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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고병권
그린비 201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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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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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총서

책소개

목차

1.민주주의는 다수자의 통치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
민주주의의'아르케 없음'
데모스의 '형상 없음'
민주주의,다수성의 정치에서 소수성의 정치로

2.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을 의미하는가
근대민주주의의 삼각형
주권의 발생과 요용
인민(국민)전능하면서 무력한 자
대표-대의제의 도식
민주주의-국민과 주권의 저편에서

3.민주주의는 도달할 목표인가
민주주의,다시 돌아온 질문
민주화 이휴,그리고'이후'의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와 대의할 수 없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라는 힘

4.민주주의에 대한 단상
텅 빈 서판
저울을 다는 저울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
영원하다
호도하는 자
양치기가 된 늑대

후주

저자 소개 1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교사. 읽기의 집 집사. 생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임을 잊지 않으며 아픈 사람, 싸우는 사람의 삶의 의지를 지켜보고 세상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더 멀리 전달되도록 작은 앰프가 되기를 소망한다. 사람을 주저앉히는 글이 아니라 작은 힘, 작은 기쁨이라도 건넬 수 있는 춤과 같은 글을 쓰고자 한다. 니체에 이르는 길이자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섬세히 펼쳐낸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철저하고 깊이 있게 읽어낸 〈북클럽 『자본』〉 시리즈(전 12권), 우리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교사. 읽기의 집 집사. 생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임을 잊지 않으며 아픈 사람, 싸우는 사람의 삶의 의지를 지켜보고 세상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더 멀리 전달되도록 작은 앰프가 되기를 소망한다. 사람을 주저앉히는 글이 아니라 작은 힘, 작은 기쁨이라도 건넬 수 있는 춤과 같은 글을 쓰고자 한다.

니체에 이르는 길이자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섬세히 펼쳐낸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철저하고 깊이 있게 읽어낸 〈북클럽 『자본』〉 시리즈(전 12권), 우리 사회의 현재를 그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한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묵묵』, 현장의 운동과 사건과 사람을 담아낸 『“살아가겠다”』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추방과 탈주』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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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196g | 140*204*20mm
ISBN13
9788976823618

책 속으로

만약 수적인 ‘다수’로 모든 걸 결정하는 정체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면, 민주주의 이념이란 기껏해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과 통념 이상이 아닐 것이다. 만약 어느 논자(최장집)의 말처럼 민주주의의 핵심이 “정당들이 득표를 위해 투표자 다수의 관심이나 선호에 반응하는 노력”에 있다면, 소수자들은 아마도 그런 민주주의에 의해 폭력적 배제를 경험할 것이다.
--- p.41

우리가 민주주의라 믿는 국민주권 체제는 국민이라는 이름의 절대권력이 한없이 나약한 개별 인민을 다루는(양육하든 통제하든)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모두(everybody)가 주권자라는 점에서 아무도 개별적으로는 주권자가 아닌(nobody) 체제. 왕의 두 신체(주권적 신체와 자연적 신체)처럼 인민도 두 신체를 가졌다. 주권자로서 인민은 참으로 신성하고 전능하지만 개별적으로 참으로 무기력하고 무능하다. 전능함과 무력함이 함께 모인 곳, 그곳이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자부하는 국민주권 체제이다.
--- p.68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막연한 상상은 대개의 경우 그 비현실성으로 말미암아 대의제 옹호론의 먹이가 되기 쉽다.……직접민주주의는 어떤 기술적 조건(가령 전자통신기술의 발전)이 마련된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다. ‘대표 없는 국민주권’을 꿈꾸는 것은 ‘상품은 원하면서 화폐는 원하지 않는 것’과 같고, ‘교황을 없애면 가톨릭이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주권과 국민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 p.76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같은 행동을 할 때 우리는 퇴행적이라는 말을 한다. 아마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제 나이 먹었으니 어른스럽게 행동하라’는 식의 훈계를 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어른의 시각’은 종종 ‘공안의 시각’이기도 하다. 새로 만들어진 체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공안의 시각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투영될 수 있다. 한때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것, 심지어 그때의 이념과 습속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어떤 사람이 영원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린이의 진실’을 생산하지 못할 때, 다시 시작하는 자가 되지 못할 때, 그 민주주의자는 늙기 시작한다.
--- p.97

