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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喆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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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 신작 시집 『만주만리』(실천문학사 刊)
정철훈(58)의 신작 시집 『만주만리』(실천문학사)는 2014년 4월부터 2017년 4월까지 3년에 걸친 내적 탐사의 산물이다. 우연히도 이 기간은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 해저에 침몰되었다가 극적으로 인양된 시간과 일치된다. 그러나 과연 우연일까. 침몰과 인양이라는 이 상대적이고도 양극화된 두 단어의 아우라는 시인의 기억 속에 가라앉은 앙금으로서의 이미지, 혹은 아버지 세대라는 선대(先代)의 과거사 속에 매몰된 시간에 대한 발굴과 그 궤적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니까 침몰과 인양 사이의 잃어버린 시간은 정철훈 시인에게 있어 역사의 매몰에서 발굴에 이르기까지의 또 다른 상실된 시간을 의미한다. 정철훈은 정밀하고 내밀한 탐사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적 상상력으로 그 상실의 시간과 그 현재적 의미를 우리 삶의 지층에 불쑥 꺼내놓고 있다. 세월호 선체가 해저에 가라앉아 있던 3년 동안, 나 역시 어떤 침몰상태에 있었다. 부고가 생활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생몰 연대의 괄호 안에 몰의 연대를 기입하는 게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괄호와 괄호 사이를 넘나들며 지난한 과거사를 복원하는 일이 내겐 고통이자 보람이기도 하다.(‘시인의 말’에서) 우선 눈에 띄는 시편은 ‘만주만리’라는 시집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시인의 백부와 백모의 자취가 남아 있는 중국 북만주(東北-둥베이) 지역에 대한 연작시 형식의 시적 탐사기일 것이다. 헤이타이는 내 심상 지도에서 가장 먼 땅 그 까까머리가 살아있다면 올해 칠순이고 한 번 찢어진 가슴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열세 살 손위지만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그가 늙었다는 걸 믿고 싶고 않다 그는 여전히 옛 주소지에 살던 네댓 살 까까머리이다 버스에서 내리다가 중국 아이의 까까머리에 가만히 손을 대 본다 아이야, 나이 같은 건 먹지 마라 이건 내 손이면서 내 손이 아니란다 (‘내 손이면서 내 손이 아닌’ 일부) 2016년 7월, 중국 만주 일대를 찾아간 시인은 한국전쟁 당시 그곳으로 피난을 간 백모의 행방을 탐문하다가 백모를 기억하고 있는 조선족 할머니를 극적으로 만나 당시의 상황을 청취한다. 이 녹취록은 시로 재구성되는데, 한국전쟁 당시 북한 공민들이 만주까지 피난을 갔다는 증언은 매우 희귀할 뿐 아니라 그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시인의 내면 또한 내적 분단 상태를 극복하고자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때도 여름이었을 것이다 옥수수 밭 초입에 이엉집이 있었을 테고 이엉집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던 모자는 옥수수 수염을 따면서 남녘 가족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백모를 본 듯 옥수수 푸른 잎을 만지자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서는 것만 같다 아무 것도 묻지 말라는 푸른색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푸른색 옥수수는 흙을 움켜쥔 채 흔들리고 있었다 (‘1952년 여름의 옥수수 밭’ 일부) 뿐만 아니라 시인은 지난 3년 동안 선친의 죽음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거주하던 둘째 큰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역시 알마티에 거주하던 둘째 큰아버지의 망명동지 최국인의 죽음에 접하고 조문객이 되어 그 현장으로 틈입한다. 서울-평양-알마티로 상징되는 세 개의 국경에 몸을 부비며 디아스포라의 애환을 내 문학의 한 지향이라고 여겨왔으나 요즘은 그 국경이란 게 지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죽음과 배면을 이루는 생몰의 국경으로 다가오기도 한다.