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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격
초콜릿 장식 시간이 흐른 뒤 비눗방울과 꼬마아이 영사실에서 그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기념우표 클러치백 아저씨 겨울 바다, 아이스크림 예전에는 경비원이 아니었을 너에게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여자 그믐밤, 제페토는 없었다 그해 겨울 마을 두 개의 이름 연탄 가게 아저씨 소유하지 못하는 것들 결국 그녀는 네버랜드로 떠났다 일수 영원 창밖을 보며 우는 남자 전하지 못한 편지 은단과 담배 시를 읽어 주던 선생님 모래성 누군가의 우울이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노트 기화 돈에 담긴 자부심 편지 일상 순수, 순정, 사랑 옥상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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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에세이, 누군가는 시처럼 살아간다
도서1팀 김도훈 (문학 담당 / eyefamily@yes24.com)
2018.03.06.
"가장 보통의 존재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찬사"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냐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게 삶이라는 〈여행스케치〉 노래가 생각납니다. 혼자이면서도 혼자이지 않은 삶. 온전히 나만의 삶일 수도 없고, 숱한 다른 사람들의 흔적이 모여 삶의 영역을 이루는, 그게 우리네 삶이지요. 『숨』은 그 언저리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버스기사, 오피스텔 경비원, 편의점 사장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지나치기 쉬운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스쳐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면서 그들을 스쳐간 내 이야기 같기도 하죠. 그들의 삶은 소설인지 현실인지 착각할 만큼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숨 쉬는 모든 순간, 숨 쉬는 모든 존재는 특별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주인공이 되기엔 평범했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들며 그들 삶에 공감하게 하는 책.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보면 묘한 위로를 받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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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를 똑바로 봐주지 않는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무생물을 대하듯 스쳐가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들에겐 하루에 한 번이지만 그에겐 수천 수백 번이었다. 경비원이 지켜야 할 것은 어쩌면 집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마음을 지키려고 경비 일을 한다니 말이 안 되지. 상처받는 일을 하면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딱딱해진다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그런데 내가 경비원이 되고 싶었던가. 하긴 예전에 다니던 회사도 그냥 다녀야 하니까 다녔지. 그땐 다들 그랬으니까. 그래도 예전에는 사는 게 그럭저럭 재밌을 때도 많았던 것 같은데.
---「예전에는 경비원이 아니었을」중에서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데 이유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 원래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하잖아. (중략) 까만 눈망울을 굴리는 꼬마 아이를 평생 기억할 아빠와 엄마처럼 나도 널 기억할 거야. 너도 그렇겠지만. 안녕. 잘 지내. 어제는 꽃구경을 갔다가 네 생각이 났어. 그리고 오늘은 그냥 네 생각이 났어. ---「비눗방울과 꼬마아이」중에서 너에게 쓰는 편지는 언제나 두서가 없다 그 두서없음이 너를 향한 내 마음의 전부였다 ---「편지」중에서 아낀다, 라는 단어는 어쩐지 우표를 쓰다듬는 사람의 미소를 닮았다 아무 날도 아닌, 누구도 아닌, 어떤 것도 아닌 나는 그걸 잊을 수 있을까 ---「기념우표」중에서 서로의 궤도가 다름에도, 나는 삶의 곳곳에서 그의 향기를 느낀다. 이를테면 길에서 간간이 마주치는 은단의 향으로. 흔해빠진 은단이 어째서 그의 향기로 기억되는지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독특하지만 흔한 향기가 그와 닮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특별했던 사람들처럼, 그 역시 특별하지만 평범하고 싶어 했으니까. ---「은단과 담배」중에서 다시 노트에 시간이 쌓인다 펜은 밤새 움직이지 않을 예정이다 불쌍한 손가락만 펜을 들고 벌을 선다 ---「노트」중에서 조용히 잠든 밤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그가 떠오른다. 아마 그는 사막같이 쓸쓸한 밤거리를 홀로 걷다가 말하는 여우를 만났을 것이다.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여우는 말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채색의 얼굴로. ---「초콜릿 장식」중에서 시련이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찾아온다니까 살아만 있으면 감당할 수 있을 게 뻔했다. ---「옥상에서」중에서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까요? 아니. 조금씩 무뎌질 뿐 시간이 지나고 아팠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내성이 생긴다는 말도 거짓말이야. 