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부 너무 멀지 않게
목련 질 무렵 집시랑물 마루의 내력 난장 눈사람 떠도는 소문 한로 겨울 강가 식은 고구마를 먹네 입춘 가막골 찬비 너무 멀지 않게 다시 11월 낮달 2부 적소에서 처서 무렵 노을은 쓸쓸한 질문 폭설 방죽 동구 2 동백 옥수수 다섯 자루 모퉁이 고샅 홍매 겨울 초상 밤새 적소에서 서러움에 대하여 달밤 3부 고비 고비 1 고비 2 고비 3 고비 4 목숨 둥지 구이에서 성덕리 판화 엽서 구름 곡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춧대가 찬이슬에 쇠어가는 저녁 무렵 돌의 북쪽 마을이 그리운 향일암 부처님 비가 4부 적막강산 산길 눈 오는 밤 고가 제삿날 장날 첫눈 당숙모 지팡이 그 해 여름 처서 초승달 흐린 날 하지 인동 당신의 오두막 독거 해설 적소에서 보낸 스무 해 | 문신(시인, 문학평론가) |
|
드러냄을 최소화하는 미니멀리즘의 시세계!
권오표 시집 『너무 멀지 않게』의 특징은 미니멀리즘이다. 사유나 이미지를 더해가는 게 주류를 이루는 세태 속에서 덜어냄의 언어와 정서는 새로운 시적 미학을 창조한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지 않고 머금을 때, 시는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권오표 시인은 알고 있다. 시인은 내면에 많은 말을 품고 산다.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들은 언어의 바벨탑처럼 끓어오른다. 그 부글거리는 언어들 중에 하나의 시어를 골라낼 때, 그 시어에서 우주가 탄생한다. 이를테면 다음 시가 그렇다. 바람도 없는데 울 밖의 오동잎이 풍경(風磬)처럼 무심히 지네 시든 줄기를 이랑으로 젖히고 두둑에 호미를 대면 고구마들이 올챙이 떼마냥 딸려 나오지 강가에 나가 보니 물속의 조약돌이 모두 퍼렇게 소름 돋아 있네 누구나 가슴 속에 서늘한 돌멩이 하나쯤은 품고 사는 법 어제는 동네에서 상여가 나갔네 아무도 울지 않았네 ―「한로」 전문 이 시를 읽고 나면 몸의 온도가 0.1℃쯤 내려가는 느낌이다. ‘서늘하다’는 말을 고르기 위해 시인은 자신의 마음 사전을 얼마나 오래 뒤적였을까? ‘서늘하다’는 말을 발견하고는 시인 스스로도 서늘해지고 말았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시를 두 번 읽고 세 번 읽으면 체온이 0.2℃쯤 상승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서늘함이 따스함을 부추기는 역설을 시인은 무심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뿐일까? 내친김에 한 번만 더 읽어보자. 네 번쯤 읽자 이 시의 진경이 보이는 것 같다. “퍼렇게 소름 돋”는 우리 삶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외발로 서서 강물을 숫돌 삼아 부리를 벼리”(「겨울 강가」)는 왜가리랄지 “까치발로 서서 발등 부비며/서걱대는 수수잎사귀”(「처서 무렵 노을은」)랄지 “초경의 계집아이 젖꼭지처럼/창호에 서린 매화송이”(「홍매」) 같은 것들은 어쩌면 애틋한 우리네 삶의 다른 모습일 것이다. 냇가에 돌들이 무더기로 진을 치고 있다 모두들 낮게 수그린 채 한쪽을 응시하고 있다 약속이나 하듯 삭발을 했다 월급 못 받고 거리에 나온 지아비들처럼 모두 이마와 어깨에 흰 띠를 두르고 있다 큰물이 지고 나서 다시 가보니 검은 돌들이 어린 돌들을 데리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모난 돌들만 남아 허리를 물속에 담근 채 물살을 견디며 북쪽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돌의 북쪽」 전문 위의 시에서 독자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북쪽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돌”이다. 그것뿐이다. 시인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시의 나머지는 모두 독자 몫으로 남는다. 이를테면 시인이 자기 정서와 언어를 최소화하는 지점에서 독자는 감성의 최대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시를 읽는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북쪽’이 가리키는 방향과 ‘돌’의 질감을 통해 시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권오표 시인은 전적으로 독자를 믿는다. 시인이 독자를 믿고 말을 감출 때, 독자는 날카로운 눈매로 감추어진 진실을 포착해낸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삶의 뒤편을 장식하는 따뜻하고 든든한 시편들! 시집은 아무 페이지부터 읽어도 좋은 거의 유일한 책이다. 권오표 시집 『너무 멀지 않게』도 마음 가는 시부터 찾아 읽는 재미가 있다. 시집을 잘 읽기 위해서는 시인이 담아낸 내면의 흔적을 살펴야 한다. 시적 사유가 시작되는 한 지점을 찾아내면 그곳에서 갈라지고 흘러내리며 번져가는 시의 정서와 언어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의 질서와는 다른 문학의 질서이다. 그 질서와 동행하게 될 때 독자의 눈길은 시인의 시선과 마주친다. 모퉁이가 있다는 건 가슴이 조금 아리기는 하나 그래도 좋은 일 네 마음의 찻집 구석에 앉아 철지난 샹송을 허밍으로 따라 가고 따라 가고 이끼 덮인 숲속 왼쪽 날개가 찢긴 산제비나비의 안부를 묻고 모퉁이가 있다는 건 네 마음 한켠에 내 무늬가 남아 있다는 흔적 능소화 툭툭 지는 저녁에 네가 사라진 골목길을 저물도록 두근대며 바라봐도 좋은 일 ―「모퉁이」 전문 ‘모퉁이’는 직선과 직선이 만나 하나의 점을 이루는 지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의 모든 것들은 모퉁이가 있다. 산모퉁이, 길모퉁이, 건물모퉁이 그리고 마음모퉁이도 있다. 그곳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자 눈길과 눈길이 부딪치는 곳이다. 가끔 우리 삶도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다른 삶과 부딪쳐 방향이 꺾이기도 하는데, 그 지점이 바로 모퉁이다. 그런데 권오표 시인에게 ‘모퉁이’는 “네 마음 한켠에/내 무늬가 남아 있다는 흔적”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도대체 마음에 남은 흔적은 무엇인가? 많은 시인들이 기억으로서의 ‘흔적’에 대해 말해왔다. 기억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여태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흔적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퉁이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고 또 저만치서 다가오는 삶이지 않을까? 시집 『너무 멀지 않게』에는 권오표 시인이 이제 그만 잊고자 하는 것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장면들이 가득하다. 얼핏 쓸쓸한 풍경 같지만, 권오표 시인은 우리 삶의 뒤편에 다채롭고 풍부한 사연들이 있다는 걸 새삼 깨우쳐준다. 그리하여 뒤돌아보지 않아도 따뜻해지고 든든해지도록 만들어준다. 그것이 『너무 멀지 않게』를 관통하고 있는 시적 울림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