(‘시인의 말’에서) 이렇듯 시인은 탄생과 죽음을 표시하는 생몰 연대의 괄호를 스스로 풀어내고 그 안에 내재된 진실과 애환을 추적하면서 현대사의 잃어버린 공간과 시간을 복원하는 일종의 이야기 시를 1, 2부를 배치하고 있는가 하면, 한 존재의 소시민적 갈등과 정서적 소강(小康)을 보여주는 시편들을 3, 4부에 배치하고 있다. 여기는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실내라오. 오늘 내가 유난히 바삭거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손이며 얼굴이 얼구워질 만큼 추운 실내 때문만은 아니라오. 한 장 무릎 담요를 덮은 채 영하의 온도를 견디며 앉아 있는 이 냉혹한 삶의 포즈가 상념의 회로를 작동시킨다는 게 아이티 대지진 후 난민아이들의 양식이 되었다는 진흙쿠키였다오. 뜨거운 햇살로 구워져 바삭거리는 진흙쿠키 말이오. 바삭거린다는 건 외형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일 터. 주변의 모든 정서적 습기를 빨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민감함이 전에 없던 바삭거림이라오. 조금이라도 습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갑자기 타오르고 마는 과민성 신경쇠약증 말이오. 바삭거림은 언제라도 자신을 태울 수 있는 불꽃을 가진 성냥과 같소. 아무도 나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해도 오늘 나의 성취는 이 신경증적 강박에 의한 바삭거림의 획득에 있소. 내 안에서 낙엽 한 장 말라가는 소리가 들려오오. 그 낙엽도 외부에서 온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내 안에 매달려 있었던 잎이었을 뿐. 바깥의 소리를 듣는데 할애한 한 시대가 끝나자 한 장 뒹구는 낙엽처럼 내가 무한한 바삭거림이 되었다는 것. 모든 뉴스가 하루 밤 사이에 낡아버린다 해도 오늘 나의 뉴스는 바삭거림의 영원성이라오. (시 ‘근황’ 일부) 요즘 내가 좋아하는 것은 사물이 흐릿하게 윤곽만 보일 뿐인 멍 때리기라고 써본다 쓰면서도 멍 때리기를 한다 희미하게 어긋나버린 것들 어떤 이별은 그 끝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가물가물한 그 이름 떠오르지 않아 새벽이 오고 끝내 모르겠다 한번 비켜갔는데 왜 포개져 있는지 끝내 모르겠다 ( 시 ‘후사(後事)’ 전문) 유성호 평론가는 정철훈의 최근 시편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정철훈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되새기면서 그 시간에 대해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부여해간다. 그 시간이 남긴 무늬야말로 시인의 직접적인 삶의 표지일 터이고 서정시가 내장하는 가장 중요한 내질(內質)이 되어간다. 그 점에서 정철훈 시편은 ‘시간 예술’로서의 속성을 강하게 구비하면서, 그 누구도 다 닿기 힘든 삶의 페이소스를 음미하게끔 해 준다. 이순을 앞에 둔 정철훈 시편의 개화다. (유성호, ‘이달의 문제작-어느 세대의 기억과 고백들’ [문학사상], 2016년 5월호)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삶은 두 번 반복된다. 정철훈의 이번 시집은 이 명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번은 그것을 살아낸 사람에 의해, 그리고 또 한 번은 그 삶을 규명하려는 시간 여행자에 의해. 시인은 이러한 정황을 월트 휘트먼의 시구에 빗대어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시의 피. 어쩌면 내 첫 기억이라고 할 어떤 혀가 시의 피를 묻혀 나를 핥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혀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이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에서 “네 혀로부터 멈춘 것들을 풀어내어라”고 노래한 ‘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동시가 많은 아이들에 의해 불리고 있는 것과 달리 나의 시는 노래가 되지 못한다. 노래가 되지 못하고, 불리지 않는 시를 써야한다는 게 내겐 어느 정도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그 혹독함이 내 문학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동력임을 알고 있다.(‘시인의 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