나이를 많이 먹어도 나쁜 일을 겪게 되면 똑같이 아프고 괴로워. 때로는 흉터가 덧나서 더 아프기도 하고. 그런 건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거야. 다만 잊어버린 척 하고 사는 거지. (중략) 음… 아마 너는 앞으로도 잊고 싶은 것들을 잊지 못할 거고, 몇 개의 이름을 더 기억하며 살게 될 거야. 가끔은 손바닥 위에 쌓아올린 모래성을 보다가 울게 될 거야. 손 틈으로 새어나가는 모래를 보는 건 우울한 일이거든.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너는 지금보다 아주 조금은 나아질 거야. ---「모래성」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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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에세이, 누군가는 시처럼 살아간다
『숨』은 에세이라는 장르로 구분됐지만, 에세이면서 소설이면서 동시에 시 같은 글이 한데 어우러진 책이다. 때로 우화 같기도 하다. 저자는 ‘누군가는 에세이처럼, 누군가는 소설처럼, 또 누군가는 시처럼 살아간다.’고 믿는다. 삶을 한 가지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의도를 구성으로도 구현했다.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만큼 ‘숨’의 의미 또한 다양해야 한다고 믿기에 숨이라는 단어의 의미 또한 열어 두었다. 저자의 열린 태도는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버스기사의 이야기를 그린 ‘아버지의 자격’이라는 글을 보자. 작가는 어느 비오는 날 마을버스 종점의 풍경을 그리면서 그곳에 삶을 걸치고 있는 한 평범한 가장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종점에 멈추는 마을버스 노선은 두 개뿐이었고, 차고지는 멀리 떨어진 허름한 공터에 있었다. 비가 오면 낡은 천막 틈으로 빗방울이 모여 떨어졌다. 천막의 올이 몇 가닥쯤 풀려 바람에 흔들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은 정류장 안에서도 우산을 펼쳤다.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초 때문인지 풀 냄새가 났다. 파이프는 빗물에 녹이 슬어 기댈 수 없었다. 정류장의 모든 것은 외로웠다.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기댈 곳이 없었다. (본문 ‘아버지의 자격’ 중에서) 시 같기도 하고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마을버스 종점의 풍경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디테일하게 묘사했다. 언뜻 허름한 마을버스 정류장의 풍경을 그린 것 같지만, 기댈 데 없는 한 중년 남자의 내면 풍경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잘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사실은 가장 아름답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이. 표면적으로는 담담한 문체로 서술된 것처럼 보이지만, 감정 선을 예민하게 건드리는 뉴에이지 음악의 선율처럼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이 깔려 있다. 작가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저는 사람들이 그들의 일화를 읽으며 소설 같다 여기면 좋겠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소설이 되길 바랐거든요. 누군가의 삶이 영화처럼, 소설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요. 그건 그들의 삶이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반증이니까요.” 영화를 보듯, 소설을 읽듯,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건 어떨까 이 책의 이야기들도 삶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저자가 편의점, 술집, 노래방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마주친 인연들과의 일화는 팍팍한 삶의 단면을 툭 잘라서 내보이는 듯하다. 책 속 인물 중에는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 죽음과 가까이 있거나 어둠의 세계에 갇힌 사람들, 가족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사람들도 등장한다. 그렇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는 책이다. 저자가 책 속 인물들의 조금은 우울하고 어두운 삶을 판단 없이 그저 바라봐 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속 인물들을 판단 없이 바라보기 위해 (또한 독자가 그렇게 바라봐 주길 기대하며) 인물들을 ‘그’ 혹은 ‘그녀’라고 표현했다. 저자 본인 역시 ‘그’라는 대명사로 표현하며 책 속의 그들과 동일 선상에 놓는다. 모두가 똑같이 ‘그’와 ‘그녀’로 지칭되지만 똑같은 삶은 없다. 책에서 일산을 돌던 남자와 아이스크림을 찾으러 간 남자가 동일 인물인지 다른 두 사람인지 독자는 추측하게 된다. 노래방에서 울었던 남자와 맥줏집에서 담배 심부름을 하던 남자가 동일 인물인지도 알 수 없다. 저자는 인물들의 전부를 알려주지 않는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인물의 정보를 적절하게 차단한다. 독특한 서술 방식이 독자에게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하기도 하고, 숨 쉬는 모든 존재가 특별하다고,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도 같다. 독자들은 숨 쉬며 살아가는 누구나의 삶이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는 점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고, 보잘것없다 생각했던 인생을 특별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