언뜻 생각하기에 대중의 목소리는 직접적일수록 명료하고 간접적일수록 불명료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대표자의 언어로 매개된 말은 명료하지만, 대중의 직접적 목소리는 강렬할지언정 명료하지 않다. 특정한 대표체계에 속해 있지 않을 때 대중의 목소리는 소음처럼 들리고 대중의 얼굴은 익명적이 된다.
--- p.105

오랫동안, 적어도 플라톤 이래로 서구의 사상은 정치가를 ‘좋은 목자’의 이미지로 그려 왔다. 정치학은 ‘좋은 목자’를 선별하는 기술로 축소되곤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근대적 이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주의란 인민이 자기 삶을 관리하고 육성해줄 좋은 대표를 찾는 일인 것처럼 간주되곤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좋은 목자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대중이 양떼로 전락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삶을 가꾸는 능력이 없을 때, 대중은 삶을 지배하는 권력에 자신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대중은 무능과 두려움 속에서 이 대표, 저 대표를 갈아타는 일만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 운명은 결국 엘리트의 힘에 의존하게 되고, ‘데모스의 힘’이 아닌 ‘엘리트의 힘’이 민주주의의 역량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 p.109

출판사 리뷰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원리는 복잡할 게 없다고 말한다. 모든 민중, 모든 국민이 지배하는 게 민주주의라고(이름하여 국민주권!!). 다만 모두가 청와대에 앉아서 국사를 논할 수는 없으니 현실적으로 투표를 통해 대표를 뽑는 거라고(이름하여 다수결!!). 그래서 그 대표가 통치를 하는 거라고(이름하여 대의제!!). 민주주의 원리는 단순한데 다만 그것의 현실화가 어렵다고. 그래서 민주주의는 단계를 밟아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는 거라고(이름하여 민주주의 발전론). 저자 고병권은 다수결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플라톤을 다시 읽고, 국민주권이나 대의제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홉스, 루소, 토크빌을 다시 읽으며, 발전론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한국 정치학자들의 텍스트를 다시 읽는다.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이어서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불러일으킨 민주주의 바람은 일시적인 바람이 아니라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데모스(민중)의 힘’이기 때문이다. 고병권의 ‘민주주의론’은 샌델의 ‘정의론’이나 유시민의 ‘국가론’이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어떤 균열을, 얼마만큼 냈는지, 그것의 파장과 한계를 알게 해준다. 그것은 또 그동안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담론을 주도해온 최장집의 ‘민주주의론’과도 정면으로 부딪친다. 저자 고병권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편집자)

나는 왜 ‘민주주의’에 대해 썼는가

1. 민주주의를 다시 쓰는 이유

나는 왜 민주주의에 대해서 썼는가. 이미 내 맘의 서판에 적혀 있는 민주주의, 저자를 알 수 없지만 내 맘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는 그 민주주의를 다시 써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시 쓰기’ 위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썼다.
솔직히 나는 지금의 ‘데모크라시(democracy)’를 ‘엘리토크라시(elitocracy)’와 구별할 수 없다. ‘데모크라시’, 즉 ‘데모스의 힘’이라는 말은 ‘엘리트의 힘’을 치장하는 공문구나 거죽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정치 엘리트들이 제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납작 엎드려 절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일종의 ‘대중 획득술’ 내지 ‘대중 낚기 게임’처럼 보인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려본 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조차, 민주주의를 집권자의 고민이나 집권자가 되기 위한 고민으로 축소시켜 버리곤 한다. 민주주의를 엘리트 정당들의 대중 획득술로 만들거나, 대권을 향한 공학 계산 문제로 전환시키는 것을 지금 얼마나 자주 보는가.
내가 민주주의를 다시 사유하려 하는 것은 그러니까 독재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이 책에서 쓰려고 했던 민주주의는 단순히 독재 너머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너머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불화 관계에 있는 민주주의다. 나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자임하는 정부 아래서도, 거기에 맞서, 때로는 그것에 무관하게, 민주주의를 표현하고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난 그들에게서 ‘데모스의 힘’을 보았다. 즉 나는 그들에게서 ‘민주주의’를 보았다.

