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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nde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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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품의 시리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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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권
프롤로그 1962년 8월 3일
특급 우편

아이 1932-1938
키스 / 목욕 / 모래의 도시 / 제스 이모와 클라이브 삼촌 / 버려진 아이들 / 선물을 주는 사람들 / 고아 / 저주

소녀 1942-1947
상어 / 결혼할 때 / 장의사에서 일하는 소년 / 어린 아내 / 전쟁 / 핀업걸 1945년 / 채용 모델 / 딸과 어머니 / 괴물 / 벌새

2권
여자 1949-1953
우수 어린 왕자님 / 미스 골든 드림 1949년 / 연인 / 오디션 / 탄생 / 안젤라 1950년 / 부서진 제단 / 룸펠스틸츠킨 / 거래 / 넬 1952년 / 룸펠스틸츠킨의 죽음 / 구원 / 그날 밤… / 로즈 1953년 / 쌍둥이자리 / 그 광경

마릴린 1953-1958
유명인 / 동방박사 / 소시지는 질리지가 않아 / 전직 운동선수: 발견 / 사이프러스 / 사라지고 나면 어디로 가나요? / 전직 운동선수와 금발의 여배우: 데이트 / 엘리제를 위하여 / 비명. 노래. / 전직 운동선수와 금발의 여배우: 청혼 / 결혼 후에: 몽타주 / 지하철 환풍구 위에 선 미국의 사랑의 여신-뉴욕 1954년 / 잃어버린 내 아름다운 딸

3권
마릴린 1953-1958
이혼 후에 / 물에 빠진 여자 / 극작가와 금발의 여배우: 유혹 / 밀사 / 어둠 속의 춤 / 미스터리. 외설. / 체리 1956년 / (미국인) 쇼걸 1957년 / 바닷가 왕국 / 작별

종생( M? 1959-1962
연민 / 슈거 케인 1959년 / 예쁘장한 쥐새끼 / 마릴린 먼로의 작품들 / 저격수 / 로슬린 1961년 / 클럽 주마 / 이혼(재촬영) / 나의 집. 나의 여정. / 대통령의 포주 / 왕자와 거지 소녀 / 사랑에 빠진 거지 소녀 / 대통령과 금발의 여배우: 밀회 / 화이티의 이야기 / 해피 버스데이 미스터 프레지던트 / 특급 우편 1962년 8월 3일 / 우리는 모두 빛의 세계로 들어간다

저자 소개 3

조이스 캐럴 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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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ce Carol Oates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캐럴 오츠는 현대 미국 문단의 대표 작가이자 고딕 호러의 대가이다. 1938년 미국 뉴욕주 록포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처음 문학을 접했고, 이후 브론테 자매, 포크너, 헤밍웨이, 소로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열네 살 때 할머니에게 타자기를 선물 받으면서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시러큐스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열아홉 살에 「구세계에서」로 대학생 단편소설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4년 첫 장편소설 『아찔한 추락』을 시발점으로 이후 지금껏 50편이 넘는 장편과 1,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캐럴 오츠는 현대 미국 문단의 대표 작가이자 고딕 호러의 대가이다. 1938년 미국 뉴욕주 록포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처음 문학을 접했고, 이후 브론테 자매, 포크너, 헤밍웨이, 소로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열네 살 때 할머니에게 타자기를 선물 받으면서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시러큐스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열아홉 살에 「구세계에서」로 대학생 단편소설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4년 첫 장편소설 『아찔한 추락』을 시발점으로 이후 지금껏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편이 넘는 단편을 비롯해 시, 산문, 비평, 희곡 등 거의 모든 문학 분야에 걸친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 찬 20세기 후반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해왔다. 1967년 「얼음의 나라에서」, 1973년 「사자The Dead」로 오헨리상을 받았고, 1969년 『그들』로 전미도서상, 1995년 『좀비』, 2011년 『악몽』, 2012년 『검은 달리아와 하얀 장미』로 브램스토커상, 2005년 『폭포』로 페미나상 외국문학상을 받았으며,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도 무려 다섯 차례나 올랐다. 1978년부터 미국학술원 회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2003년 문학 부문의 업적으로 커먼웰스상과 케니언리뷰상을 수상했다. 2006년 시카고트리뷴문학상, 2019년 예루살렘상을 받았다. 현재 프린스턴대학교 로저 S. 벌린드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 『멀베이니 가족』 『블론드』 『사토장이의 딸』 『소녀 수집하는 노인』 『카시지』 등이 있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다른 상품

동아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라이튼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비평론을 전공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여자는 왜 자신의 성공을 우연이라 말할까: 성공을 소유하지 못하는 여성들의 가면 증후군 탐구』, 『마르크스라면 어떻게 할까? 위대한 정치 철학가들에게서 듣는 일상 속 고민 해결법』, 『로즈: 영화 ‘로즈’ 원작 소설』, 『마오의 무전여행』, 『신데렐라가 된 하녀』, 『내 인생과 화해하는 법』, 『51%의 법칙』, 『지상 최대의 과학 사기극』, 『내셔널 지오그래픽 세계 위인전 시리즈』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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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창비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편집자로 경력을 쌓았고, 현재는 출판 기획자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블론드』,『J. 하버쿡 젭슨의 진술』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3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1317쪽 | 1646g | 142*216mm
ISBN13
9788965880110

