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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호모 코메리카니쿠스, 그들은 승부 귀가 호모 코메리카니쿠스, 그들은 God Bless America 필라델피아 주 뉴욕 대한민국 총영사관 때 성묘 폭우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뉴욕, 김경미 J F K 가끔은 고열로 앓아야 한다 송년파티, 1995 걷다 David 뎐 2부 필라델피아에 산다 우리 모였다 흩어질 때, 정용철 형에게 토요일 한국학교 꿈은 유쾌해 공존 그 남자 필라델피아에 산다 로버트 질린스키 마마 한국영화 창씨개명 의자가 망가졌다 아침 미사 쉴링톤 수녀원 밥과 시 콘돔 바다가 보이는 객실 3부 보헤미안 랩소디 신토불이 깊고 넉넉한 고추 꽃 피었네 보헤미안 랩소디 어제의 하모니 한 부엌에서의 주의 기도와 국민교육헌장 혼합 변주 폭설 푸쉬킨 자목련 질 때, 융자 몇 가지의 음미 운문적 삶 부정교합 4부 구겨진 것들에 바침 어디쯤 구겨진 것들에 바침 슬픈 사태 아프다 겨울 숲 우물 속 틈 강 기억의 방식 언어로 가득찬 방 발문 필라델피아와 청도의 시인 │ 김경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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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그 눈물겨운 자아 탐색!
강남옥 시집 『토요일 한국학교』는 한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낯선 땅에서 고독과 고립과 적막에 익숙한 삶을 사는 이들의 사연을 디아스포라의 언어와 정서로 절절하게 풀어내고 있다. 『토요일 한국학교』에는 “코레아”와 “아메리카” 사이에 놓여 갈등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시인에게 “코레아”는 과거이며 “아메리카”는 현재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어느 곳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시인은 스스로를 “호모 코메리카니쿠스”라는 새로운 종으로 호명한다. 코레아와 아메리카 양국의 제도적 장단점을 대(對) 약자 관계에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은 경제적 이윤 창출 정도에 따른 것으로 관련 공공 지침 부재는 호모 코메리카니쿠스 커뮤니티 내부 분열의 원인에 불과하며 점진적으로 아메리카노 지침이 확산 적용되면 코레아노 체계는 설 자리를 잃어갈 것임은 호모 제페나메리카니쿠스, 호모 차이나메리카니쿠스, 호모 필리피노메리카니쿠스, 호모 베트나메리카니쿠스 등의 동아시아 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유추 가능함 끝으로 호모 아시아메리카니쿠스 계에서 호모 코메리카니쿠스를 구분해 낼 수 있는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 하나, 허기질 무렵에 사용하면 매우 효과적이라는 힌트와 함께 소개하자면, 빵+샐러드+미디움 던 스테이크 세트와 라이스+붉은 김치+부글부글 끓는 된장스튜 세트 메뉴를 줘보라는 것임 ―「호모 코메리카니쿠스, 그들은」 부분 강남옥 시인이 제시한 “호모 코메리카니쿠스”는 “코레아노”가 “아메리카노”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끝까지 코레아노임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존재이다. 아메리카노라는 새로운 신분을 마련했지만, 코레아노들은 어쩔 수 없이 “생을 뒤집어 단숨에 돌아가기엔/오래 서성거려야 하는/서성이다 발길 돌려 정글로 돌아가는/미국 동북부 보통 한국 사람들에겐 언제나/Just From Korea”(「JFK」)인 것이다. 시인은 호모 코메리카니쿠스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고 있다. 그 지점에서 비극적 역설이 발생한다. 몸은 아메리카노가 되었지만, 그림자는 영원히 코레아노에 닿아 있는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토요일 한국학교』에는 이처럼 아메리카노와 코레아노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호모 코메리카니쿠스들의 자아 탐색이 담겨 있다. 주택가 맞은 편 바이베리 애비뉴 한국사람들 죽어서도 함께 산다 기침 좀 하더니 연락 뜸하던 친구 내 몸살 나 죽겠다 전화하니 끅끅 웃더만 돌아 들어온 소문 암이라고, 아무리 남 염병보다 내 고뿔 세다 해도 죽는 날까지 부끄러웠던 친구에게 간다 친구 옆 또 친구 다섯 살배기 딸내미도 함께 친정 나간 사이 죽어 장례도 못 갔던 지인 여섯 살배기 아들내미 반갑다 미국 돌에 새긴 한국 이름들 김창수 이의기 박미희 박사라 황형권 박원준 차진수 김인규 살아서는 Mihell Park이니 John Kim이니 영어로 서명하고 결재했어도 죽어서는 돌에 새긴 또렷한 한국어로 제 이름 덮고 누웠다 한국사람 동네에 잘못 들어온 서양사람 몇 폴란드 이탈리아 러시아 아르헨티나 타향살이 인생살이 수고에 겨운 이름들 보인다 ―「성묘」 부분 코레아노로 태어났으나 죽어서도 끝내 아메리카노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묘비는 “미국 돌”로 만들지만 “한국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강남옥 시인은 이들을 ‘디아스포라’의 슬픈 운명이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낯선 “타향살이 인생살이”였지만, “한국사람들 죽어서도 함께 산다”는 건 결국 호모 코메리카니쿠스가 아메리카노에서 코레아노로 회귀한다는 걸 뜻한다. 