2. 민주주의 -하나의 예
언젠가 장애인 야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불치병이나 난치병 환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환우회’ 한 분이 그날 청강을 했다. 여기저기서 인문학 바람이 불던 터라, 환자들과도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하러 왔다고 했다. 그날 우리는 루쉰의 유명한 문구,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한 것처럼’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깃발이 많던 시절, 그렇게도 자기 깃발을 따르면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많던 시절, 루쉰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목자를 따라 쏠려가는 양떼처럼, 이 지도자를 택했다가 좌절하면 저 지도자에게 가고, 그러다 다시 확 데어서 또 다른 쪽으로 쏠리고. 그래, 희망은 허망하다. 그러나 절망이라고 별 것이 있던가. 그것 역시 허망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의 최대 위험은 불빛을 보고 부나방처럼 마구 뛰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위험하다.

물론 어둠 속에서 절망해도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둠을 직시하고 묵묵히 걸어갈 밖에. 그때 환우회에서 온 분이 훌쩍였다. 빛을 찾으러 왔는데, 어둠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에 울음이 나온다고 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거기서 민주주의를 봤다.
그것은 내가 플라톤의 『국가』에서 봤던 동굴 속 사람들의 이미지와는 반대였다. 나는 그 야학에서 수십 년 간 사슬에 묶여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간혹 만나곤 했다. 중증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집이나 시설에 묶여 있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이데아’라는 신의 세계로 뛰어가지 않았다. 소위 ‘정상인’이라는 인간의 ‘이데아’를 원하기는커녕 그들은 그것과 싸웠다. 그 ‘이데아’가 구원이기는커녕 차별을 생산하는 ‘척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사슬을 엮었고 때로는 그 사슬을 버스나 철로에 엮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엮었고, 스스로의 학교와 집을 실험하고 고안해냈다. 그들은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권리를 창안해냈다. 플라톤이 동굴 속 사슬에 묶여 있는 이들이라고 비난했던 사람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연유로 사슬에 묶였던가. 나는 도리어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들이 잃을 것은, 누구 말마따나 쇠사슬뿐이다. 실은 그 사슬마저 그들은 버리지 않고 무기로 삼지 않았던가. 그들은 빛에 희롱당한 부나방이 아니었다. 어둠을 못 견딘 사람들은 빛을 향해 뛰어가지만, 어둠 속에서 시력을 키운 사람들은 거기서 빛나는 삶을 꾸린다. 선한 국가, 좋은 지도자가 이들에게 좋은 삶을 준 게 아니었다. 이들의 삶, 이들의 투쟁이 그나마 국가와 지도자를 조금이라도 선하게 바꾼 것이었다.
TV 드라마를 보듯 만날 청와대와 국회, 언론만 보고 있는 사람들은 조명이 비춰지지 않는 곳에서 어떤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어떤 실험들,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른다. 조명이 사람들의 눈을 빼앗아 사태를 어둡게 만든다. 중증 장애인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늙은 농부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이들의 투쟁, 이들의 실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무엇보다, 학자들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내 대답은 이렇다. 또다시 ‘민주주의가 움트고 있다.’

3. 민주주의를 쓰기 위해 민주주의를 다시 읽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 책은 내 맘 속 서판에 적힌 민주주의를 바꿔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든 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연대의 표시이다. 이 책은 내가 기왕에 읽었던 책을 어떻게 다시 읽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다르게 읽었는지를 보여준다. 민주주의를 다시 쓰기 위해 나는 민주주의를 다시 읽었다. 고대의 플라톤도 다시 읽었고 근대의 홉스나 루소, 토크빌도 다시 읽었으며, 최장집을 비롯한 최근 한국의 정치학자들 책도 다시 읽었다. 말 그대로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은 셈이다. 그리고 또한 다르게 읽은 셈이다.
이들 이론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과거에 얻은 결론들에 도전하기 위해 나는 과거의 텍스트들로 돌아간 것뿐이다. 플라톤으로 돌아간 것은 플라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다수결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였고, 홉스와 루소로 돌아간 것은 민주주의를 국민주권이나 대의제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였으며, 한국 정치학자들의 텍스트를 검토한 것은 민주주의를 발전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은 책의 줄거리와 결론을 여기에 적어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책을 읽는 이들이 금세 알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내가 논의를 열어두는 것이므로(나는 이 책의 결론을 ‘결론에 반대한다’고 썼다. 나는 결론에 반대할 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풍성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결론에 담고자 했다. 나는 결론을 여러 스타일이 공존하는, 하나의 실험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우리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와 결별할 때 새로운 민주주의가 도래한다. 아니 민주주의는 항상 새롭게 도래하면서 기왕의 민주주의를 낡은 것으로 만든다. 지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우리 체제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한계에 도전하면서 도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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