책 속으로

노마 진은 다른 어른들, 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매료되는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높은 창문에서 몸을 지나치게 앞으로 내밀고 있는 사람이나 촛불에 머리카락을 너무 가까이 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녀의 이마에서 시작된 흰머리(‘상관없다’며 글래디스는 염색을 거부했다)나 멍든 것 같은 다크서클, 열을 내며 안달하는 그녀의 몸에도 개의치 않았다. 글래디스는 방갈로 현관에서 앞길과 거리에 이르기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장면을 연출했다.」 영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래디스가 「영화의 한 장면을 연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라도 연기를 하면 관심을 끌 수 있었고, 그러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관심들 대부분이 에로틱하다는 것도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
에로틱. 그건‘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니까.
광기는 고혹적이고 섹시하니까. 여성의 광기는.
그 광기 어린 여성이 충분히 젊고 매력적이기만 하다면.
수줍음 많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던 노마 진은 다른 어른들, 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어머니인 이 여자를 관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게 좋았다. 그들이 글래디스의 불안한 웃음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때문에 달아나지만 않았어도 어머니는 당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당신과 결혼해줄 남자를 찾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신명 나는 연기를 벌인 후 집으로 돌아오면 글래디스는 약을 한 움큼 삼키고는 황동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니면서 몇 시간씩이나 몸을 떨며 점액질에 덮인 듯 흐려진 눈으로 의식 없이 누워 있기만 했다. 노마 진은 그런 게 싫었다. 노마 진이 옷을 풀어주려고 하면 글래디스는 욕을 내뱉으며 손을 쳐냈다. 꼭 끼는 펌프스를 벗기려고 하면 발로 그녀를 차버렸다. “하지 마! 건드리지 말라고! 너한테 문둥병을 옮길 수도 있어! 날 좀 내버려두란 말이다.”
어머니가 그 남자들과 조금만 더 잘해보려 했더라면. 글쎄 아마도. 정말로 잘되었을 텐데!(1권) --- pp.98-99

누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아이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 속에 어떤 얼굴, 어떤 이름도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많은 날 동안 아이는 입을 닫고 지냈다. 억지로 불을 삼킨 듯 목구멍이 쓰라리고 바짝 말라 있었다. 먹을 때마다 구역질을 했고 자주 토했다. 아이는 아파 보였고 실제로도 아팠다. 아이는 죽기를 바랐다. 그 소망을 분명하게 표현할 만큼 성숙한 것이었다. 난 너무나 부끄러워,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아, 난 죽고 싶어. 하지만 그런 소망을 가져온 분노를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다. 그런 분노가 언젠가 지필 광기의 황홀함도, 언제가 되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을 정복해 세상에 복수하려는 광기 어린 야망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 없이 홀로 떨어져, 우글우글한 곤충들 속 외로운 벌레 한 마리의 가치밖에 없어 보이는 한 여자가 무슨 수로‘세상’을‘정복’할지는 둘째 문제였다. 그래도 난 당신들 모두가 날 사랑하게 만들 거야.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벌을 내려서 당신들의 사랑을 괴롭힐 거야. 그 당시 노마 진이 생각한 협박은 이런 게아니었다. 비록 영혼에는 상처를 입었지만, 격분한 어머니 때문에 하일랜드 거리 828번지의 방갈로에서 타 죽거나 화상을 입지 않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 그나마 행운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 고아의 집에는 노마 진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녀는 아픔과 혼란 속에서도 이 사실을 깨달았다. 지진아, 머리를 다친 아이, 왜 버림받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장애아, 못생긴 아이, 화난 아이, 짐승 같은 아이, 피부가 끈적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그 끈적함이 옮아올 것 같은 좌절한 아이. 여자아이들이 사는 3층 기숙사에서 노마 진의 옆 침대를 쓰는 열 살짜리 소녀가 있었다. 강간과 폭행을 당한 이 아이의 이름은 데브라 메이였다. (‘강간’이라니, 이 얼마나 거친 어른의 말인가! 하지만 노마 진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니, 알 것 같았다. 「면도날」 같은 울림을 지닌 이 말이, 절대 보여서는 안 될 부드럽고 예민하고 다치기 쉬운 여자아이의 다리 사이와 관련된 수치스러운 말이라는 것을. 노마 진은 뭔가 날카롭고 단단한 것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은 고사하고, 그곳을 공격당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았다.) 샌타모니카 산맥의 협곡에서 영양실조로 거의 죽어가다 발견된 다섯 살짜리 쌍둥이 남자아이들도 있었다. 어머니가 그들을 결박해서‘성경 속 아브라함처럼 희생물’로 (그들의 어머니가 남긴 쪽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바쳤다고 했다. 노마 진과친해진 여자아이 중에 원래 이름은 아마도 펠리체였을, 플리스라는열한 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애인이 자신의 한 살짜리 여동생을 ‘뇌가 멜론 씨처럼 흘러나올 때까지 벽에다 박아’ 죽였다는 이야기를, 섬뜩하면서도 솔깃하게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다. 노마 진은 두 눈을 닦으며 인정했다. 「자신은 상처를 받은 것도 아니었노라고.」(1권) --- pp.136-137

그녀는 영어 교사인 해링 씨에게 작문을 지어 제출했다. 크리스천사이언스의 창설자인 메리 베이커 에디와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미지의 세계를 과감히 탐험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관한 글이었다. 그리고 가로줄이 없는 백지에 푸른 잉크로 정성껏 적은 자작시들도 보여주었다.

