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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궁정시(宮廷詩)
기왕을 따라 양씨의 별장에 들렀다가 응교하다 기왕을 따라 위가(衛家)의 산중 연못가 야간 연회에 갔다가 응교하다 임금님께서 기왕에게 구성궁을 빌려 주신 덕분에 함께 더위를 피하며 응교하다 성제(聖製) 「사 공봉에게 곡강연을 베풀어 주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3월 3일 상사절 곡강 연회에 시종(侍從)해 응제하다 성제 「현원황제 옥상 건립을 경축하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어느 봄날 아침 조회 시 문하성에서 당직을 하며 성제 「옥진 공주의 산장에 거둥해 그 석벽에 10운(韻) 20구(句)를 적다」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성제 「안서로 귀환하는 부몽 도호 겸 홍려경을 배웅하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대동전 기둥에 영지가 자라나고 용지 위에 오색 운기가 피어나는 것을 조정 백관이 다 같이 볼 제 황제께서 성은을 베푸시어 즉각 주연과 음악을 내리시매 감히 시를 지어 눈앞의 경물을 노래하다 성제 「천장절에 재상들에게 내리는 노래」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성제 「강성관에 올라 재상들과 함께 아득히 바라보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성제 「춘명문 망루에 거둥해 중서령의 뜰 안 정자를 굽어보며 ‘낙현’ 시를 읊다」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임금님께서 칙명으로 백관에게 앵두를 내리시다 최 원외의 「가을밤에 숙직을 하며」에 화답하다 성제 「늦봄에 각기 본군(本郡)으로 돌아가는 조집사들을 전송하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성제 「태자·제왕(諸王)들과 함께 3월 3일 상사절에 용지 가에서 춘계를 행하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성제 「중양절에 재상과 백관의 축수를 받으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3월 3일 상사절 근정루 연회에 시종(侍從)해 응제하다 성제 「정월 대보름날 밤 연등놀이에 이어 신민(臣民)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성제 「상사절 망춘궁에서 춘계를 올리고 주연을 즐기는 것을 보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성제 「봉래궁에서 흥경궁으로 향하는 각도 가운데서 봄 경치에 취해 선뜻 떠나가지 못하고 빗속에 봄날을 조망하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가 사인의 「대명궁에서의 아침 조회」에 화답하다 아침 조회 아침 조회 2. 애도시(哀悼詩) 고(故) 서하군 두 태수를 애도하는 노래·3수 달혜 이부시랑의 부인 구씨를 애도하는 노래·2수 고(故) 태자태사 서국공(徐國公)을 애도하는 노래·4수 공의태자를 애도하는 노래·5수 고(故) 남양군부인 번씨를 애도하는 노래·2수 3. 환유시(宦遊詩) 제주로 좌천되어 가며 장 영공께 올립니다 시흥공께 바칩니다 임금님께 불충한 죄를 용서받은 데다 얼마 후에는 또 벼슬을 제수받고 엎드려 성은에 감격하며 삼가 보잘것없는 뜻을 간찰에 적어 신임 사군을 비롯한 여러분께 올리다 4. 변새시(邊塞詩) 연지산의 노래 변새 지대로 출사(出使)하며 변새 지대에 나가 짓다 양주 신명 제사 종군의 노래 농서의 노래 농산의 노래 노장수의 노래 사냥 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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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 <봉래궁에서 흥경궁으로 향하는 각도 가운데서 봄 경치에 취해 선뜻 떠나가지 못하고 빗속에 봄날을 조망하며>에 삼가 화답해 응제하다
위수는 유유히 진나라 땅을 감돌아 굽이 흐르고 황산은 의구히 한나라 궁전을 휘둘러 비스듬히 뻗었다 임금님의 수레 멀리 황궁 성문 앞 버들길로 나와선 각도로 들어 머리 돌려 상림원의 꽃떨기를 바라본다 엷은 구름 속 황성에는 한 쌍의 봉황 궐문 우뚝 솟았고 내리는 빗속 푸른 봄 나무 사이로 수많은 인가가 보인다 이 행차는 봄기운을 타고 절기마다 성은을 베풀기 위함이요 결코 임금님 순유(巡遊)하며 경치 감상하려는 건 아니라네 奉和聖製從蓬萊向興慶閣道中留春雨中春望之作應制 渭水自?秦塞曲 黃山舊繞漢宮斜 ?輿逈出仙門柳 閣道?看上苑花 雲裏帝城雙鳳闕 雨中春樹萬人家 爲乘陽氣行時令 不是宸遊重物華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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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唐詩)의 문학적 가치와 고전적 향기는 오늘날에도 불후의 생명력을 발휘하며 전 세계 문학 애호가들을 매료한다. 시불(詩佛) 왕유는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함께 당시의 황금기를 이끈 대시인이다.
이백이 풍류 넘치는 삶을 살며 호방한 필치와 낭만적인 서정으로 시운을 만나지 못한 개인적 시름과 울분을 토로했다면, 두보는 우국 우민(憂國憂民)의 충정을 바탕으로 침울하면서도 사실적인 필치로 전란(戰亂)의 고통에 신음하는 사회 민생을 여실히 반영했다. 반면 불교에 심취했던 왕유는 역관역은(亦官亦隱)의 고뇌에 찬 삶을 살며 담박하면서도 고아한 필치로 세속적 번뇌에서 초탈하고 해탈한 정서를 묘사했다. 그 때문에 왕유의 시는 자연의 정취와 불가(佛家)적 선취(禪趣)가 넘치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는 속세를 떠난 서정의 극치로 이어진다. 그러나 왕유의 시적 재능은 은일(隱逸)한 서정에만 머물지 않았다. 적극 진취적인 처세를 보인 전기에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적 이상을 표출하는가 하면, 현실 사회의 불합리를 풍자하기도 했다. 또한 생애 전반에 걸쳐 창작된 교유시(交遊詩)와 증별시(贈別詩), 그리고 일상생활의 다양한 감정을 담은 작품에서 묻어나는 은근하면서도 온후한 정감은 감탄을 자아낸다. 입신 현달(立身顯達)의 꿈을 품고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 장안으로 가던 왕유는, 굳이 진시황릉을 찾아 애절한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흥망성쇠에 대한 깊은 감개를 토로할 정도로(1208쪽 「진시황릉을 찾아서」 참조) 어려서부터 이미 인생에 대한 통찰이 남달랐다. 그러므로 그는 가정적인 불행에 정치적 실의와 실절(失節)이 이어지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비관하거나 염세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적 생명 가치를 추구하며 정신적 해탈에 이를 수 있었다. 오늘날 치열한 생존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누구도 현실적인 고뇌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소중한 일상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는커녕 왕왕 상대적 빈곤과 열등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몸소 밭을 갈며 인생의 참뜻을 깨닫고 희열의 노래를 부른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보다는, 고통과 시련의 삶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통찰로 자신을 지켰던 왕유에게서 더욱 매력을 느낀다. 왕유의 시는 분명 고단한 현대인에게 초탈과 해탈의 지혜를 일깨워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