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프롤로그 _ 거미처럼 ─ 005
1. [사유/개념의] 환경으로서의 내재성 아리스토텔레스와 중국 철학 : 객관적인 전제의 환경과 전제 없음의 환경 ─ 016 생명 : 내재성이라는 사유의 환경 ─ 023 데카르트와 칸트의 경우 : 주관적인 전제의 환경 ─ 026 결론 : 사유의 환경으로서의 내재성이 가져오는 결과 ─ 035 사유가 시작하는 지점에 대한 에세이 ─ 040 2. [개념/현실적인 것의] 생산 원리로서의 내재성 평등하고 다양한 것들의 생산 원리 ─ 046 존재의 일의성 : 존재자들 사이의 평등, 다양성 ─ 055 바디우의 비판 ─ 063 결론 : 현실적인 것의 생산 원리가 내재성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것들 ─ 076 에필로그 ─ 087 참고 텍스트 ─ 089 |
신지영의 다른 상품
|
‘내재성’은 자기 자신에만 내재하지, 그 ‘어떤 것’에도 들어 있지 않고, 그 어떤 ‘주체’에도 속하지 않는다. 보통 들뢰즈의 이러한 섬세한 설명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는 ‘내재성’이라는 개념을 다룰 때 그것이 ‘우리’에 내재한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플라톤이 세계를 경험적인 것의 세계와 가지적인 초월 세계로 나누기 때문에, 들뢰즈의 ‘내재성’이 플라톤적인 초월적 가지성에 내재한다고는 오해하지 않으나, 칸트적인 방식으로 선험적 주체를 말할 때는 ‘내재성’이라는 것이 ‘선험적 주체’에, 혹은 ‘경험’에 내재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들뢰즈의 ‘내재성’은 ‘주체’에도, ‘대상’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 스스로 안에만 존재한다. ‘주체’와 ‘대상’은 ‘내재성’에 비추어 이미 ‘초월자들’(transcendants)이다. --- p.33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내재성’이 아닌 사유의 환경은 언제나 암묵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전제들은 (전제라는 개념이 원래 그러하지만) 별다른 근거가 없다. 들뢰즈가 주장하는 ‘새로운 사유의 환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재성’의 환경이며, 이 환경은 ‘아무 전제도 없는 사유’를 강요하는 그러한 환경이다. 우리는 선을 사유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나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참을 사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환경이 내재성이라는 환경이다. --- p.36 우리가 ‘내재성’이라는 사유의 바깥-비사유를 굳이 사유해 보고자 애를 쓰는 것은, 그리고 철학자들이 수많은 개념들을 만들어 내고 개념들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지적인 호기심이나 자만 때문이 아니라, 위에 기술된 수많은 문제들을 풀어 낼 수 있는 입장을 갖기 위해서이다. ‘내재성’을 견지하느냐 포기하느냐에 따라, (물론 바디우는 내재성을 꼭 버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혁명, 사랑, 과학, 예술, 자본, 집단, 행위 등등의 문제에 대한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 p.71 |
|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내재성이란 무엇인가』는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을 지배해 온 초월성과 그에 기초해 사유했던 철학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던 들뢰즈의 핵심개념인 ‘내재성’에 대한 사유를 보여 주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내재성-초월성의 구도와 더불어 현대의 철학자인 바디우(Alain Badiou)의 논의를 덧붙여 ‘사유의 환경’, ‘현실적인 것/개념의 생산 원리’로서의 내재성을 다루고 있다. 내재성은 어디에도 ‘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존재들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개념과 개념의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기서 개념의 환경이라는 것이 바로 사유의 이미지, 사유의 환경, 혹은 내재성이라 불리는 것이다. ‘내재성’이라는 것은 우리말이 주는 선입견 탓에 어딘가에 ‘내재’해 있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나, 이 느낌은 사실이 아니다. 내재성, 즉 사유의 환경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나, 그 스스로 사유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 신지영은 프랑수아 줄리앙의 ‘사물의 성향’을 참고텍스트 삼아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서양사유의 토대가 되는 초월철학과 함께 중국의 사유를 놓고 객관적인 전제의 환경과 전제 없음의 환경을 비교하고 있는 이 텍스트를 통해 저자는 중국사유에서의 ‘생성’(변화)을 들뢰즈의 맥락으로 가져와 ‘생명’이라 이름붙이고 내재성을 사유한다. 주체에도, 대상에도 속하지 않고 그 스스로 안에만 존재하는 들뢰즈의 내재성은 오로지 내재성에만 내재한다. 그리고 또한 들뢰즈가 주장하는 내재성의 환경은 아무 전제도 없는 사유를 강요하는 환경이기 때문에 무조건 선(善)이나 참을 사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선/악, 미/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제 없이 시작하는 것. 이러한 내재성의 환경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비자발성’이라는 개념이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부터 성의있게 설명하고 있는 이 비자발성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내재성에 접근하는 데 보다 수월한 힌트가 되어 줄 것이다. 다른 삶과의 소통을 위한 내재성의 환경 플라톤과 서양철학, 그 핵심에는 ‘초월’이 있고, ‘이데아’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바깥에 본질적인 근거로서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전제하는 이 초월성의 사유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수없이 많은, 다양한 삶들이 펼쳐지고 있는 내재성의 세계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초월철학의 한편에서 내재성을 옹호한 철학자들, 그들의 사상을 끌어와 ‘내재성’ 개념으로 철학사(史)를 다시 쓰고자 했던 들뢰즈의 작업에서 우리는 초월적 사유와 내재적 사유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다. 플라톤 사상과 초월성의 철학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언제나 비슷함의 정도로만 측정되는 세계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재성의 환경’은 다른 것을 생산하는 철학, 낯선 것과 마주하는 철학으로서의 들뢰즈 사유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통로가 되어 줄 것이다. 이분법을 넘어, 중심 혹은 하나로 집중되는 권력을 넘어서는 환경으로서의 내재성, 그것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획일적이고 비좁은 우리의 삶에서부터 벗어나 다른 여러 삶들을 이해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