저 하늘로 높이 올라!
나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
우울해지지 않을 터인데 절대
사랑할 수 있다면 나 그대
그럴 수가 있을까
세상 사람 모두가
“사랑해요!”라고 말한다면
오직 진실로만 그 말 한다면

“너희를 사랑하노라”신께서 말씀하시듯
“너, 그리고 너 또한”이라 하시듯
그 말씀이 늘 진실이듯

해링 씨가 어색하게 웃으며 운율이 ‘완벽’해서 ‘아주 좋은’ 시라고 하자 노마 진은 기쁜 마음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시를 보여줄 용기를 내느라 갈등한 몇 주의 시간을 모두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아직 보여줄 시들이 많았다! 그녀의 일기장은 시로 넘쳤으니까! 심지어 어머니가 소녀였을 때, 결혼 전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살던 시절에 쓴 시도 갖고 있었으니까.

붉은빛은 아침
보랏빛은 한낮
노란 낮이 지고 나니
아무것도 남지 않아
하지만 길게 늘어선 저녁의 불꽃이
드넓은 은빛 영토를 밝히지
불에 탔으나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 땅을 말이지

이 괴상한 시를, 해링 씨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읽고 또 읽었다. 아,이걸 보여준 건 실수였을까? 노마 진의 심장이 겁에 질린 토끼의 것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해링 씨는 스물아홉으로 젊은 편이었지만 학생들에게는 아주 엄격했다. 비쩍 마르고, 황갈색 머리는 벗겨지기 시작했으며, 어린 시절의 사고로 다리를 절었다. 그는 공립학교 교사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젊은 남편이었다. 「분노의 포도」속 헨리 폰다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좀 더 마르고, 좀 덜 상냥했다. 수업 시간에 늘 기분이 좋다고는 할 수 없어서 이따금씩 비꼬는 말을 퍼붓기도 했다. 해링 씨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떤 이상한 말을 할지 예상하기란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그가 웃어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해링씨는 노마 진에게 늘 웃어주는 편이었다.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노마진은 대단히 예쁜 데다 조숙한 몸매를 가진 소녀였다. 한두 사이즈 작은 스웨터를 입고 다니는, 무의식적이지만 도발적인 몸가짐을 한 소녀. 해링 씨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무의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각 없는 열다섯 살짜리 육체파라니. 게다가 그 눈빛은 또 어떻고!(1권) --- pp.212-214

감독은 금발의‘마릴린 먼로’에게 오디션을 시작하라고 지시한다. 리허설 룸에는 예닐곱 명 정도가 모여 있는데 전부 남자들이다. 접이의자들이 놓여 있고 블라인드가 환한 햇살을 가렸다. 카펫 없는 맨바닥에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흩어져 있다. 여자가 반짝이는 하얀 색 레이온 원피스(치맛자락이 좁고 벨트는 천 재질이며 잘 다림질된 보트넥 원피스는 크림빛 가슴의 윗부분이 보일 정도로 깊게 파였다) 차림으로 바닥에 차분히 드러눕는 바람에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감독이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틈도, 누군가가 말릴 틈도 없이 갑자기 벌어진 일이다. 여자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팔을 쭉 뻗은 채 진지하게 감독에게 설명한다. 첫 장면은 인물이 소파에서 자는 것으로 시작하니 바닥에 누워야 한다고, 그렇게 연습했노라고. 첫 장면에서 안젤라는 「잠들어」 있다. 「결정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 건 나이 든 남자의 눈이다. 그 남자는 유부남이자 변호사이며 그녀의‘삼촌’이기도 하다. 그의 시선을 통해서만 그녀를 봐야 하며 대본 후반부에는 경찰관의 시선을 통해 안젤라를 관찰하게 된다. 오로지 남자들의 눈으로만.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누운 이 백금색 금발 여자를 놀란 눈으로 응시한다. 내게 인물 설명을 해봐! 내게, 감독에게! 그녀는 고집 센 아이처럼 주위를 살피지 않는다. 공격적인 아이. 그는 포장을 벗겨 이 사이에 물고 있던 쿠바산 시가에 불붙이는 것도 잊었다.‘마릴린 먼로’가 잠든 척 꼼짝없이 누워 눈을 감고 연기를 시작하자 리허설 룸은 절대적인 침묵에 잠긴다. 그녀의 호흡은 깊고 느리고 규칙적(갈비뼈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한다)이다. 매끈한 팔과 나일론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최면처럼 깊은 잠에 빠져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다. 잠이 든 이 아름다운 여자의 몸을 내려다보며 남자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감긴 눈, 살짝 벌어진 입. 장면의 도입부는 몇 초밖에 되지 않지만 실제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감독은 생각한다. 그 배역을 위해 오디션을 본 스무 명 남짓한 배우 가운데 장면 도입부의 중요성을 파악한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라고. 그녀는 배역을 분석하고 실제로 대본을 (그녀의 주장대로) 모두 읽어 장면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춘 유일한 배우였다. 여자가 눈을 뜨더니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그리고 커다랗게 뜬 눈을 깜박이며 낮게 속삭인다. “어머, 나 좀 봐. 깜박 잠이 들었네.”이건 연기란 말인가, 아니면 정말로 잠이 들었단 말인가? 모두가 편치 않다. 뭔가 이상하다. 순진(혹은 교활)해 보이는 여자는 루이스 캘헌의 대사를 읽어주는 조감독이 아니라 감독을 바라본다. 그렇게, 쿠바산 시가를 여전히 이빨 사이에 물고 있는 감독을 자신의 연인인 ‘삼촌’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치 그녀의 손가락이 내 불알에 닿은 것처럼 노골적이고 농밀한 느낌이었다.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그건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연기를 못했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아니면 뭐란 말인가?(2권) --- pp.46-48