더불어 사는 삶, 함께 사는 삶, 나누며 사는 삶은 코레아노에게 불변의 형질이므로. 가슴 아프도록 유쾌한 코레아노의 삶! 디아스포라가 지닌 불변하는 형질 가운데 독보적인 건 모국어(한국어)일 것이다. 『토요일 한국학교』라는 제목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자 호모 코메리카니쿠스의 삶을 상징한다. “토요일”이라는 한정적 시간은 코레아노로서의 삶은 토요일 하루뿐이라는 걸 뜻한다. 그렇지만 시인에게는 6일 동안 아메리카노의 삶보다 단 하루 코레아노의 삶이 그 무엇보다도 가슴 아프게 유쾌하다. 일주일에 고작 세 시간 하는 우리, 토요일 한국학교 빠진 이처럼 몇은 결석 띄어쓰기 다 틀린 작문같이 몇은 지각 “썽생님, 소쩍새가 모하는 거야?” 고급반 한국어 시간 미당의 시 한 수 도전하다 접는다 왼손으로 한국어를 쓰는 아이들 책을 말아 머리통 쥐어박으면 “It’s illegal 썽쌩님” 농담까지 한다 진달래꽃 번역 숙제 검사하다 웃다 웃다 눈물 철철 흘린다 ‘너가 나 다 쓰고 피곤해서 버리면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나가 너가 가는 길에 꼬츨 깔을 거야 (진달래꽃 가시는 걸음걸음 뿌리오리다) 고걸 살살 발고 가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소월도 이 번역 읽어본다면 나처럼 웃다 웃다 눈물 철철 흘리며 이 녀석들 품에 안을 것이라 믿는다 어쩌다 한국 나가 한 달만 있다 와도 종달새 노래 배우듯 한국말이 느는데 축구도 수영도 파티도 하고 싶은 금쪽같은 토요일 아침은 굶어도 숙제는 챙겨 실려 오는 아이들 네 뿌리를 알아라! 상투적인 칠판 탕탕 치는 대신 그냥 안아준다 화분에 물 주듯 몇 년 같이 뒹굴었더니 철자법 다짜고짜 다 틀린 카드도 건네주고 “썽생님, 나 누구게?” 일찌감치 방귀 트듯 선생한테 말 트며 뒤에서 슬쩍 가린 눈 풀고 지긋이 날 안아주기도 한다 ―「토요일 한국학교」 전문 코레아노보다 아메리카노에 더 가까운 아이들에게 한국어는 낯설고 서툴고 귀찮은 언어이다. 처음 아메리카에 발을 디뎠을 때 그들 부모가 두려운 언어(영어)를 대했던 것처럼, 아이들은 한국학교에서 “띄어쓰기 다 틀린 작문”과 온통 “illegal”한 상황을 마주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얼마나 유연하고 수용적인가! 한국어 선생님을 “웃다 웃다 눈물 철철 흘”리게 할 정도로, 아이들은 서툴면 서툰 대로 모어로서의 한국어를 즐긴다. 김소월 시 「진달래꽃」을 번역하는 대목에서는 아메리카식 한국어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괄호 속 원본과 괄호 밖 사본 사이에서 코레아노와 아메리카노의 사이, 호모 코메리카니쿠스의 위치가 확정되는 순간인 것이다. 언어의 간극을 표류하는 시인의 운명! 김경미 시인은 이 시집의 「발문」에서 호모 코메리카니쿠스의 삶이야말로 예술가로서의 시인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고 적었다. 생각해보면 시인은 누구나 다 디아스포라고 보헤미안이다. 시는 근본적으로 언제고 일상 언어와 비일상 언어의 간극을 표류하기 마련이니까. 표류하다 가끔은 한겨울 바닷물에 발이 빠지기도 하고 봄날의 바닷가를 유유히 걷기도 할 뿐인 거니까. 아니, 시인만이 아니다. 비행기에서 생명체의 관점으로 보면 세상은 육지가 있고 그 사이 사이에 바다가 있는 붙박이 중심의 구성체가 아니라 흐르는 거대한 망망대해 사이에 약간의 땅들이 조금씩 떠다니고 있는 표류 중심의 불안한 구성체이다. 그런 표류 위에서 한정된 생을 살다가는 모든 인간 역시 누구나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근원적으로 떠도는 존재들, 누구나 다 ‘호모 디아스포라’이고 ‘호모 보헤미안’이 아닐 수 없다.(본문 151페이지) 『토요일 한국학교』에는 시인의 고향 청도의 삶과 미국 필라델피아의 삶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 사이에서 호모 코메리카니쿠스의 운명이 열리고, 그 운명과 운명 사이에서 ‘호모 디아스포라’와 ‘호모 보헤미안’이 꿈틀거린다. 그 간극의 물리적 거리는 측량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심리적 ? 운명적 거리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낯선 그곳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사이’가 없기 때문이다. 『토요일 한국학교』를 통해 코메리카니쿠스의 치열한 삶을 발견해내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