 전제이다. 하지만 이들이 학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은 일리히가 주장했듯이 마치 영혼의 구제를 교회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는 학교와 학습을 동일시하고 있는 오도된 관념이다. 학교교육의 근저에 있는 가장 중요한 전제에 대한 문제제기 하나! 사람들은 거의 모든 학습이 가르침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르친다는 일은 어떤 환경 밑에서 어떤 종류의 학습에는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지식의 대부분을 학교 밖에서 얻고 있다. 사람들이 학교 안에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몇몇 부유한 나라들의 경우 사람들이 평생을 학교 안에서 갇혀 있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학습이 가르침을 받은 결과라고 하는 신화는 오늘날 학교제도가 유사 이래 유력한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3중의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 그것은 사회의 신화를 저장하는 장소, 그 신화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제도화하고 신화와 현실 사이의 차이를 재생산하는 장소,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의례의 장소라는 3가지 역할이다. 이에 따라 교사도 ‘보호자로서의 교사’, ‘도덕자로서의 교사’, ‘치료자로서의 교사’라는 (마치 중세의 교회의 성직자와 같은)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됐다. 이들은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는 ‘신자’들에게 일방적인 ‘설교’를 해댄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전제는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한다는 의무취학의 신화와 전일제 출석이라는 신화다. 하지만 일리히가 주장하고 있는 탈학교론은 교육을 이처럼 독점지배하는 강제적이고 보호소적인 제도를 제거하는 것이다. 또 교육기회가 평등하다는 신화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빈부의 차가 존재하는 한 학습자의 사회적 조건 때문에 교육기회는 불평등하게 남을 것이 뻔하다. 교육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정당하고 올바른 방법이라는 신화를 파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학교교육의 폐지다. 일리히의 제안은 학교교육의 효과에 대한 자유주의적이고 전통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현대사회에서 학교교육의 확대는 국가간 또는 사회 내의 불평등을 고조시킨다. 현대사회에서 교육성취와 직업 신분 간의 밀접한 관계는 우리 사회가 점차 합리적이고 업적주의적으로 되어 간다는 신호는 아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학교교육이 곧 교육이며, 학교자격증이 개인의 능력을 보증해 준다는 잘못된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일리히는 교육의 관점보다 학습의 관점을 채택하고, 교사의 관점보다 학생의 관점을 지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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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르몽드>, <뉴욕타임즈> 등에 의해 20세기 최고 지성 중의 한 명이라고 치켜세워졌던 이반 일리히. 그가 20세기 최고 지성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 것은 언어, 심리, 종교, 성, 노동, 환경 등 그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고, 그가 정통하지 않는 학문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에게 돌아간 찬사의 8할은 기존의 분석틀을 깨는, 역전적 사고 방식에 있다.
<역전적 사고 방식 -현대가 만들어낸 ‘신화’에 대한 반론> 그가 실천한 역전적 사고 방식의 출발은 일상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되어온 관념(신화)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제도 혁명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끝은 산업사회의 ‘생산성’에 대립하는 공생적 사회로의 이동이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자명한 관념(신화)의 개념을 추적해보자. 가령 의료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그의 역작 『병원이 병을 만든다Limits to Medicine』에서는 의료기술의 결과로 생긴 고통, 마비, 불구 그리고 번민 등이 오늘날에 있어서 교통사고, 노동재해, 전쟁에 의한 질병 상태에 필적함을 자료와 함께 제시하며 관료적 프로그램 하에 진행되는 ‘의료의 신화’를 비판하고 있으며, 에너지 문제를 다룬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Energy and Equity』에서는 오염이 없는 에너지에 대한 ‘신화’를 비판하며 설령 오염이 없는 에너지가 발견된다고 하여도 한계를 넘는 에너지 사용이 인간을 정치적으로 불능으로 만들고 자율적 공생사회를 위한 조건들을 제약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처럼 일리히는 의사한테 치료받기만 하면 건강치료를 받은 것처럼, 사회복지사업이 강화되면 사회생활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처럼, 경찰의 보호가 높아지면 안전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 자체가 생산활동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고 마는 현대의 ‘신화’에 강력한 반론을 제기한다. 일리히는 이런 사회를 ‘가치가 제도화된 사회’라고 정의했다.(우리는 그의 글에서 언명된 이 단어를 ‘가치’가 아니라 ‘제도화’에 방점을 찍고 독해해야 한다) 그리고 일리히는 이런 가치가 제도화된 사회의 전복을 꿈꾼다. 그가 전복을 꿈꾸는 이유는 명쾌하다. 가치가 제도화된 사회는 결국 물질적인 환경오염, 사회의 분극화, 그리고 사람들의 불능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 병원, 노동, 성,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 망라된 그의 저작은 가치의 제도화에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한 그의 일관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일리히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연구는, 사람들의 인간적?창조적 그리고 자율적인 상호작용을 돕는 제도이며, 또한 가치를 만들어 내는 데-그것이 제도화 되는 것이 아니라- 이바지하고 더 나아가서는 중요한 부분을 전문 기술관료에 의해 통제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 과학 기술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다. 즉 현재의 미래학을 역전시키는 것과 같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것이 그가 꿈꾸는 공생의 사회로 가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