조명이 꺼지고 폭포 장면과 함께「나이아가라」가 시작된다. 우레처럼 쏟아지는 폭포 옆에 선 남자는 작고 무기력해 보인다. 그러다가 장면은 노마, 그러니까 ‘로즈’에게로 넘어간다. 침대 속. 달리 어디겠는가? 그녀가 시트 아래 알몸으로 누워 있다. 깨어 있지만 잠든척한다. … 베드신은 어떻게 검열을 통과했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그녀는 무릎을 벌리고 있다. 시트 위로 그녀의 금빛 음모가 비치는 것만 같다. 관객들은 매혹당한 채 그저 쳐다볼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그건 차라리 특별한 종류의 새로운 성기이다. 축축하고 붉은 입과 혀. 로즈가 죽으면 영화도 죽는다. (중략) 섹스를 전혀 할 줄 몰라 남자가 95퍼센트를 알아서 해야 하는 여자. 마치 연기를 연습하듯, 대사를 읊듯 “아?아?아!” 소리만 낼 뿐인 여자. 하지만 영화 속 ‘마릴린’은 분명 할 줄 알았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할 줄 아는 건 오직 카메라뿐인 것 같았고, 우리는 최면에 걸려 화면을 바라보는 관음증 환자들이었다.

영화 중간, 발기가 안 되는 남편을 로즈가 놀리고 비웃는 장면에서 카스가 내게 말한다. “이건 노마가 아니야. 이건 우리의 꼬마 붕어가 아니야.” 사실이었다. 이 로즈라는 여자는 우리가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다. 우리로서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마릴린 먼로’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이 하나같이 상이한데도 그들은 그 점을 막무가내로 무시하며 말했다. “그 여자는 연기하는 법을 몰라. 그냥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뿐이지.” 하지만 그녀는 타고난 배우였다. 천재성이라는 걸 믿는다면, 그녀는 천재였다. 노마 진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자기 안의 빈 공간을 채워야 했다. 영화에 출연할 때마다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 우리들 역시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모든 이가 다 그렇게 비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차이점이라면 단지 노마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뿐.(2권) --- pp.234-235

침대 속에서 그가 애무하고 키스하며 그녀의 배 위로 자기 뺨을 눌렀다. 임신 초기임에도 북처럼 팽팽하게 늘어난 창백한 피부가 놀라웠다. 생명력이 넘치는 건강한 몸! 자궁 속 아기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그녀는 엄격한 식단을 따랐다. 이제 비타민 이외의 약은 먹지 않았다. 혼인과 모성애를 통한 진정한 삶을 가꾸기 위해 그쪽 세계(그녀는 경멸이나 후회, 분노를 띤 어조가 아니라, 마치 수녀가 이제는 인연을 끊은 속세에서의 과거를 말하듯 무미건조하게 말했다)의 일은 그만뒀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며 들리지도 않는 배 속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는 척했다. 그녀의 배 위로 손을 올려 몇 년 전 맹장 수술로생긴 지퍼 같은 흉터를 살짝 건드렸다. 도대체 몇 번이나 낙태를 했을는지. 그녀에 대해 나돌던 소문들! 하지만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 전에도 그런 소문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절대로.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그의 욕구는, 제멋대로인 아이의 과거처럼 혼란스럽고 경솔하며 난잡한 동시에 순진하기도 한 그녀 자신의 과거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욕구였다. 그는 그 아름다운 육체의 경이로움에 빠져들었다. 이 여자가 그의 아내였다. 그의 것이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피부는 그 아름다움을 감싼 살아 있는 외피였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바다처럼 끊임없이 변모했다. 점차 달라지는 빛을 받듯. 혹은 달의 중력에 이끌리듯. 그에게 늘 신비하고 두려운 그녀의 영혼은 물보라의 꼭대기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룬 구체와도 같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영국에 있을 때 그녀는 죽고 싶어 했다. 그가 의사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몇 번이?도… 영화가 완성된 후 무너져버린 그녀는 수척하고 황폐해져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오자 몇 주 만에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이제 임신 2개월째인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건강했다. 입덧마저 그녀의 기분을 돋우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완전히 정상 아닌가! 얼마나 건강하고 정상적이야! 그가 쓴 희곡의 막다 역할을 낭독할 때만 볼 수 있었던 단순함과 솔직함이 지금 그녀에게 깃들어 있었다.
도시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끊임없는 시선으로부터 떨어져 그녀는 그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한 일이었다. 그녀를 되살려놓기 위해. 이제 내가 감당해내기만 하면 될 일.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한 번 아버지가 되다니. 쉰이 다 되었는데.(3권) --- pp.172-173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당신에게만 사랑받고 싶어요 그녀는 이 노래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녀가 빠져든 노래는 계속해 이어져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당신에게만 사랑받고 싶어요 그녀는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목을 졸리고 있었다! 당신에게 키스받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당신에게만 키스받고 싶어요 그녀는 ‘사랑스러운 슈 재즈 악단’의 슈거 케인이었다

그녀는 남자 색소폰 연주자를 피해 도망 다니는 눈부신 금발의 우쿨렐레 연주자 눈부신 금발의 슈거 케인이었다 남자들의 색소폰이 그녀의 우쿨렐레를 뒤쫓았다 그녀로서는 저항할 수 없었으리라! 또다시 또다시 그리해 언제나 그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당신에게만 또다시 벌어지고 항상,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그녀는 배운 대로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관객을 향해 속삭이고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키스하고픈 멋진 입이 더듬거리는 동안에도 약에 절고 겁에 질린 것치고는 놀랄 만큼 능숙하게 움직였다 사랑! 사랑! 사랑받고 싶어요! 역겨운 여자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었으나 그들은 그녀를 사랑했고 남자는 영화 속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신에게 키스받고 싶어요 당신에게만 하지만 이게 웃겨? 이게 웃겨? 이게 웃겨? 왜 이게 웃겨? 왜 슈거 케인이 웃기지? 왜 여자 옷을 입은 남자들이 웃겨? 왜 여자처럼 화장한 남자들이 웃겨? 왜 하이힐을 신고 비틀거리는 남자들이 웃기는 거야? 왜 슈거 케인이 웃겨? 슈거 케인의 여자 분장이 웃겨? 그게 웃겨? 왜 그게 웃겨? 여자 같으면 웃겨? 왜 사람들은 슈거 케인을 보고 웃고, 슈거 케인과 사랑에 빠지지? 왜 또다시? 왜 우쿨렐레 주자인 슈거 케인이 미국에서 그렇게 흥행에 대성공하는 거야? 왜 알코올 중독자이자 눈부신 금발의 우쿨렐레 주자, 슈거 케인이 성공한 거지? 왜「뜨거운 것이 좋아」가 걸작이야? 왜 먼로의 걸작이야? 먼로 최고의 상업 영화라니 어째서? 왜 그녀를 사랑한 거야? 왜? 그녀의 인생은 실크처럼 갈기갈기 찢겼건만 왜? 그녀의 인생은 깨진 유리처럼 산산이 조각났건만 왜? 그녀의 몸은 그렇게 피를 흘렸건만 왜? 그녀 안에 있던 게 긁혀져 나왔건만 왜? 그녀가 자궁에 독을 품고 있는데도 왜? 고통으로 머릿속이 울리고 불개미 때문에 입이 따가운데 왜? 촬영장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미워했는데, 화를 내며 그녀를 두려워했는데 왜? 그들의 눈앞에서 그녀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는데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붑 붑피 두!

‘사랑스러운 슈 재즈 악단’의 슈거 케인은 어째서 그렇게 유혹적이었을까? 당신에게 키스받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사랑! 사랑! 사랑받고 싶어요 당신에게만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마릴린이 그렇게 웃겼을까? 어째서 세상이 마릴린 먼로를 흠모했을까? 정작 그녀는 스스로를 경멸했는데. 그래서였나? 왜 세상은 마릴린을 사랑했을까? 왜? 마릴린은 자기 아기를 죽였는데 왜? 마릴린은 자기 아기들을 죽였는데 왜 세상은 마릴린과 자고 싶어했을까? 왜 세상은 마릴린과 그짓을 하고 하고또 하고 싶어 했을까? 왜 세상은 거대하게 발기한 칼날처럼 마릴린 속에 자신을 쑤셔 박고 싶어 했을까? 수수께끼야? 경고라도 하려고 했어? 그냥 또 다른 농담일 뿐이었나?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붑 붑피 두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이 끔찍한 강박증! 거지 소녀가 받은 벌이었다.(3권)

--- pp.243-244

출판사 리뷰

《블론드》의 특징
오츠 스스로 《그들》(1969년작)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블론드》는 마릴린 먼로(노마 진 베이커)라는 희대의 섹시 아이콘의 삶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전기 소설과 달리 마릴린 먼로의 드라마틱한 삶을 소재로 삼되, 전기적 사실을 평면적으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먼로의 내면의 목소리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하여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들려줌으로써 그녀의 삶을 입체적으로 묘사한 픽션이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마릴린 먼로의 삶을 중심으로, 조이스 캐롤 오츠가 줄곧 다루어 온 주제들, 성과 폭력, 남성 우월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 등이 날카롭고 정확하고 강렬한 필치로 묘사된다. 거기에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짓눌린 목소리가 있고, 자신의 참된 자아와 거짓된 자아의 균열에 대한 안타까운 외침이 있다. 그러므로 마치 신들린 목소리에서 뿜어지는 영기( ??와 냉정하고 가차 없는 묘사에서 풍기는 차디찬 질감이 절묘하게 결합돼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여자, 혹은 남자, 아니 남성 우월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의 본질, 나아가 우리 자신의 내면을 속속들이 되비춰볼 수 있는 마법의 거울 같은 작품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작품세계
『뉴욕타임스』에서 “우아하고 명료하고 지적인” 문체로 폭력과 성이 뒤범벅된 잔혹한 파멸의 세계를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은 첫 장편소설 《아찔한 추락》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른바 ‘광기에 둘러싸인 냉정한 이성’은 평온해 보이는 일상의 표면을 꿰뚫고 솟구치는 광기와 폭력의 세계를 차분하고 명징하고 냉철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키워드이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디트로이트의 흑인 거주 지역을 배경 삼아, 범죄와 마약과 인종/계급 갈등이 얽히고설킨 가차 없는 폭력의 세계를 인상적으로 묘사한 내셔널북어워드 수상작 《그들(Them)》(1969년작) 역시 “강철처럼 뜨겁고 단단한” 문체로 쓰여짐으로써, 독자의 감정과 영혼을 밑바닥부터 흔들어대는 ‘통속’적인 소재를 정밀하게 제어하여 가공하는 조이스 캐롤 오츠 특유의 고요하면서도 강인한 정신을 입증하는 작품이다. 이후에도 줄곧 현실의 사건이나 인물에서 소재를 취해 가난과 성적 학대, 계급 갈등,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성에 짓눌린 여성의 삶 등을 첨예하게 그려낸 그녀는 오랫동안 남성 작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광기와 폭력의 세계에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예민한 촉수를 들이밀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거장과 전설의 만남!
“전 언제나 사람들의 무의식 속으로 스며들어가요.” 어느 인터뷰에서 마릴린 먼로는 그녀 특유의 숨 가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다양한 대중문화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마릴린 먼로의 수많은 후예들이 그렇듯, 대중의 무의식을 지배함으로써 달콤하고 화려한 인생을 불꽃처럼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여자. 멍청한 금발, 섹스의 천사, 길 잃은 어린 소녀, 할리우드의 희생양, 좌절한 예술가 등으로 불리던 신화적 인물.
바로 그 여자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저자는 미국 문학계 최고의 여성 작가로 인정받는 조이스 캐럴 오츠. 오래 전부터 코맥 매카시, 필립 로스, 돈 드릴로 등과 더불어 영미권의 가장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거물급 여성 작가.
이른바 거장과 전설의 만남!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마릴린 먼로라니, 너무 식상한 주제가 아닌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마릴린 먼로는 상품화와 해부(분석)의 단골 소재가 아니었던가. 많은 팝 스타들이 모방하곤 하는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 이미지에서부터 지하철 환풍구에서 바람에 치켜 올라간 치마를 덮어 누르는 관능미의 클리셰에 이르기까지 마릴린 먼로는 대중문화의 판타지 공간에 너무나도 판에 박은 이미지로 자리 잡은 섹스의 화신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의 비극적인 최후를 둘러싸고 쏟아진 호사가들의 온갖 음모 이론과 추문은 또 어떻고. 노먼 메일러와 같은 1급 저자 뿐 아니라 수많은 3류 저자들에 의해 난도질당하다시피 한 마릴린 먼로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해 더 할 말이 남아 있단 말인가(물론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면이 있겠지만). 그렇다면, 조이스 캐럴 오츠의 《블론드》 역시 기껏해야 20세기 최고의 섹시 아이콘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만을 채워주는 또 하나의 통속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바로 이런 의문 때문에 뉴욕 타임스의 저명한 리뷰어 미치코 가쿠타니는 《블론드》 출간 당시 이 작품을 마릴린 먼로의 비극적인 삶과 화려한 명성을 우려먹으려는 가장 최근의 시도에 불과할 뿐이라고 씁쓸히 지적하지 쪾았던가.
하지만 진실은 그와 정반대라면 어떨까? 가쿠타니의 우려대로 마릴린 먼로의 삶을 우려먹은 게 아니라 마릴린 먼로의 배후에 숨겨져 있었던 노마 진 베이커를 되살려낸 것이라면? 그리고 그 소생 작업이 단지 한 명의 (여러 가지 의미에서) 걸출한 여배우의 진면목을 새로이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그 세상에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여자들(나아가 남자들까지)의 본질적인 면을 드러낸 것이라면? 그리하여 어떤 현지 평자는 “그들 자신의 성과 두려움과 통제력과 사랑에 대해 알고 싶은 여자라면, 반드시 《블론드》를 읽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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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솜씨로 빚어낸 마릴린 먼로의 내면의 속살
?찰리 로즈 쇼?에서 조이스 캐럴 오츠는 이 작품의 창작 동기가 “한 장의 사진, 노마 진이 아직 마릴린 먼로가 되기 전, 10대 시절에 찍은 한 장의 사진”에 있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는 “마릴린 먼로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마릴린 먼로가 되는 노마 진 베이커라는 미국의 한 소녀에 대해 쓰고 싶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오츠가 정작 쓰려고 했던 것은 노마 진이 마릴린 먼로가 되는 순간까지의 삶이었다("나는 ‘마릴린 먼로’라는 단어로 끝낼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애초에 구상했던 것은 영어 책 기준으로 175페이지 가량의 중편소설(novella)이었다. 하지만 노마 진의 삶에서 벌어졌던 일이 오츠 자신의 소설 쓰기에서도 벌어지고 말았고, 그 결과물이 영어 원서 738페이지, 우리말 번역 원고로 5천 매에 이르는 대작이다.

이 숨 막힐 듯 두툼한 장편소설에서 조이스 캐럴 오츠는 “어른의 몸을 입은 아이”(1권 204쪽)의 목소리를 줄곧 상기시킴으로써, 애초의 구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릴린 먼로라는 신화적 인물의 화려한 외관에 갇혀 있는 노마 진 베이커의 내면의 소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이 작품의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난 여기에 갇혀 있어요. 얼굴이 있는 이 금발의 마네킹 속에 갇혀 있어요. 난 그 얼굴을 통해서만 숨을 쉴 수 있죠! 그 코로만, 그 입으로만!” (3권 249쪽)
그러하기에 이 작품은 먼로의 삶을 평면적으로 따라가는 단순한 전기 소설이 아니다. 오츠가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블론드》는 마릴린 먼로의 “수많은 연인들과 의학적 위기, 낙태, 자살 시도, 영화들을 … 몇몇 상징적인 사건들로만 대치”한 픽션이며. 이 과정에서 이 작품에 윤기를 부여한 것은 오츠 특유의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마치 귓가에 울리는 환영적인 소리 같은 느낌을 주는 이 내면의 목소리가 마릴린 먼로의 굴곡 많은 생애(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 고아원과 수양 가정 전전, 때 이른 결혼, 이혼, 무명 모델, 영화 스타, 조 디마지오 및 아서 밀러와의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케네디 형제와의 염문. 그리고 비운의 죽음)를 다룬 여느 ‘통속’적인 저작물들과 《블론드》를 구분 짓는 특징적인 요소이다. 그 내면의 목소리는 ‘의식의 흐름’ 기법의 창조적 변용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작품 속에 무리 없이 녹아 있어서 , 다시 말해 모더니즘 특유의 실험적 작위성보다는 작품 자체의 논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듯한 내발성을 갖추고 있어서, 읽는 게 어색하거나 거북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문학(소설)이 어떻게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
따라서 우리는 그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화려하게 치장하고 요염하게 웃음 짓는 스크린 속의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시를 쓰고 책을 읽는 노마 진, 성적 판타지의 쓰다 버릴 소재가 아니라 찍은 장면을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할 때까지 찍고 또 찍자고 고집을 부리는 노마 진, 뜻밖에 유머 감각을 발휘하기도 하고 자신이 연기한 배역의 ‘냉엄한’ 진실을 슬프게 토로하기도 하는 노마 진, 그리하여 언제나 진정한 배우가 되고자 노력했던 노마 진의 자아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노마 진만이 아니라 수많은 타인들(주변 인물뿐 아니라 익명의 목격자)의 목소리를 마치 영매처럼 들려주고 있어서, 작품에 쓰인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저 심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창문 밖 야자수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 글래디스는 그 소리를 그렇게 불렀다. 언제나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며.」(1권 63쪽)

「어쨌든 전쟁으로 남자도 여자도 아이들도 잔뜩 죽은 후로는 몸이 더욱 부족해졌어. 이 가엾은 죽은 영혼들은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데 말이야.」(1권 63쪽)

「바람에 야자수 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죽은 자들의 영혼이야. 돌아오고 싶어 하는.」(1권 352쪽)

마치 오츠 스스로 죽은 자의 혼이 씌워진 영매가 되어 마릴린 먼로-노마 진의 전모를 다양한 시선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하기에 이 작품은 신들린 목소리에서 뿜어지는 영기로 감싸여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거기엔 냉정하고 가차 없는 묘사에서 풍기는 차디찬 질감이 있다.

신들린 목소리에서 뿜어지는 영기와 냉정하고 가차 없는 묘사에서 풍기는 차디찬 질감이 절묘하게 결합된 걸작
분명 이 작품의 문체에 대해서는 엇갈린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현지 평단에서도 《블론드》가 때로는 질퍽거리는 감상적 문체로 얼룩져 있다는 평가가 있다. 게다가 실명을 쓰는 대신, ‘어여쁜 공주님’이니 ‘우수 어린 왕자님’ 같은 동화적 표현이나 ‘전직 운동선수(’(조 디마지오), ‘극작가’(아서 밀러) 같은 우회적 표현을 쓴 것은 실제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대신 모종의 프리즘을 통해 윤색하려 했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문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는 자신을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 우려먹으려는 할리우드 산업에 대항했던 마릴린 먼로를 너무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낸 게 아닌가 하는 비판과 결부되어 있다.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기에 언제나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대체-아버지를 찾아 헤맨 의지박약의 길 잃은 소녀처럼 마릴린 먼로를 그렸다는 비판. 남편을 부를 때면 늘 ‘대디’라고 부른다거나 “아기 같은 목소리로 숨 가쁘게” 앵앵거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거꾸로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오히려 조이스 캐럴 오츠가 ‘여성’ 작가로서 여성의 어떤 본질을 포착한 것이라고. 바로 이 점에서 그녀의 냉정함이 빛을 발휘한 것이라고. 여성 고유의 치부(내밀한 욕망)마저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냉정함! 그리고 그 냉정함이야말로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의 치부마저 고스란히 드러내는 힘이라는 실감!
왜냐하면 남녀 사이의 지배-의존 관계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정반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의존하지만, 남자는 여자가 그렇게 자신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는 변증법적 역설. 그러므로 ‘극작가’로 호명되는 아서 밀러의 다음과 같은 사색은 얼마나 진실하게 울리는가!

「그녀의 남편이자 한 사람의 남성이기도 한 그는 첫 번째 접촉, 성적인 의도를 부인할 수 없는 그 첫 번째 접촉, 첫 번째 진짜 키스를 나눌 때부터 자기 안으로 흘러들려는 여성의 우월한 힘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막다, 그의 영감이었으며, 그 이상이었다!
이러한 힘은 마치 번개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힘이야말로 극작가로서의, 남자로서의 그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아니면 파괴할 수도.」(3권 188쪽)

혹은 한때 수양 딸로 키웠던 노마 진이 잡지 모델로 찍은 사진을 보며 욕망과 혐오를 동시에 느끼는 워렌의 심리를 표현한 다음과 구절.

「『스웽크』의 표지뿐만 아니라 안쪽에도 하얀 티셔츠를 입은 비슷한 사진들이 두 페이지에 걸쳐 실려 있었다. 창녀처럼 유두와 엉덩이를 드러낸 채로. 워렌은 치솟는 욕망과 함께 뭔가 썩은 것을 씹은 듯한 혐오감을 느꼈다. “빌어먹을. 다 그년 때문이야.”그는 엘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녀가 가족을 망친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뭔가를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으로 움찔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보고 있던『스웽크』1945년 3월 특별호를 조심스레 챙겨 책상 서랍 안 오래된 재무 서류 아래 숨겼다.」(1권 337-38쪽)

여성의 고유한 힘은 ‘유혹’에 있다는 장 보들리야르의 통찰이 올바른 것이라면, 그 여성성을 최대치로 구현한 인물인 마릴린 먼로야말로 수동적인 유혹자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예뻐지고 섹시해지고 싶은 성형 욕구가 극대화되어 발현된 우리 시대가 표면적으로는 남녀평등이 정착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마릴린 먼로가 활약했던 시대보다 남녀관계의 적나라한 실상이 더욱 더 노골적으로, 원시적으로 전개된 시대가 아닌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걸그룹들이 풍미하는 우리 시대가! 그러므로 《블론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하나의 화두를 던져주는 문제작으로도 읽힐 수 있으리라.

덧말 1. 독자들은 아직까지 국내 독서계에서는 무명 작가(?)나 다름 없는 조이스 캐럴 오츠가, 매일 아침에 달리기로 몸을 단련하고 오전에 서너 시간, 저녁에 서너 시간씩 매일 글을 쓴다는 이 노작가가 왜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지 그녀의 대표작 《블론드》을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덧말 2.. 마릴린 먼로 사망 50주년이 되는 내년에 개봉할 예정으로 이 책을 원작으로 하고 나오미 와츠가 주인공을 맡은 영화가 현재 제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덧말 3. 이 책이 공역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꼭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애초에는 두 분 선생님이 맡은 역할이 따로 있었지만, 소설이라는 특성을 감안하여 문체를 통일하기 위해 교차 교정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한 분이 책 전체의 문장을 조율하는 책임을 맡았다. 굳이 나누면 책의 전반부는 송기철 선생, 후반부는 강성희 선생의 색깔이 짙다고 할 수 있지만, 어느 한 분이 압도적이라 할 만큼 지배적인 역할을 맡은 부분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마다 옮긴이를 구분하지 않고 세 권 모두에 두 분의 이름을 올렸다.

덧말 4.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들의 노래 Femme Fatale]을 들으며 이 작품을 읽으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 「Velvet Underground-Nico」(1967년)는 앤디 워홀이 후원자로 제작을 도왔을 뿐 아니라 그의 ‘바나나’ 이미지가 재킷 사진으로 쓰인 것으로 유명한 앨범이다. 그런데 그 앤디 워홀은 마릴린 먼로에게 들려 있었던 예술가였다. 그러므로 저 노래의 ‘팜므 파탈’은 마릴린 먼로가 아니었을까. (사실은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워홀의 한때 연인이었던 에디 세즈윅이라는 다른 여배우가 이 노래의 모델이었다. 앤디 워홀이 루 리드에게 부탁한 것은 분명 에디 세즈윅에 관한 노래였으니까. 하지만 앤디 워홀의 복잡한 마음속을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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